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197
차를 타고 움직이거나 작전 본부에 모여 회의를 할 때 등 관객들이 ‘이런 것까지?’라 싶을 정도로 많은 부분이 CG로 이뤄져 있었다.
때문에 ‘연기를 조금 못해도 영상이 커버해주지 않을까’란 착각하기 쉽지만 현실은 달랐다.
주변이 온통 녹색이고 실제 느껴야 하는 감정과 보이는 모습이 다르니 몰입에 지장이 생기는 것이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B급 영화에서 성공해 대형 영화에 출연하게 된 이들 중 ‘돈이 많이 드는’ 배우가 나타났다.
연기를 못하는 건 아니나 CG 앞에서의 연기력이 떨어져 부득이하게 정교한 세트장을 요하는 배우들로, 촬영이 지연되게 하는 요인 중 하나였다.
장르에 따라 조금씩 달라도 빠지는 곳이 없었기에 CG는 배우들의 진입 장벽을 높이는 하나의 요소로 작용했다.
그런 의미에서 글로리아는 특이한 배우였다.
그렇게 연기를 잘하는 편이 아님에도, 그린 스크린에서의 연기와 일반 연기의 차이가 전혀 없었으니까.
오히려 초능력을 사용하거나 허공을 보고 반응하는 연기는 어색한 부분 없이 자연스러웠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시야가 넓어. 스크린에서 볼 땐 그저 그런 연기를 펼친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까 다르단 말이지.’
처음 봤을 때 브라이언의 연기만 기대한 탓일까, 글로리아의 연기는 보면 볼수록 배울 점이 많았다.
특히 할리우드에 특화된 연기를 펼친다는 게 신선했다.
「······태화는 항상 학생이라도 된 것처럼 열성적이네. 모두에게 배울 게 있다지만 실천하는 사람은 드문데.」
옆에서 쉬고 있던 메이슨이 글로리아를 응시하는 태화를 살짝 질린 눈으로 바라봤다.
촬영 중 자주 봐온 장면인지라 시선의 의미를 파악한 탓이다.
할리우드 스타 중 자기 관리에 철저한 유형도 있었으나 인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약과 도박, 나쁜 친구들로 인해 몰락하는 사례도 많았다.
그러나 눈앞의 배우는 절대 그런 향락에 빠져 사라질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연기하느라 바빠 그런 유혹을 귀찮게 여길 것처럼 보였다.
「이런 본격적인 CG는 중국에서 딱 한 번 겪어봤거든.」
「중국? 중국에서도 찍었었어?」
「거리상 가깝다 보니까 한중이나 한일 합작 영화가 종종 나와.」
「역시 세상은 넓네. 미국은 영국하고나 합작하지 다른 나라하곤 영.」
메이슨은 새로 알게 된 사실에 감탄하며 미국의 경우를 말했다.
이민자의 나라라 불리는 미국은 미국으로 뭉치는 걸 좋아했다.
타국을 배척한다기보다 타국조차 미국의 색으로 물들이는 걸 좋아했다.
그렇다 보니 영화계에서도 영국을 제외한 외국인과 작업하는 일이 드물었다.
해외 시장 때문이면 모를까, 한국계, 중국계, 인도계 등 다양한 출신의 미국인이 있는데 굳이 언어도 문화도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 배우를 데려와 파이를 나눠 줄 필요가 없던 것이다.
「그래서 외국인 배우가 오면 영국인이 아닌 이상 텃세가 좀 있어. 여기야 브라이언이 워낙 그런 걸 싫어하니까 차별주의자들도 닥치고 있지만.」
둘이 미국과 한국의 차이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브라이언과 글로리아의 촬영이 끝났다.
오늘 촬영할 부분이 이제 한 장면만 남았기에 배우들은 조금 밝아진 낯으로 다음 촬영을 준비했다.
***
크랭크업날까지 촬영에 임하는 태화의 동선은 단조로웠다.
일, 연습, 트레이닝을 벗어나지 못하니 당연했다.
「결국 이렇게 천갈궁 찾기는 끝난 건가.」
「아직이야! 아직 홍보에 쓸 5개월이 남았잖아! 그 사이라도 찾아내서 첫 시사회에서 맞추면 되는 거지!」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소리치는 글로리아의 목소리를 들으며 태화는 촬영장에서 있던 일들을 떠올려봤다.
그는 빌런 측 배우들과 스텝의 도움을 받아 훌륭하게 제 임무를 수행했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순간 찾는 것은 불가능해지므로 혹시나 겹치는 동선만 조심하면 문제가 없었다.
물론 위기의 순간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종종 혼란스럽다는 눈으로 자신을 보는 브라이언과 ‘이게 영화가 아닌 만화였으면 제이 리가 범인인데!’라고 농담하는 글로리아의 시선을 다른 용의자들에게 돌리기 위해 그는 여러 방법을 동원해야 했다.
‘가장 황당했던 건 제임스가 날 싫어하는 이유였지······.’
