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189
「브라이언, 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솔직히 이건 이상한 일이라고. 왜 굳이 걔여야 했는데?」
「걔가 아니어도 괜찮지. 근데 돼서 나쁜 것도 없잖아. 발음에 억양이 좀 있긴 해도 알아듣는 덴 문제가 없고, 연기라는 티도 안 나고. 연기만 보면 너보다 잘하던데? 투덜거릴 시간 있으면 너나 좀 더 연습해.」
쉬는 시간 전, 캠퍼스 장면을 촬영하며 태화도 제이 리로 연기를 펼쳤다.
갑자기 들이닥친 요원들 때문에 허둥대는 모습과 그렇게 끌려와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음에도 순간 냉철하게 궤도를 계산하는 모습 등.
그의 연기는 그야말로 ‘평소 덤벙거리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을 주는 천재 학자 제이 리’였으며, 브라이언은 그런 태화의 연기에 만족했다.
험담을 터뜨리다 본전도 못 찾은 제임스는 얼굴을 붉힌 채 자리를 벗어났다.
밀라는 그 의외의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제임스가 오늘 만난 태화의 험담을 하는 이유도 궁금했으나 브라이언이 남을 감싸는 것도 처음 봤기 때문이다.
‘뭐지? 마음에 들었나? 아니면 천재들은 말하지 않고 본질을 몰라도 통하는 구석이 있나?’
유일하게 태화의 정체를 알기 때문에 방관자가 될 수 있는 상황에 그녀는 감사했다.
그리고 이 재미있는 상황에 팝콘이 없다는 것을 아쉬워했다.
빌런들끼리 모이는 장면, 천갈궁이 제이 리의 모습으로 나오는 장면은 히어로들이 참여하지 않은 날 따로 촬영됐다.
물론 건물을 봉쇄하고 촬영하는 것은 아니기에 몰래 들어와 엿본다면 천갈궁의 정체를 알 수도 있다.
그러나 히어로 사이에 숨어 있는 빌런을 찾는 일은, 현장의 긴장감을 주기 위한 재미 반, 추리력과 눈치 반으로 진행되는 게임이었다.
반칙을 쓰면서 맞춰 봐야 고작 천 달러. 그러다 걸릴 경우 잃게 될 무형적 가치는 상정 불가.
누가 봐도 소탐대실 그 자체인지라, 히어로 측 배우들은 규칙을 준수하는 쪽을 택했다.
「후우- 오늘은 자세가 바르네? 키가 커 보여.」
진한 녹색 피부에 채도 높은 붉은 머리카락, 볼에는 천칭자리를 상징하는 기호를 문신으로 새긴 여성이 태화를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천칭궁(Libra)으로 분장한 밀라였다.
「고마워. 너도 잘 어울리네.」
「뭐야, 가볍게도 말할 수 있잖아? 너 진짜 재밌다니까.」
매끄러운 발음으로 말을 받는 태화를 보고 밀라는 작게 키득거렸다.
그녀는 며칠 전부터 태화의 발음이 이상하다 투덜거리는 제임스에게 이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태화의 모습이 전부 연기라는 걸 알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과연 공정한 규칙 속에서 그들이 태화의 정체, 하다못해 이 작은 거짓말을 알아차릴 수 있을지 밀라는 기대됐다.
「방 한번 끝내주네. 오늘 첫 등장이랑 마지막 장면을 같이 찍는 거지?」
「응. 어차피 두 번 나오고 끝인 장소이니 함께 촬영한다고 들었어.」
영화가 진행되는 중에 주인공 하퍼의 방은 몇 번 조명되나 다른 히어로들의 개인실과 집은 공개되지 않는다.
천갈궁과 천칭궁이 첫 대화를 나누는 장소가 바로 제이 리의 방이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엔딩까지 천갈궁의 정체는 관객들도 알지 못하게 진행됐다.
상영 내내 ‘도대체 누가 천갈궁일까’ 고민하게 해, 내용에 집중하도록 만드는 장치였다.
‘천갈궁이 히어로들 사이에 침입했다는 걸 알리는 대사가 첫 전투에서 나오던가?’
