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184
한국으로 돌아온 태화는 신상아와 약속했던 영화 출연을 위해 연습에 매진했다.
이미 크랭크인하여 한창 촬영 중인 영화에 완벽한 모습으로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태화가 대본을 봤을 때만 해도 일정이 잡히지 않아 입장이 불가능하던 대본은, 그가 계약하고 새로운 대본이 도착했을 때 실행이 가능하도록 변했다.
바로 다음 날, ‘구미호’ 이후 중국에서도 먹히는 배우가 된 신상아가 주연으로 참여한다는 기사가 온갖 포탈에 올라간 덕이다.
신상아는 본인이 주연으로 참여하는 영화가 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친한 투자자들에게 자신을 못 믿냐며 헛바람을 불어넣었고, 사비와 노력을 들여 태화를 카메오로 영입했다.
그가 미국에 가기 위해 준비하는 동안에는 태화가 자신과 친하기에 카메오로 출연할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투자자들 사이에 두루뭉술하게 흘렸다.
BGA에서 정식으로 발표하지 않아 기사화되지 않은, 아는 사람만 아는 ‘소문’.
그러나 그 대상이 이태화라면 무게감이 달랐다.
현재 아시아급 스타로 발돋움한 그는 언제나 손익 분기점을 넘어 투자자들에게 적지 않은 수익을 안겨 주는 존재였으니 말이다.
[정식이 아닌 카메오일지라도 이태화가 자신의 완벽한 커리어에 흠집이 날만 한 작품을 받아들이진 않았을 것이다.]그런 기대감이 영화 투자자들 사이를 감돌면서,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렸네. 이번에야말로 망하겠군’이란 시선으로 김봉춘 감독과 그의 작품을 보던 이들의 눈빛이 ‘혹시나’로 변했다.
영화가 성공할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생기자 수분 빠진 눈가루처럼 뭉쳐지지 않던 자금들도 탄력을 받아 일정 규모를 갖췄다.
독립 영화 수준을 넘어 ‘상업 영화’라 말해도 될 수준의 자금이 모였고, 운이 운을 몰고 오듯 배급사도 구해져 올 7월에 승부수를 띄울 수 있게 됐다.
제목은 ‘법의 경계’.
감독인 김춘봉이 가제였던 ‘정의로운 생활’을 못내 아쉬워했으나 배급사와 투자자의 강력한 요청에 힘입어 바뀐 최종 제목이었다.
[동기화 134%를 달성했습니다] [선택적 보상이 주어집니다] [+목록] [추가 달성 보상······.]‘법의 경계’가 점차 궤도에 올라 이젠 올여름에 승부를 볼 상업 영화라고 당당하게 말하게 될 수 있게 된 것처럼, 태화도 수정된 대본을 만족스럽게 연습했다.
새로 받은 대본에 그의 요청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었던 것.
한서가 흑막처럼 묘사되었던 사건은 다른 줄을 잡은 라이벌 검사가 임승지를 좌천시키기 위해 짠 함정으로.
승지를 돕는 이유 또한 장인어른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매력을 뽐낼 겸 상대가 엿 먹고 분해하는 꼴을 보고 싶어서’로 변경됐다.
오한서가 중요한 위치에 선 인물이긴 하나 그의 서사가 중요한 것은 아니기에, 또한 태화가 흥행을 위해 절대 놓쳐선 안 될 대형 배우라는 사실 등이 겹쳐져 만들어진 변화요, 속도였다.
단지 안타까운 사실은, 태화의 즐거움이 오래가지 못했다는 점이다.
‘흠, 오늘도 똑같네.’
축복을 실행할 수 있을 정도의 길이라 할지라도 역할 자체가 어렵거나 긴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여러 역할로 단련된 태화는 두어 번의 시도만으로 동기화 100퍼센트를 넘기며 추가 보상을 띄웠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선택지가 단 하나라니. 이거 좀 작위적이지 않나?’
평소 선택적 보상, 즉 재능은 어려움 난이도를 완료할 경우 4가지의 선택지가 주어졌다.
그리고 클리어할 때마다 보상이 약간씩 변했다.
음악이면 음악, 미술이면 미술 등 비슷한 계열에서 조금씩 변하는 정도였으나 그래도 약간의 변동과 선택지가 있었다는 게 중요했다.
[신성(임시)] [신성(임시)] [신성(임시)] [신성(임시)]특히 지금처럼 강요만 가득 찼을 때, 그는 그 ‘한정된 선택의 자유’가 절실했다.
“도대체 왜 계속 이것만 나오는 거······. 어?”
태화가 답답한 마음에 푸념 어린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기둥 위로 글자들이 떠올랐다.
구슬 조각을 모두 모을 시 입장하는 곳은 인간의 몸으로 견딜 수가 없다, 따라서 재능이 강제로 고정된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으며 태화는 지금껏 묻지 않았던 자신의 행동에 머쓱함을 느꼈다.
‘물어볼 거리가 있었어야지······.’
신들에 관한 내용은 임원 파일의 도움을 받고 있었고 재능들은 직관적인 이름을 한 덕에 고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한동안 혼자 힘으로 잘 해결해 나간 탓에 그는 기둥의 다른 역할을 잊고 있었다.
