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192
「빌어먹을 운 같으니!」
오늘 전투 도중 몇 번이나 미스 포춘의 ‘운’ 앞에 브레이크가 걸린 천칭궁은 거친 욕설을 뱉으며 결국 무릎을 꿇었다.
배에 구멍이 난 상태로 무리하게 힘을 운용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제길, 에너지 코어만 수리 맡기지 않았어도······! 신입(Rookie)! 마무리 지어!」
천칭궁을 구하기 위해 사자궁이 보낸 작은 크리처들을 팔에 달린 전동 총으로 처리하며 사이캅이 소리쳤다.
아무리 상처 입었다 해도 12궁은 12궁.
반(半) 사이보그로 내장된 무기 화력에 따라 전투력이 변하는 사이캅과 운 이외의 능력치가 그다지 좋지 않은 미스 포춘은 하퍼에게 기회를 만들어 줄 순 있어도 천칭궁을 마무리 지을 능력이 되지 못했다.
천칭궁까지 죽이면 SFD와 하퍼가 처리한 성좌의 수는 총 셋. 상처 입혀 패퇴시킨 수까지 합치면 과반수가 넘어간다.
하퍼가 나타나기 전까지 12궁을 ‘두려운 존재들’이라 여기며 사실상 방관했던 걸 생각하면 상당히 고무적인 결과였다.
하퍼는 손에 에너지를 모았다.
천칭궁을 죽이기엔 충분한 힘.
짙은 패색(敗色)을 읽은 천칭궁의 얼굴엔 분노와 절망이 떠올랐다.
그 순간 하퍼에게 날아온 거대한 냉기가 아니었다면 천칭궁은 그대로 목숨을 잃었으리라.
터져 나간 냉기는 건물과 땅에 달라붙어 몸집을 불렸다.
건물 벽과 창에는 살얼음이 꼈고, 그 위에 있던 크리처들도 냉동 참치처럼 얼어붙었다.
이상을 느낀 사이캅이 화염을 방사하려 했지만, 그가 준비를 마치는 사이 땅을 타고 다가온 얼음들이 그의 발부터 머리를 순식간에 얼렸다.
미스 포춘은 사이캅보다 더 빠르게 얼었다.
그렇게 동료들이 냉동 인간이 되고, 움직이는 이가 하퍼와 천칭궁밖에 남지 않았을 때.
지워졌던 그림이 역(逆)으로 생겨나는 것처럼 푸른 피부에 노란 눈동자, 검은 망토를 두른 한 남자가 나타났다.
「천갈궁!」
바로 백양궁이 SFD의 무리에 섞여 있는 것을 봤다고 언급한 12궁의 멤버, 천갈궁이었다.
「하나를 상대로 셋이라니, 공평하지 않지.」
그는 잘린 천칭궁의 팔을 집어 들어 얼린 후 천칭궁에게 던졌다.
긴박한 전투 중 등장했다 하기엔 상당히 여유 넘치는 행동이었다.
새로운 적에 등장에 당황했던 하퍼는 곧 주인공답게 냉정을 되찾으며 천갈궁을 공격했다.
그러나 천갈궁의 바로 앞까지 도착한 에너지는 그에게 닿지 못한 채 그대로 흩어졌다.
「어리석군. 에너지계 에스퍼가 가장 강력하다 하지만 나에겐 상처 입힐 수 없어.」
그렇게 말한 천갈궁이 하퍼를 향해 손을 뻗자 차가운 서리 기운이 하퍼의 발밑을 향했다.
다른 히어로들과 달리 그는 힘으로 저항하는 데 성공했으나, 곧이어 날아온 얼음송곳 중 하나가 뺨을 스친 이후 머리부터 속절없이 얼어 갔다.
천갈궁은 고요해진 장소에서, 얼음 동상이 돼 버린 하퍼에게 다가갔다.
그가 하퍼의 머리에 손을 대려던 그 순간.
「쿨럭.」
작은 기침 소리가 그의 귀를 강타했다.
천갈궁은 재빨리 몸을 돌려 천칭궁에게 다가갔다.
그는 냉기에조차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차가운 입김을 내뿜는 그녀를 보고, 혀를 차며 자신의 망토를 덮어 줬다.
