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182
끝
ⓒ 마늘소금
아무리 오디션이 흔한 할리우드라 해도 감독과 제작사에 따라 급이 달랐다.
어중이떠중이들이 몰리는 일을 피하고자 괜찮은 에이전시의 배우들에게만 오디션 연락을 돌리는 경우가 많았으며, 한국처럼 콕 집어 캐스팅하는 일도 없지 않았다.
한 편에 수억이 오가는 사업이니 당연했다.
그렇기에 메드닐이 ‘공개적’으로 빌런 역의 오디션을 진행한다고 했을 때 내부에서도 말이 많았다.
분명 찔러 보기 위해 오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시간 낭비다, 차라리 TV 배우 중에서 알아보자······.
메드닐 플레더의 강력한 주장이 없었다면, 그가 독립 수준의 B급 영화를 두 편 모두 400퍼센트 이상의 수익을 올렸던 천재가 아니었다면 그의 ‘무모한’ 도전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리라.
「과거를 잊지 않은 우리의 메디에게 건배.」
그리고 제작사의 우려를 기정사실로 하듯 술에 취한 지원자가 나타났다.
‘어후, 저런 놈도 배우라고.’
‘저런 새끼가 느니까 감독들이 점점 사이트에 정보 올리길 꺼리는 거잖아.’
오늘을 위해 특수 분장까지 받고 온 이들은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를 흰 눈으로 힐끔거렸다.
피터 넬슨.
한때 아역으로 잘나갔으나 알코올 중독과 상습 폭행으로 인기를 말아먹은 배우.
우습게도 재능이 없는 편은 아닌지라, 저런 꼴로 오디션장에 나타나더라도 간간이 다른 배우들을 제치고 역을 따갔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저 꼴이라니. 저 놈도 이제 글렀어.’
매부리코에 얼굴 반을 화상(火傷)으로 분장한 배우, 리처드 그레이가 냉정하게 피터의 끝을 점쳤다.
나인테일과 메드닐은 피터가 지금껏 겪어온 어중간한 회사와 감독과 달랐다.
특히 나인테일의 경우 대중들에게 다가선 친근한 이미지와 상반되게 자신들을 무시하거나 도를 넘는 태도를 끔찍이도 싫어했다.
배우들이 나인테일과 작업할 때만은 예의 발라진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길을 막고 있는데, 비켜주지 않겠나?」
리처드가 피터가 어디까지 떨어질지 예상하며 혀를 차고 있을 때 또 다른 참가자가 복도에 들어섰다.
가발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반짝이는 금발과 한여름의 짙은 풀잎을 닮은 녹색 눈이 인상적인 청년이었다.
‘게다가 약식이긴 해도 양복을······. 파티장에서 방금 왔다고 해도 믿어질 정도야.’
대학 파티처럼 술과 약에 취해 혼잡한 분위기가 아니라, 클레식이 흐르는 곳에서 하하호호 하는 게 어울릴 것 같다.
차갑지만 정중한 언어를 쓰는 청년의 태도에는 은은한 기품이 서려 있었다.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물론 그런 걸 알아볼 정신이 피터에겐 없었다.
그는 아예 바닥에 앉아 통로 전체를 막아섰다.
정중하고 예스러운 청과 달리 참 유치하고 고약한 반응이었다.
‘남의 일에 끼는 건 성미에 맞지 않지만······. 도와주는 게 나으려나?’
대뜸 시비부터 거는 주정뱅이 피터를 보며 리처드는 갈등했다.
타인의 일에는 끼어들지 않는 것이 맞다.
특히 욱해서 뭔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놈과는 상종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그러나 그 대상이 곱게 자란 것 같은, 어딘지 귀족적인 청년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리처드는 영국 드라마와 유럽의 우아한 분위기를 좋아했고, 무엇보다 얼굴에 약했으니까.
“리키, 끼어들지 마라. 괜히 피 본다.”
“음, 역시 그럴까요. 호머씨.”
