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183
저런 건 흉내의 영역이 아닌 태어나면서부터 몸에 배는 것이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노먼 셀러스씨. 들어오세요.」
사람들이 갑을논박 하는 사이, 태화의 가명이 불렸다.
태화는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잠시 힐끔거리고 당당한 걸음걸이로 스텝을 따라나섰다.
가벼우면서도 역으로 무게감 있는 그의 모습에 다들 그가 동방에서 온 한국 출신 동양인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끝
ⓒ 마늘소금
태화가 방안에 들어서자 다섯 명의 사람이 테이블 앞에 앉아 그를 맞이했다.
메드닐과 나인테일의 관계자들이었다.
「이름 옆에 가명이라 적혀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나?」
가명을 쓴 이들은 태화 말고도 많았다.
그러나 대부분 도끼 살인마, 펌킨 헤드처럼 누가 봐도 별명 같은 이름들이었지 ‘노먼 셀리스’와 같이 싱거운 이름은 그 하나뿐이었다.
「그 부분은 5분이 지나고 마지막 5분이 남았을 때 알려드리겠습니다.」
태화는 본명을 말하는 대신 침착한 태도로 주제를 돌렸다.
오디션은 모든 참가자에게 공정한 시간, 정확히 10분을 제공했다.
그는 그 시간 동안 심사위원들이 자신이 동양인임을 모르도록 ‘노먼 셀리스’를 연기할 생각이었다.
「발음이 상당히 매력적이군요. 원래 발음이 아니라면 많이 노력했겠어요.」
무심하게 건네진 칭찬에는 ‘그게 연기일 리 없지’라는 강한 확신이 서려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태화는 모른 척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오해가 커질수록 다가올 반전이 크게 느껴진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자유연기로 구상해온 캐릭터를 보여주게.」
이번 영화는 어떤 의미로 히어로보다 빌런이 중요했다.
영화의 가장 큰 반전 중 하나로 작용할 장치이니 당연했다.
그런 만큼 제작사와 감독도 섣불리 역할의 특징이나 성격을 단정 짓지 않았으며 분위기 별로 여러 ‘구상안’만 어렴풋이 잡아뒀다.
메인 빌런 역의 오디션이 다른 역할들보다 한발 앞서 이뤄진 이유였다.
「히어로들은 진보할 줄 모르는군.」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태화는 작성해 온 대사를 읊었다.
보안상 플롯이 제공된 건 아니나, 메드닐은 연기하기 좋은 상황을 4가지 제시했다.
그중 태화가 선택한 부분은 빌런이 히어로를 쓰러트리고 비웃는 상황으로, 일반적으로 주인공의 각성 계기를 마련하는 장면이었다.
빌런이 돋보이기 때문에 태화뿐 아니라 많은 참가자가 선택한 선택지이기도 했다.
‘연기를 못하는 건 아닌데 심심하군.’
‘일반 히어로 영화였다면 뽑았을 텐데 아쉬워.’
‘저 얼굴이나 말투는 먹힐 것 같은데······. 차라리 히어로 역을 제의해볼까.’
‘용인 발음을 정확히 구사하는 영국인이라. 좋은 소재이긴 한데······.’
태화의 연기를 보면서 심사위원들의 표정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발성이나 표정 연기, 그리고 발음까지 뭐 하나 부족한 부분 없이 완벽하다.
언뜻 들으면 최고의 찬사.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성격이 변한 것처럼 격렬하게 행동하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사악한 느낌을 마구 풍기는 사이코적인 이중성을 보인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들의 눈에 태화의 연기는 반전성 같은 건 없는, 그냥 우아하고 잘생긴 악역이었다.
「잘 봤습니다. 인물 조형 실력이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닌가 봅니다?」
「저 스스로는 만족하고 있습니다.」
「아―, 그래요······.」
다른 배우들처럼 태화 또한 처음부터 연기를 진행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이들은 짜게 식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자신에게 관대한 배우는 잘못된 곳을 고칠 줄 모른다.
그들이 볼 때 태화는 실력은 어느 정도 있으나 자신에 대한 확신이 너무 커서 그 이상 나아가지 못할 인물이었다.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난 오늘 오디션에서 배우들에게 단 한 가지를 원했지. 바로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를 말이야. 셀리스, 당신은 그 부분에 대해 본인이 얼마나 잘 인지했다고 평가하지?」
가운데 앉아 있던 메드닐이 묘한 미소로 태화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의 생각도 다른 심사위원들과 비슷했다.
카메라에서 반짝일 것 같지만 자신이 찾는 모양과는 조금 다른 배우.
다른 작품이라면 모를까, 그가 볼 때 태화는 이번 영화에서 딱히 필요할 것 같지 않았다.