「멍청하긴. 그러게 누가 혼자 날뛰랬나.」
「네가 와 줬잖아.」
잠시 하퍼가 있는 방향을 곁눈질한 천갈궁이 곧 미련 없다는 태도로 몸을 돌리곤, 천칭궁을 공주님 안듯 안아 올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12궁과의 전투에서 승승장구하던 하퍼가 겪은 첫 패배였다.
***
「와오, 재수 없게 포스 쩐다.」
잠깐의 컷 사이 재빨리 녹색 스크린에서 벗어나 구경꾼으로 돌아선 글로리아가 교체하듯 들어간 태화를 보고 작게 중얼거렸다.
태화의 냉기는 전부 CG로 처리된다.
즉, 기술을 쓰는 본인보다 얼어붙고 당하는 척하는 이들의 리액션이 생생해야 화려해 보이는 기술이었다.
그러나 태화의 얼굴에 나타난 오만한 표정, 예절 수업으로 다져진 절제된 몸놀림, 그리고 그 사이에 서린 여유는 ‘손가락 한 번 튕기고 걸어만 다니는’ 그를 절대자로 보이게 만들었다.
「굉장하군.」
다시 촬영에 들어가기 전 창상(創傷) 분장을 받던 브라이언이 태화에게 감탄을 터뜨렸다.
영화 내에선 유머 있고 신입다운 패기를 드러내지만 사실 브라이언의 원래 성격과 말투는 과묵하고 신랄한 축에 속했다.
바른 소리를 한다기보다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 행동을 보이는 이들을 참지 않았으며 연기에 대한 기준점도 높아 칭찬에 인색했다.
그런 그가, 태화를 보며 탄성을 내뱉었다.
「전에 어떤 영화를 찍었지?」
전작을 물어본다는 건 그 인물에게 관심이 있다는 표현이다.
특히 브라이언처럼 묵묵히 자신의 역할만 하는 이가 보이기엔 상당히 희귀한 반응이었다.
「쉬-. 내 정체는 비밀이라.」
「이런. 본모습과 술을 나누려면 빨리 밝혀내야겠군.」
입술에 검지를 대며 비밀이라 말하는 태화에게 브라이언은 유감을 표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글로리아는 마음에 안 드는 남자와 친해지는 브라이언을 보고 볼을 부풀렸다.
***
어느덧 촬영이 2개월이 지나, 일정도 중반을 향해 가고 있었다.
최근 촬영 스케줄이 조금 느슨해졌는데, 어느 정도 장면이 모인 만큼 CG와 편집을 하는 데 걸리는 늘었기 때문이다.
2시간 반이란 시간이 길어 보여도 원하는 장면을 넣다보면 부족하기 마련이다.
때문에 메드닐은 어떻게 해야 긴장감을 조절해 가며 ‘끊임없는 볼거리’를 제공할 수 있을지 스텝들과 회의를 거듭했다.
물론 메드닐은 ‘비슷한 재능을 지녔으나 아직은 영화 경험이 부족한’ 왕초위 감독보다 노련했다.
그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장면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으며, 회의는 ‘어떤 식으로 그 장면을 구현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뤘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CG에 필요한 배경 영상과 세트를 준비하는 데 시간을 소모했단 의미다.
그렇게 제작진의 손이 바빠진 것과 별개로 실질적인 촬영이 줄어든 배우들은 조금 여유 있는 일정을 소화했다.
당연히 태화도 쉬는 날이 많아졌다.
‘오늘은 가볍게 러니언 캐니언 공원(Runyon Canyon)에서 한 바퀴를 돌고 대본 연습과 발성······. 저녁에는 술 약속······. 논 알코올도 있다니까 괜찮겠지.’
물론 쉬는 날이라 해서 태화가 한가하단 뜻은 아니었다.
촬영이 길어지면서 친해진 배우들과 일주일에 한 번 시간을 보내고 나머지 시간을 개인 연습에 열중하다 보면 시간은 금세 흘렀으니까.
최근엔 록셀에게 배운 파랑새로 그의 포스팅을 확인하는 데 일부 시간을 할애했다.
회귀 전 7월 13일이 바로 록셀의 기일이었기 때문이다.