“네가 도련님이나 아가씨 같은 사람을 좋아하는 건 알지만 쓸데없는 오지랖이야.”
조연으로 몇 번 같이 만나 안면을 튼 호머가 리처드를 말렸다.
처음 보는 사람을 위해 위험하고 짜증 나는 놈과 얽히지 말란 충고였다.
금발 청년이 안타깝긴 해도 미친 사람과 황소는 상종하지 않는 게 최선이었기에 리처드는 얌전히 시선을 돌렸다.
저 미친놈이 잘생긴 청년에게 지금부터 할 일을 보는 것이 괴로웠기 때문이다.
「내가 다 막았다. 어쩔래?」
「······길바닥에 눕는 것은 짐승이나 하는 행동이지. 본인의 존엄성을 이런 식으로 굴리다니. 그 정도만 하는 게 어떻겠나.」
「존, 뭐? 이 새끼가 아까부터 샌님 같은 단어나 쓰고 말이야, 네가 그리 잘났어?」
바닥에 반쯤 누워 길을 막고 있던 피터가 버럭 화를 내며 청년을 쏘아봤다.
아까부터 딱딱하고 알아듣기 힘든 발음으로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는 그가 짜증 났다.
갑작스러운 고함에 둘에게 관심 없던 이들의 시선도 금발 청년과 피터를 향했다.
「이제야 일어났군. 그대로 의자에 앉는 게 좋겠어. 오디션을 볼 이가 술에 취한 데다 옷까지 엉망이라니, 누구에게도 옳지 못해.」
「아, 됐고. 이 형이 그 재수 없는 말투 좀 고쳐줄게. 처맞다 보면 여기가 미국인 걸 알 거다 이 영국 새끼야.」
남자의 말투와 태도를 보고 피터는 그가 영국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인물이라 단정 지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서두르는 법이 없는 정중한 남자를 보고 영국의 신사를 떠올리지 못한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한때 부와 인기를 잡을 뻔한 사람으로서 가진 자들을 증오했기에, 피터는 오디션장임을 잊고 팔을 휘둘렀다.
얼굴을 노리고 들어오는 주먹을 보고도 남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선으로 비스듬하게 피해 피터의 균형이 흔들리도록 유도한 후 발을 걸어 앞으로 쏠린 무게 중심을 무너트렸다.
그리고 볼썽사납게 앞으로 넘어진 피터를 구두로 짓눌렀다.
「난 나서서 싸움을 걸지도 않지만 걸려온 싸움을 피하지도 않아서.」
「아악!! 그만! 그만!」
「팔이 꺾인 게 아픈가? 왜 자신의 고통엔 쉽게 아파하면서 폭력을 행사하는 주먹은 그리도 가벼운 것인지.」
남자가 다리에 힘을 줄 때마다 아래 깔린 피터의 비명은 점점 더 커졌다.
참가자들은 질린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다짜고짜 폭력부터 휘두른 피터가 백번 잘못했고 사내의 행동은 정당한 자기 보호였으나, 사내의 표정과 태도가 문제였다.
안타깝다는 듯 서글픈 미소를 지은 주제에 구둣발로 피터를 짓누르는 남자의 행동엔 거침이 없었으니까.
「이러면 실격 처리하겠습니다!」
사람들이 할 말을 잃을 때쯤, 다른 곳에 있던 스텝이 부리나케 나타나 청년과 피터를 떼어냈다.
「미안하네. 다짜고짜 얼굴을 노릴 줄은 몰라서 공격부터 하고 말았어. 저쪽에 있는 친구들도 잘 봤으니 답해줄 거야.」
청년은 여유로운 태도와 가벼운 미소로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스텝의 시선이 개중 가장 열렬한 눈빛을 지닌 리처드를 향했다.
「사실입니까?」
「네, 네. 비켜 달라고 저 친구가 먼저 말했는데······. 그.」
「감히 날 밟아?!」
발이 떨어지고 정신을 차린, 아니 여전히 제정신이 아닌 피터가 화난 눈으로 청년을 향해 달려들었다.