‘그럼 이 단일 선택지가 추가 보상 때문에 그렇다는 거지? 그러고 보니 추가 보상도 동기화 정도와 상관없이 고정되어 있었네. 아, 마지막 조각이라 그런가?’
‘거북이가 가지고 있던 검은 구슬 조각’은 그가 모아 온 세 개의 조각과 맞물리는 마지막 파편이었다.
제대로 된 설명이 없어서 그저 모으기만 했는데 기둥의 설명을 보면 어디론가 갈 수 있는 입장권 같은 건가 보다.
차라리 동기화 점수를 두 자리로 맞춰 다른 재능 보상을 띄워 볼까 고민하던 태화는 곧 생각을 지우고 ‘신성(임시)’와 ‘거북이가 가지고 있던 검은 구슬 조각’을 수령했다.
언젠가는 선택해야 한다면, 차라리 지금 고르는 게 나았다.
‘카메오 출연으로 받은 거라 약간 보너스 같은 느낌도 있고.’
물론 역할을 분석하기 위해 고생했던 ‘괴물’이나 색기를 연마해야 했던 ‘구미호’에서 이런 보상을 얻었다면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주어지는 보상은 고작 20분이 될까 말까 한, 조연과 단역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역할이었다.
쉽게 얻어진 보상답게 싸게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편했다.
‘그럼 일단 나가서 확인부터 해볼까······.’
용건을 다 마친 태화는 현실로 돌아와 연습실 한편에 마련해 둔 개인실로 향했다.
조각 난 구슬 조각에 검은 조각을 가까이 하니 조각들이 스스로 움직여 곧 노란색의 온전한 구슬로 변했다.
‘이건 또 무슨······.’
하나가 된 구슬을 태화는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추가 보상 네 개가 정말 어떤 반전도 없이 구슬이 돼 버린 게.
그것도 몽환초 환만큼의 존재감조차 없는 문구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슬로 변한 게 당황스러워서다.
‘제단에 들고 가면 뭔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지도 몰······.’
태화는 미리 실망하는 것은 이르다고 본인을 다독이며 구슬을 집어 들었다.
축복으로 들어가 구슬의 용도를 확인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가 대본을 읽기도 전, 푸르고 반투명한 창이 나타나 태화를 반겼다.
[신성이 존재합니다. 사신(四神)의 시련장으로 이동 가능합니다. 이동하시겠습니까?]태화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글귀와 함께.
***
태화에게는 Ⅲ단계에 이른 재능이 다섯 개가 있었다.
딕션, 시선 처리, 눈빛, 발성, 그리고 무대장악.
전부 그가 축복을 얻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재능이었으며 그중 ‘무대 장악’만이 99퍼센트에 다다라 ‘깨달음’이란 모호한 벽을 마주했다.
‘그런데 그 깨달음을 해결해 줄 방법이라고?’
재빨리 대본을 클리어하고 제단에 도착한 태화는 기둥이 알려 주는 정보를 바탕으로 구슬의 능력을 유추했다.
숙련도 99에 도달해 마지막 벽을 앞둔 재능을 일깨워 줄 장소에 입장할 수 있는 일회용 초대권.
간단하지만 간단하지 않은 내용에, 현실로 돌아와 구슬을 바라보는 태화의 시선이 흔들렸다.
록셀을 만나 ‘벽 너머의 경지’에 대해 어렴풋이 알게 된 태화는 연습하면 연습할수록 벽의 높이를 실감했다.
한 걸음 다가서면 두 걸음 멀어지는 벽의 모습에 애가 타기도 했다.
그러나 그 거대한 벽이 고작 이 작은 구슬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는 게, 놀랍고 복잡한 심경이 들었다.
‘게다가 일회용이긴 해도 한 번에 하나의 재능만 되는 게 아니라······. 이거 잘 쓰면 사기 템이네.’
깨달음이라는 것은 진정한 ‘거장’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마지막 조각.
태화가 본인의 경험과 명상, 록셀과의 대화로 이해한 깨달음의 정의였다.
‘시련장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무언가 뒤에 있다는 거 같은데······. 그렇다 치더라도 사기지.’
한 가지에 평생을 바쳐도 도달하지 못하는 이가 대부분인 거대한 벽을 쉽게 넘을 수 있다는 건, 그것도 Ⅲ단계 99퍼센트에 도달한 모든 재능을 함께 넘길 수 있다는 건 어떤 조건이 뒤에 붙더라도 엄청난 장점이다.
갑자기 제 가치를 불린 구슬을, 태화는 다시 상자에 담아 깊숙한 곳에 넣었다.
Ⅲ단계에 이른 재능들은 그 숙련도가 참으로 느리게 올랐다.
현재 가장 낮은 ‘딕션’의 경우 33퍼센트를 간신히 채웠으니 한두 달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니 사용하더라도 조금 나중에 사용하는 편이 나아.’
서두를 필요가 없다.
그리 결론지은 태화는 훗날의 쓰나미를 위해 현재의 파도를 넘겼다.