태화는 자신의 경우처럼 실수가 생기는 일은 있어도 죽는 날이 정해져 있는 만큼, 억제력이 작용해 비행기 사고가 나진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을 비웃듯, 그날 오후 록셀이 손녀와 찍은 사진이 파랑새에 계시됐다.
그 다음 날도, 다음다음 날도 손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그의 모습이 차례차례 올라왔다.
태화는 일일이 하트를 누르며 안도하곤 원하던 오디션에 합격했다는 소식도 슬쩍 댓글에 남겼다.
그렇게 바쁘지만 평화로운 나날을 만끽하는 태화였으나, 그도 처음엔 걱정이 많았다.
할리우드에서 작품을 했던 박현호나 다른 배우들의 말에 따르면 동양인에 대한 차별, 굴러들어 온 돌에 대한 질투, 언어적 장벽, 문화의 차이 등 수많은 문제들에 안팎으로 생긴다고 말한 탓이다.
그러나 은근히 이뤄진다던 동양인에 대한 차별은 느끼기가 힘들었고, 비중이 없는 건 아니라도 주연과 거리가 먼 탓에 그를 굴러들어 온 돌로 여기는 시선은 적었다.
‘천갈궁이라는 걸 감안하면 좀 다르지만······.’
물론 태화가 ‘천갈궁’임을 아는 이들은 한국이란 작은 나라에서 온 동양인이 메인 빌런을 맡았단 사실에 반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태화가 훌륭하게 히어로 측 배우, 특히 브라이언까지 속여 넘기는 걸 보며 모두 그를 인정했다.
미리 알고 있음에도 믿기지 않는 실력과 변화를 보이니,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언어의 장벽은 태화가 스스로 만들고 있는 것이기에 느낄 리가 없었고, 문화의 경우 연기 이외엔 무던한 편인지라 ‘컬처 쇼크’를 느끼지 못했다.
물론 그도 0에 가까운 글로리아의 거리감이 종종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그녀를 질색하는 브라이언을 보고, 태화는 그것은 그냥 글로리아가 특성으로 받아들였다.
‘뭐, 적대하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받으며 살 수는 없는 법이지.’
그런 와중에 태화를 싫어하는 이도 분명 존재했다.
바로 태화가 처음 ‘제이 리’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부터 적의를 드러냈던 제임스 베이커였다.
그가 왜 태화를 싫어하는지는 누구도 몰랐다. 단지 현장 분위기를 해치는 행동인지라 싫어하든 말든 티를 내지 않길 바랐을 뿐이다.
그런 감정은 태화도 비슷했다.
그는 제임스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까진 괜찮았으나, 고의적으로 대사를 멈추거나 주연들이 없는 장면에서 실수하는 행위가 귀찮고 짜증 났다.
언어를 유창하게 할 수 없단 설정을 때려치우고 한 마디 쏘아 주고 싶을 정도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태화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기 전, 먼저 나선 이가 있었다.
태화가 영어를 잘하지 못해서 참고 있다고 생각한 브라이언이었다.
-적당히 좀 하지? 그렇게 인종놀이 하고 싶으면 네가 주연인 작품으로 가.
전체로 보면 빌런과 전투를 펼치는 모든 이들이 ‘주연’이었으나 주인공은 명백하게 브라이언이었고, 현재 이 영화에서 그만큼 많은 출연료와 러닝 개런티를 받는 배우는 없었다.
당연히 발언권과 암묵적인 권한이 가장 컸으며 다들 그런 그를 거스르지 않았다.
계속 깝죽거리며 시비를 걸던 제임스도 브라이언을 거스르진 못했다.
결국 그는 억울함과 적의를 담아 태화를 노려보다가, 패배한 개처럼 꼬리를 말고 사라졌다.
태화의 정체를 감추느라 대놓고 편애하지 못한 메드닐도, 태화의 실력을 알고 있던 빌런 측 배우들도 속이 다 시원해지는 광경이었다.
“태화야, 오늘도 가발 쓰고 갈 거지? 슬슬 더워지는데 괜찮겠어?”
저녁 약속 시간이 한 시간 정도 남았을 때 나래가 태화의 연습실 문을 두드렸다.