「짐승은 함부로 우리 밖으로 꺼내면 안 되는 법이지. 다 잡았다 하여 방심해서도 안 되고. 이 정도면 증명됐다 보는데.」
달려드는 피터를 다시 한번 제압하는 모습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아서, 참가자들은 멍청하게 눈을 끔뻑거리며 상황을 파악했다.
‘호신술? 진짜 어디 귀족 도련님인가?’
‘피터가 약골이긴 해도 합 맞추지 않고 저런 영화 같은 장면이 나오나?’
보고 있던 이들이 청년의 정체를 추측할 때, 놀란 가슴을 추스른 스텝이 피터에게 ‘오디션이 아니라 알코올 중독 치료소에 가야겠군요’라는 말로 그를 쫓아냈다.
「고맙군.」
「더 소란 피우면 당신도 아웃이에요.」
「그런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길.」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는 것뿐인데도, 청년의 모습에선 우아한 절제미가 엿보였다.
스텝은 떨떠름한 눈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주정뱅이도 오디션장에 안 어울리지만, 유럽의 귀족처럼 보이는 청년도 딱히 어울리는 건 아니었다······.
***
스텝이 소란을 정리하고 사라진 후.
‘놀래라.’
금발의 젊은 청년으로 변신한 태화는 여유로운 표정이 깨지지 않도록 노력했다.
다리 좀 피해달라고 했더니 갑자기 공격을 당하지 않나.
그걸 보면서도 돕는 이가 하나 없지 않나.
역시 미국은 한국과 다르다는 게 확 와 닿았다.
‘게다가 술 냄새도 엄청나던데. 그런 류의 이야기는 농담인 줄만 알았지 실제로 술을 마시고 오는 참가자가 있을 줄이야······. 그 상태로 왜 온 거지?’
다른 이들과 떨어져 앉은 태화는 가볍게 눈을 감은 채 방금 있던 일을 떠올렸다.
오랫동안 싸우는 거라면 모를까, 한두 번 피하고 반격하는 일은 태화에게 어렵지 않았다.
가장 먼저 위기 대응 능력과 동체 시력이 반응하고 그 이후 순발력과 기타 육체적 재능이 몸에 밴 행동들을 조합해 자연스럽게 움직였으니까.
사실 이런 경험은 처음인지라, 태화도 액션 영화 속 멋진 장면을 연출할 때나 빛나던 재능들이 이리 유용하게 쓰일지 몰랐다.
‘예전엔 피하는 식으로 움직였는데 재능의 종류가 다양해지니까 반격도 되는구나.’
상식의 악의를 마주했던 당시엔 태화에게 ‘위기 대응’ 재능밖에 없었다.
미리 사고나 위험을 감지하고 ‘안전’할 수 있도록 반응하는 능력.
그 후 누군가의 악의로 위험해 빠진 적이 없어 몰랐으나 재능은 그가 발전함에 따라 진화하고 있었다.
「저기······.」
옆에서 부르는 소리에 눈을 감고 있던 태화는 고개를 돌려 다가온 이를 응시했다.
쭉 찢어진 눈, 심할 정도로 툭 튀어나온 매부리코, 거기에 치료하지 않는 듯 우둘투둘한 화상 상처까지.
핼러윈에 만나면 위화감 없을 것 같은 남자, 리처드 그레이였다.
‘······캐트시 보상으로 부동심을 받아서 다행이었네.’
충격적인 외형에 놀랐던 태화는 순식간에 가라앉는 감정을 확인하며 단단해진 정신에 안도했다.
특수 분장한 사람에게 놀라 몸을 움찔거리는 건, 오늘 구상해온 캐릭터와 맞지 않았다.
「아깐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
「괜찮아. 위험한 상황에 다가가지 않으려 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니까.」
태화는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대사처럼 느껴졌다.