죽은 거해궁과 친하게 지내던 백양궁(Aries)은 하퍼에게 복수하기 위해 마갈궁(Capricornus)과 함께 SFD의 본진으로 달려갔지만 와장창 깨진다.
힘만 세고 머리 나쁜 3인방답게 ‘돌격! 부순다!’만 외치다 역으로 당한 것이다.
그렇게 히어로들의 기지에 속아 사로잡힐 뻔한 그들을 구하는 건 제이의 ‘실수’였다.
‘뭐, 진짜 실수는 아니겠지만.’
위기 상황에서 냉정하게 판단할 줄 아는 캐릭터가 그 순간에만 패닉에 빠져 실수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아무리 그것이 직접 겪는 첫 번째 실전이었어도 말이다.
‘천갈궁 입장에선 처음도 아니겠지…….’
모르는 이들이 보면 ‘뭐, 인간이 그럴 수도 있지’라 넘기겠으나, 진실을 아는 이들이 볼 땐 ‘고의’임을 알 수 있는 장면.
딱 봐도 ‘영화 두 번 봐라’라는 제작사의 의지가 느껴져, 태화가 한 번 더 체크해 둔 부분이었다.
아무튼 제이의 실수로 위험한 순간을 넘기고 무사히 도망친 백양궁은 본거지에 도착해 여러 별자리들에게 타박을 듣는다.
12궁 망신은 너희가 다 시킨다는 내용으로 제발 힘이 아니라 지능도 키우라는 설교였다.
그리고 천갈궁과 친한 천칭궁이 멍청하다고 놀릴 때.
-그래! 천갈궁! 그 인간 놈들 사이에 천갈궁이 있었어! 천칭궁!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얼굴을 붉게 물들인 백양궁이 그제야 떠올랐다는 듯 분개하며 관객들을 혼란케 할 대사를 외친다.
그 안에 들은 의미는 배신한 거 아니냐는 의심이여서, 안 그래도 혼나는 중이던 그는 다른 성좌들에게 배로 힐난을 듣는다.
협조의 정도는 다를 수 있어도 황도 12궁은 서로를 배신하지 않는다.
그것은 12궁을 옮아맨 절대 명제였고, 감정보다 이성이 앞설수록 그 규칙은 칼같이 지켜졌다.
‘근데 이 부분은 아무래도 떡밥 같은데……. 역시 2편을 생각해서 적어 둔 설정이겠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세트장 준비가 마무리돼 스텝들이 카메라에 비춰질 빛의 세기를 확인하고 있을 때, 구경을 끝내고 돌아온 밀라가 생각에 잠겨 있는 태화에게 물었다.
「2편도 찍지 않을까 하는 생각?」
「푸하, 당연하지. 할리우드 감독들은 누구나 후속편의 여지를 두고 촬영한다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박을 꿈꾸는 법이잖아.」
크리스마스 멜로 영화조차 속편을 꿈꾼다며, 밀라는 힘내라는 말을 덧붙였다.
2편의 제작될 경우 대형 떡밥으로 투척된 천갈궁의 정체가 중요한 키포인트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태화가 맡은 천갈궁은 대체하기도 힘든 배역이니, 나인테일이 그에게 큰돈을 주고 재계약을 원할 것은 분명했다.
「속편 제작은 배우들의 꿈이기도 하지. 시리즈화될수록 몸값이 올라가면 올라갔지, 떨어지진 않거든.」
그녀는 ‘제발 히어로와 관객들을 완벽히 속여 흥행을 이끌어 달라’라는 말을 장난스럽게 중얼거리곤 태화와 함께 세트장으로 향했다.
* * *
컴퓨터 모니터의 불빛이 어두운 방을 희미하게 비춘다.
너무 어두워 자세히 보이지는 않으나 벽에는 별자리 지도, 화려한 스티커, 대학 미식축구 팀의 플래그 등이 붙어 있었고, 책상 옆의 책장에는 흰색 로마 숫자가 적힌 노트들이 순서대로 꽂혀 있었다.
그리고 방을 비추는 유일한 푸른 빛 앞엔 후드를 쓴 남자가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몸집을 보고 남자임을 확신할 수 있었으나, 푹 눌러쓴 후드는 얼굴에 깊은 음영을 만들어 냈기에, 보이는 곳이라곤 턱선이 전부였다.