「이제 정확히 5분 지났으니, 지금부터 다른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호오? 해보도록 해.」
허락이 떨어지자 태화는 가져온 가방을 처음 앉았던 의자에 올렸다.
그리고 먼저 자신의 머리 위에 올라가 있던 금빛 가발을 벗었다.
「······금발이 아니었군.」
「뭐, 수요가 있어 금발을 고수하는 친구들도 많으니 특이하다고 까진······.」
흔히 서양인에 대해 말할 때 금발에 파란 눈이라 설명하지만 실제 노란색에 가까운 금발과 바다를 닮은 벽안을 지닌 이들은 드물었다.
앞에 앉아 있는 네 명의 백인 심사 위원들도 채도가 약간 다를 뿐 전원 갈색 머리였으니 멀리 가서 확인할 것도 없었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너무나 잘 어울렸던 머리가 가발이었다는 사실에,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잠시 소란이 일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착각을 합리화하는 사이, 렌즈를 뺀 태화는 나래가 알려준 순서로 클렌징 티슈를 문질렀다.
이틀 전 지우는 순서에 관해 설명할 때 그녀는 ‘이게 아니라 아이 리무버랑 립 리무버, 딥클까지 제대로 해야 하는데!’라는 푸념을 내뱉었다.
그러나 익숙하지 않은 이가 시간제한이 있는 상태에서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챙기는 일이 힘들다는 것을 알고, 나래는 티슈로 어디를, 어떻게 지우면 될지 차근차근 알려줬다.
검은색, 갈색, 붉은색으로 클렌징 티슈가 물들 때마다 태화의 얼굴을 감싸던 서구적인 분위기도 점차 모습을 감췄다.
티슈에 아무것도 묻지 않은 것을 확인한 태화는 거울로 남은 자국은 없는지 확인했다.
「······.」
마침내 그가 몸을 돌렸을 때.
드러난 태화의 얼굴을 보고 사람들은 침묵했다.
「안녕하세요, 다시 한번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태화는 머리를 고정한 가발망을 벗고 눌려있던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자연스럽게 흔들리는 머리카락은 빛 아래서 하얀색을 반사할 정도로 까맸다.
「한국에서 온 이태화라 합니다.」
확인 사살하듯 따라붙은 자기소개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이들이 탄식을 흘렸다.
「······오, 신이시여······.」
「······내가 잠시 졸았나.」
「말도 안 돼. 이게 뭐야! 누구야! 이런 몰카(Prank)를 계획한 거!」
자연스럽게 신을 찾는 이는 얌전한 편에 속했다.
이것이 몰래카메라라 여기고 참가자를 녹화하고 있는 카메라를 의심스럽게 쳐다보며 화내는 심사위원도 있었으며 눈을 비비며 자신의 얼굴을 때려보는 이도 있었다.
「······망할, 처음부터 속고 있었군. 게다가 미국식 발음도 할 줄 몰라서 안 했던 게 아니라······. 하하, 완전히 속았어!」
깜빡 속은 메드닐도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과 달리 그의 얼굴에는 허탈함보다 기묘한 기쁨이 더 크게 서려 있었다.
심사위원 중 그 누구도 태화가 동양인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너무나 당연히 영국인일 것이라 생각했다.
‘인물 조형에 실력이 없긴. 이 정도면 자신할 만해.’
메드닐은 다른 이들보다 관찰력이 뛰어났다.
누군가와 대화할 때도 그 사람의 습관이나 눈을 깜빡이는 횟수, 심지어 숨소리의 변화까지 빠르게 감지했다.
태화의 연기가 어색했다면 바로 알아차렸을 거란 의미다.
그러나 태화의 행동은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원래 저런 성격이구나’ 싶을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힘이 들어간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심사위원들 앞에 선 참가자들이 전부 그러했으니 그것을 이상하다 느끼지 못했다.
「이렇게 보면 동양인으로밖에 안 보이는데, 정말 대단하군 대단해.」
몇 분 전만 해도 태화의 반짝임이 자신과 맞지 않아 아쉬워했던 메드닐은 언제 그랬냐는 표정으로 열렬하게 태화를 바라봤다.
변화의 스펙트럼이 엄청난 배우를 보자 작품을 어떤 식으로 진행할지 영감이 샘솟은 것이다.
「무명인 것 같지 않고······. 필모그래피를 확인할 수 있을까.」
호의적으로 돌아선 메드닐은 손을 내밀어 태화를 재촉했다.
이 정도 배우가 한국에서 이름조차 알리지 못했다면 한국의 감독들은 다 눈을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거라 생각하며 말이다.
스텝 중 하나가 10분이 거의 끝났음을 알렸는데도, 그는 휴식 핑계를 대라 말하며 억지를 부렸다.
곤란한 스텝이 다른 심사위원들에게 시선으로 도움을 청했으나, 그들도 태화의 다른 변신이 궁금했던 터라 조용히 그를 외면했다.