외모와 억양, 그리고 성격까지 무엇 하나 본인의 것이 없는 데다가, 때마침 영화 같은 사고까지 겪은 탓에 현실감이 부족했다.
‘오디션전까진 힘을 뺄 걸 그랬나? ······아니야. 어디서 어떻게 말이 샐지 모르니 조심하는 게 좋겠지.’
복도를 지나며 힐끔 봤을 때, 벌써부터 역할에 집중에서 연기에 들어간 참가자들도 몇몇 보였다.
태화 자신만 특이한 게 아니라는 의미다.
그가 피터와 싸우기 전까지 묵묵하게 콘셉트 유지에 집중하던 이들이 많았으니 틀린 생각도 아니었다.
「아깐 굉장히 멋졌어. 아, 난 리처드 그레이야.」
「······노먼 셀러스.」
태화는 접수할 때 사용했던 가명을 떠올리고 나직이 읊었다.
‘속인다’는 행위는 비밀과 의외성이 중요한 요소이기에 메드닐은 오디션장에서 가명을 사용하는 것을 과감하게 허락했다.
계약은 실제 이름으로 해야 하지만, 그 전까진 심사위원들조차 속여 넘겨야 할 대상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덕분에 태화도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본명대신 알 수 없는 외국인 이름으로 서류를 접수할 수 있었다.
「영국인 맞지? 사실 나도 영국 출신이라서. 이민자거든.」
「그렇군.」
「런던에서 왔어. 그 동네는 여전해? 시계탑 옆에 시장에서 파는 샐리 아줌마의 사탕은 참 맛있었는데.」
태화를 영국 출신으로 지레짐작한 리처드는 자신의 추억을 떠들었다.
추억에 젖은 그에겐 미안하지만 태화가 대답하기 힘든 이야기들이었다.
‘이런 부분의 디테일이 필요했던가······. 빌런 역일 땐 다른 배우들과 거리 두는 것이 최고라 생각했는데. 음.’
사회성 부족한 인물처럼 행동해 배우들이 다가오는 것을 최소화 하려 했던 태화는 자신이 간과했던 점을 떠올렸다.
카메라 밖에 나와서도 다른 배우들을 무시하고 다니는 건, 이후 정체가 알려졌을 때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속이려고 그랬다는 걸 알아도 기분 상했단 사실과 별개로 치부하는 사람이 없을 거란 보장도 없으니까. 첫 영화에서 단추를 잘 못 끼울 뻔했네.’
그런 생각을 하며 태화는 리처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실제 영국을 겪어보지 못했으니, 이런 식으로 모이는 정보를 허투루 넘겨선 안 됐다.
「리처드 그레이씨. 들어오세요.」
「아, 내 차례네. 난 가볼게! 너도 힘내!」
「행운이 함께 하길.」
힘차게 손을 흔들고 사라지는 리처드에게 태화도 가볍게 손을 흔들어줬다.
경쟁자를 대한다기엔 상당히 여유 있는 모습이었던지라, 힐끔거리고 있던 이들은 태화의 행동에 작은 목소리로 쑥덕거렸다.
「정말 여기가 빌런 역 오디션장인 걸 알고 찾아온 건가?」
「건물 다른 곳에서도 오디션이 열리고 있으니까······. 잘못 온 거 아닐까?」
오늘 메드닐의 영화와 관련된 오디션은 다른 배역보다 일찍 열린 ‘메인 빌런’역 하나뿐이다.
그러나 수많은 프로듀서와 감독, 작가를 소유한 나인테일이 일 년에 고작 한 가지 영화만을 만들 리 없었고 다른 장르의 오디션도 다른 층, 다른 방에서 활발하게 진행되는 중이었다.
때문에 참가자들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태화가 장소를 착각했다고 여겼다.
「저게 지금 연기하는 모습일지도 모르잖아.」
「설마. 돼지가 립스틱 발라봐야 돼지지. 저건 진짜야.」
누군가 자신들처럼 분장한 게 아니냐는 의견을 제시했으나 비웃음만 샀을 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