현장 외에서 만나는 것이니 제이 리로 화장할 필요는 없었지만, 배우들을 속이고 있는 현재로서는 ‘배우 이태화’의 모습을 온전히 보이는 것도 아니라서, 태화는 언제나 나래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저도 가발 없이 머리를 올리는 쪽이 편하지만······. 되도록 완벽한 게 좋으니까요.”
“옷은 그냥 티셔츠에 청바지? 미국인 다 됐네. 씻고 아래층으로 내려와. 준비하고 있을게.”
“네.”
용건을 마친 나래가 방을 나가자 태화도 서둘러 욕실로 향했다.
끝
ⓒ 마늘소금
술자리에 나온 이들은 많지 않았다.
한국보다 낫다고 해도 배우 업계라는 건 ‘급’에 따라 ‘몸값’이 결정되는 동네였고, 조연만 전전하는 배우들은 적어도 서너 작품을 뛰어야 살인적인 집값과 보험금을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외곽이나 옆 동네로 빠지면 집값이 싸지긴 한다. 그러나 한국이 그러하듯 미국도 직장과 멀어지는 일은 직업 활동에 있어 그리 현명한 선택이 못 됐다.
「어? 메이슨도 안 왔어?」
영어가 조금 는 척, 미묘한 억양으로 캐주얼한 영어를 뱉게 된 태화가 글로리아에게 물었다.
오늘 오기로 했던 배우는 태화까지 총 일곱 명.
빌런 쪽은 백양궁을 맡은 배우 잭 개릿과 천칭궁 역의 밀라.
히어로는 브라이언과 글로리아, 메이슨, 그리고 리처드가 오기로 했었다.
그러나 태화가 왔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이는 고작 네 명이었다.
사정이 생겨 오지 못한다고 연락한 리처드에 이어 메이슨도 불참한 것이다.
「응. 갑자기 조카를 맡게 돼서 못 온대.」
메이슨과 친한 글로리아가 조금 풀이 죽은 목소리로 사정을 설명했다.
하지만 시무룩했던 것도 잠시, 그녀는 메이슨의 몫까지 놀겠다며 기운을 차렸다.
「태하는 한국에서 클럽 자주 갔어? 난 파티 없는 날엔 꼬박꼬박 가는데, 메이슨은 파티 가느니 차라리 클럽에 가라고······.」
그들 중 태화가 가장 친근하다 느낀 것인지 그의 옆에 다가선 글로리아가 높고 여린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메이슨은 자신을 7살 어린애로 본다’, ‘금발이 멍청하다는 건 잘못된 고정관념’, ‘네일 아트가 하고 싶다’ 등등.
그녀 자신과 관련된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들로, 태화는 잘 못 알아들은 척 ‘네, 네’하며 글로리아의 말을 넘겼다.
「죄송하지만 저희 클럽은 21세 이상만 출입 가능합니다.」
「어? 저번엔 그런 제한 없었잖아?」
「손등에 ‘X’를 쳐 놔도 지우는 10대들이 늘어서요. 신분증을 제시해 주세요.」
차례가 되어 바로 들어가려던 찰나, 앞에서 지키고 있던 가드가 일행을 막아섰다.
태화를 응시하고 있는 것이, 다른 이들보다 그의 나이가 걸려 막아섰다는 게 분명히 보였다.
「······다른 데로 가야 하나? 우리 집에서 놀까? 지하에 홈시어터 있는데. 2시까진 술 파니까 근처 마트 가서······.」
「아뇨, 신분증 가져왔어요.」
태화는 그럴 필요 없다며 사회보장번호(Social Security Number)가 나오자마자 신청해 둔 캘리포니아 ID를 꺼냈다.
한국의 주민등록증 비슷한 것으로, 차량이 없는 이들이 자신의 신원을 증명하기 위한 사진이 있는 신분증(Photo ID)이었다.
신분증을 확인한 가드는 얼굴을 일그러트리곤 태화의 생년월일과 이름의 스펠링을 물었다.
그는 태화가 모든 정보를 정확히 말하고서야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얼굴로 그들을 통과시켰다.
「······잠깐, 태하. 27이였어? 나보다 연상이야? 와아, 뭐 이런 얼굴이······.」
「자신감 넘쳐서 막 생일 지난 21살이라 생각했는데······.」
「저기, 뭐 먹고 어떤 스케줄로 생활해? 에스테틱은 어디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