태화는 태블릿을 꺼내 혹시나 하고 준비해온 영상을 재생시켰다.
현규가 팬들의 도움을 받아 제작한 것으로 그야말로 태화의 팬의, 팬에 의한, 팬을 위한 영상이었다.
루이의 영어 대사가 완벽한 스코티쉬 발음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그 부분까지 추가된 완성본.
배역의 다채로움과 영어뿐 아니라 중국어와 일본어로도 감정을 담아 연기하는 것을 보며 심사위원들은 할 말을 잃었다.
「······기술자들은 언젠가 미디어를 통해 ‘이상적인 배우’를 만들 수 있을 거라 말했지. 하지만 사실 그건 필요 없는 이야기야. 인간은 언제나 과학보다 한발 앞서 한계를 뛰어넘으니까.」
영상이 끝나고 메드닐은 그런 감상을 남겼다.
누군가는 과하다 말할지 모를 극찬이었으나 태화의 연기를 확인한 그는 오히려 그런 표현조차 부족하다 느꼈다.
역할에 맞춰 외모, 분위기, 말투, 습관까지 전부 바꾸는 배우를 설명하기엔, 정말로 부족한 표현이었다.
「오늘 괜찮은 원석과 보석을 많이 찾아낸 것 같아 기분이 좋아. 잘 부탁하지. 촬영 동안 남은 이들을 멋지게 속여보자고.」
자리에서 일어난 감독은 태화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합격이란 말을 전했다.
아직 많은 참가자가 남았어도 이 이상 자신을 흥분시킬 배우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재빠르게 결정을 내린 것이다.
감독의 변덕에, 다른 심사위원들은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아무리 대단한 괴물을 연기하는 이가 나타나더라도 완전히 다른 인물을 연기해낸 태화만 할까.
화장 전후의 임팩트가 너무 컸기에 그들은 메드닐이 경솔하다 느끼면서도 그 결정을 받아들였다.
「주디. 이 친구 좀 부탁해. 저 여자 스텝을 따라가면 돼. 그럼 4달 후에 보지.」
태화의 어깨를 친근하게 두드린 그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전화번호를 교환하자며 태화의 번호를 물었다.
그러나 213, 하다못해 +01로 시작하는 번호도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울해 하며 그의 한국 번호와 소속사 번호를 받아갔다.
***
진하게 선탠된 차량에서 대기 중이던 현규와 나래가 다시 가발을 착용하고 나온 태화를 반겼다.
화장을 지운 탓에 염색한 것 같은 느낌이 없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밝은 머리카락 색은 태화에게 더없이 잘 어울렸다.
“결과는 언제쯤 나온대?”
“아, 합격했어요. 내일 계약서를 작성하자네요.”
눈썹 화장을 위해 얼굴을 나래에게 내민 채, 태화는 경과를 알렸다.
긴장한 시선으로 응시하던 현규도, 선크림까지 잘 바른 태화를 흐뭇하게 보던 나래도 합격 사실을 듣고 제 일처럼 기뻐했다.
“일단 BGA에 알려야겠네. 계약서도 비자 문제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니까.”
비자 문제로 촬영이 취소되거나 불발로 끝나는 사태는 의외로 많았다.
특히 미국의 경우 외국인의 자국 내 활동을 엄격히 관리하는지라 미리 일정을 짰다가 낭패를 보는 일이 잦았다.
“그 부분도 생각해야겠죠. 그런데 누나, 눈썹은 정말 이 색을 유지하는 게 나을까요?”
“일단 역할보고 결정할 거긴 한데, 혹시나 얼굴이 드러나야 하면 밝은색으로 두는 게 바꾸는데 쉬워.”
나래는 금색을 검은색으로 칠하는 건 쉬워도 반대는 어렵다며, 일단은 이 색을 유지하자고 제안했다.
역할이 완전히 나온 다음 결정해도 늦지 않는다는 게 그녀의 주장이었다.
“태화야. 아직 체류 기간도 남았겠다, 할리우드 관광할래? 미국에서만 개봉하는 B급 영화만 주로 상영하는 영화관도 있대.”
힘낸 배우를 위해 현규는 태화가 좋아할 만한 내용을 꺼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래의 얼굴이 잠시 하얗게 질렸으나 이내 돌봄이 역할은 자신의 몫이 아님을 깨닫고 평정을 되찾았다.
“그거······. 좋네요. 고마워요, 형.”
“뭘. 내 역할인데. 저녁엔 찾으러 갈 거니까 끝나면 연락하고.”
“네.”
현규가 고생할 것이란 나래의 예상과 달리 태화는 영화나 볼 일이 끝나면 얌전히 현규를 불렀다.
고생하지 않는 그를 보며 나래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복잡한 기분에 휩싸였다.
끝
ⓒ 마늘소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