***
“아무리 그래도 촬영 전까지 얼굴 한 번 안 내밀 줄은 몰랐네요.”
촬영 날이 되어서야 ‘법의 경계’ 촬영 현장에 나타난 태화를 보고 신상아는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
물론 정말 서운해서라기보다 단순히 ‘친한 척’의 일환이었다.
“저도 일로 바빠서요.”
그것을 알기에 태화는 무심한 목소리로 건성건성 답했다.
스케줄도 안 잡히던 영화를 여기까지 올려놓은 저력은 대단하다 생각했지만, 상아에 대한 감상은 그게 전부였다.
그는 티켓으로 만족스러운 여행을 보냈고, 그녀는 그가 카메오로 출연한다는 사실을 작품 내외로 잘 써먹었으니까.
“뭐야, 작품 정했어요? 기사 난 거 못 봤는데? 일단 카메오라도 7월 영화에 나오는 거니까, 작품 고를 때 조심해 줘요.”
“그 정돈 알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그나저나 촬영은 잘하고 있어요?”
“와, 내가 후배한테 그런 질문 받을 정도로 발연기는 아니거든요? ······뭐예요? 그 시선은.”
모호한 표정으로 응시하는 태화를 보고 상아는 발끈했다.
그에 비하면 연기 폭이 좁긴 해도 그녀도 나름 한류 스타 소리 들으며 잘나가는 여배우였다.
연기력을 의심받을 수준은 결코 아니라는 의미다.
‘그 공로의 많은 부분을 저 후배가 차지한다는 건 맞지만······.’
‘구미호’의 서아영으로 확 뜨지 않았다면 신인들에 의해 점점 좁아지는 입지에 전전긍긍하며 역할을 찾고 있었으리라.
신상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런 태화의 연기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하여 후배에게 사근사근해질 성격은 절대 아니었지만 말이다.
“신상아 배우님, 이태화 배우님. 준비 다 됐습니다.”
스텝중 하나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둘에게 다가와 촬영의 시작을 알렸다.
이미 엑스트라와 조연들은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준비를 마친 후였다.
“그럼 잘 부탁합니다.”
“잘해야 해요? 날 코피 터지게 했던 그때처럼 뭔가를 보이라고요.”
“네, 네.”
상아의 새된 반응에 성의 없이 끄덕인 그는 걸치고 있던 외투를 벗었다.
고급스럽고 세련된 양복이 드러나자, 안 그래도 태화를 힐끔거리던 시선이 배로 늘었다.
시선 강탈을 바랐으나 주연인 자신에게 올 시선까지 빼앗아 가는 태화를, 상아는 애증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끝
ⓒ 마늘소금
대사와 사건의 내막은 수정되었지만 태화가 보일 행동은 거의 동일했다.
찾아온 인혜와 카페에서 만나, 그녀를 데리고 현장에 가서, 은사파 아가씨를 미인계로 꾀어 정문을 뚫은 뒤, 마약 장면을 포착하여 임승지의 임무를 성공으로 이끌고, 인혜에게 약간의 설교를 한 뒤 사라진다.
한서가 등장하는 대부분의 장면은 카페, 차 안, 클럽 등 실내로 구성되어 있어 시간과 날씨의 제약 없이 스튜디오 촬영이 가능했다.
그러나 외모를 이용해 표적에게 다가가고 정문으로 들어가는 부분과 일이 전부 해결된 후 인혜에게 무어라 말하는 장면만큼은 길거리 촬영이 필수였고, 때문에 그를 위해 봉춘 감독은 수많은 엑스트라를 고용하고 그럴듯한 현장을 수배했다.
한 장면을 위해 사용하기엔 큰돈이었지만 그는 볼거리에는 확실히 돈을 써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이태화’라는 대형 카메오가 모른 척 ‘조연’으로 참여해 주고 있는 상황.
작은 에피소드라고 조잡하게 처리했다간 1등급 한우 토시살로 국 끓였다는 소리 듣기 딱 좋았다.
“차에서 내리는 장면부터 갑니다!”
감독의 지시가 떨어지자 슬레이트를 든 스텝이 메인 카메라 앞에서 ‘이십삼에 하나!’라 소리쳤다.
‘딱!’ 소리가 현장을 울리고, 조수석에 타고 있던 태화가 문을 열고 아스팔트에 발을 내디뎠다.
바깥 카메라가 잡은 그의 얼굴엔 나른한 여유가 넘쳤다.
“넌 이거 받고.”
대본에 따라 작은 기계를 상아에게 던진 태화는 ‘이거 보고 찾아와’라는 대사를 마치곤, 윙크와 함께 손가락을 총 모양으로 접어 장난스럽게 쏘는 흉내를 냈다.
라이벌의 계획을 망가트리겠단 사심으로 현장에 참여하고, 그 작전 현장에 함부로 아는 변호사 후배를 데려오는 인간에게 퍽 잘 어울리는 가벼운 행동.
그러나 너무 갑작스러운 애드리브였기 때문일까. 태화를 찍고 있던 카메라 앵글이 갑자기 흔들렸다.
운전석 뒤쪽 문을 열고 태화를 촬영 중이던 이가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 채 몸을 앞으로 숙인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