「안녕, 천갈궁(Scorpio). 오늘도 바쁘네.」
남자 혼자 있던 방에 소리 없이 한 여자가 나타났다.
도도하면서도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여성이었으나, 모니터 불빛에 반사된 그녀의 피부는 인간의 것과 달리 녹색으로 빛났다.
머리카락 또한 흔히 볼 수 없는 선명한 붉은 빛으로, 구불거리는 그것은 살아 있는 생물처럼 출렁거렸다.
「무슨 일이지, 천칭궁(Libra).」
일정한 속도로 들려오던 자판 소리가 멈추고, 남자의 낮고 중후한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딱딱하면서도 음률이 섞인 것이 묘하게 섹시한 음성이었다.
「불 좀 켜고 살지? 누가 음습한 별자리 아니랄까 봐.」
「용건.」
천칭궁은 딱딱하고 단호한 목소리에 입술을 비틀었다.
차가운 얼굴에 서린 불만은 상당히 ‘악역’다운 못된 표정을 만들어 냈다.
「진짜, 성격 나쁘다니까.」
「할 말 없으면 가라. 난 널 상대할 시간이 없어.」
「거해궁(Cancer)이 죽었어.」
「…….」
용건을 물은 뒤 재차 바삐 움직이던 손가락이, 거해궁의 부고 소식을 듣고 드디어 멈췄다.
「……죽었다고?」
「그래. 한 인간이 우리의 동료를 죽였어.」
「안타까운 일이군. 그런데 언제부터 인간들이 우리를 눈치챌 수 있었지?」
드디어 의자를 돌려 천칭궁을 바라본 천갈궁은 의아함을 담아 물었다.
역광이 그의 얼굴을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식사 중이었대.」
「하! 식사. 그 천박한 행동을 100년이 지나도록 고치지 못하더니!」
「그렇게 말하지 마. 동료잖아.」
「우리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인간은 지구의 지배종. 집주인을 잡아먹는 행위는 무슨 말로도 정당화할 수 없어.」
그는 인간 우호적인 발언을 뱉으며 거해궁을 힐난했다.
경멸이란 감정이 여실히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그래도 이미 죽었어.」
「…….」
「그리고 그는 우리의 형제이자 가족이었지.」
‘Family’라 말하는 천칭궁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녀의 갈색 눈 또한 억눌린 감정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복수해야 해.」
「……대상은?」
반대할 거라 생각했던 천갈궁이 조용히 대상을 물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서로가 어떤 의미인지 알리는 지표였다.
반박 대신 질문을 건넨 그에게 천칭궁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하퍼 가너. 뉴욕에 사는 백수야.」
「한 명에게 당했다고……? SFD의 부대가 아니라?」
천갈궁의 목소리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일반인은 아무리 무장을 하고 있어도 그들을 죽일 수 없었다.
그들은 날 때부터 지배자로 태어난 존재들이었으니까.
「여럿이었으면 도망쳤을걸? 걔가 좀 단순했잖아. 숫자가 하나인 걸 보고 돌진하다 뒈진 거지.」
「하.」
「그리고 착각한 게 있는데, 하퍼는 일반인이 아니야. 에스퍼지. 그것도 각성한 순간 거해궁을 죽일 정도로 강력한.」
그녀의 말에 천갈궁은 의자를 돌려 책장을 응시했다.
그리고 ‘Ⅲ’라 적힌 노트를 꺼내 천칭궁에게 건넸다.
「SFD가 신입을 교육시키는 장소로 의심되는 곳이 적힌 노트다. 이걸 받으러 온 거겠지?」
천갈궁은 하퍼가 SFD와 접촉해 그들과 합류했다는 걸 상정하고 이야기했다.
지금껏 모습을 드러낸 모든 에스퍼가 그러했기에 이뤄진 추측이었다.
「역시 가지고 있었…….」
「사자궁(Leo)에게 전해. 난 따로 움직인다.」
「천갈궁!」
기뻐하던 천칭궁은 그의 갑작스러운 말에 비명을 내질렀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엔 배신감마저 서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