촬영 내내 태화를 적대했던 제임스 베이커.
만일 그가 태화를 싫어했던 이유가 인종차별이었다면, 태화는 연기로 눌러 아무 말 못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임스가 그런 행동을 했던 건 인종차별과 아무 관련 없었다.
‘아니, 어떤 의미로는 인종차별이었으려나?’
브라이언에게 한 말 들은 이후에도 그는 때때로 촬영에 지장을 주는 언행을 보여 왔다.
괜히 시비를 거는 건 예사요, 태화가 부러 어수룩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우월감 섞인 발언으로 태화를 깎아내렸다.
한번은 의도와 너무나 다른 스나이퍼를 연기한 탓에 메드닐의 화를 산 적도 있었다.
탄환의 궤도가 중요한 스나이퍼는 히어로들 중 가장 제이와 친하다는 설정인데 왜 네 멋대로 적대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런 행동들은 조금씩 태화와 친한 배우들의 신경을 갉았다.
그리고 마침내 태화를 폭발하게 만들었다.
계속 투덜거리긴 했어도 그렇게 기가 센 인물은 아니라서, 제임스는 화내는 태화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싫어하는 이유나 들어보자는 대목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피앙세를 채간 놈하고 똑같이 생겼다고!
제임스는 5년 넘게 사귀던 그녀에게 이번 영화 오디션에 붙으면 프러포즈를 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랬던 것이 합격을 통보받기 바로 전날 차이게 됐고, 그날 그녀와 같이 나왔던 남성이 한국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기 위해 유학 온 젊은 남자였단다.
‘너무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올 정도였으니.’
그 말을 들은 이들 전부가 정말 그게 전부냐 재차 물을 정도로 황당하고 정신 빠진 이유였다.
-야이, 머저리 같은 자식아!!
그 후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인간의 감정이 제 뜻대로 되는 게 아니다, 누가 똑같이 생기랬나’ 같은 헛소리를 늘어놓던 제임스는 머리끝까지 짜증이 난 글로리아에게 폭언 폭격을 당했다.
대부분의 파티걸들이 그렇듯 그녀도 꽤나 입이 험했는데, ‘풋롱(footlong) 사이즈도 안 되니까’로 시작한 외설적인 모욕은 구경꾼들도 들어주기 힘든 수준이어서, 메이슨은 그녀의 입을 틀어막은 뒤 그녀를 질질 끌고 사라졌다.
물론 그사이 영혼까지 털린 제임스는 그 후 크랭크업날까지 슬금슬금 글로리아를 피해 다녔다.
‘난 일단 메인에서 빠지니까······. 홍보는 한국에서 합류하면 되고, 미국에서 남은 일정은 지미 쇼가 전부인가?’
홍보로 유럽부터 돌지 떠드는 배우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태화는 자신의 일정을 떠올렸다.
촬영은 끝났다 하더라도 천갈궁을 추측하는 일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에 태화의 정체는 공개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제이 리일 뿐이었고, 제이 리는 홍보 전선에 같이 나갈 정도로 조명되는 캐릭터는 아니었다.
당연히 유럽을 위시한 5개월간의 홍보 전선에서도 빠졌고 단지 히어로들이 한국에 방문했을 때 함께 방송에 출연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났다.
‘사실 지미 쇼에서 부를 줄은 몰랐는데, 지미가 브라이언과 친하다는 소문이 사실이었을지도.’
제임스가 보인 행동으로 추측할 수 있는 일이나, 미국 내에서 태화의 인지도는 무명 신인 그 자체였다.
영화에 대한 홍보성 기사가 나갈 때도 짧게 한 줄 추가된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찬밥.
그런 상태에서 화제의 연예인들에게나 출연 제의를 보낸다는 지미 쇼에서 연락이 왔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배우들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였다.
‘한국 프로그램이 이런 식으로 접촉했다면 안 나간다는 선택지에 무게가 쏠렸겠지만······.’
지미 로모는 미국에서 사랑받는 쇼 진행자였고 그런 그의 토크쇼는 엄청난 인기를 자랑했다.
아무리 태화가 작품 외 활동으로 인지도를 올리는 행동을 꺼린다지만 ‘건방진 동양인’ 소리를 들으며 비호감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을 계획이 아니라면 지미 쇼는 나가는 게 맞았다.
「태화, 할 말이 있는데.」
태화가 토크쇼 후 빌 5개월 동안 사극 드라마와 로코 중 어느 쪽을 들어갈지 고민하던 찰나, 브라이언이 그를 불렀다.
그는 흐린 표정으로 태화를 응시하더니, 달싹거리던 입술을 떼었다.
「조금 무례한 말이긴 한데······. 혹시 드라마에 출연하는 것도 괜찮나?」
태화가 생각해 본 적 없는 제3의 길이었다.
끝
ⓒ 마늘소금
국가 대부분이 그러하지만, 미국도 TV 드라마와 영화 사이에 간극이 존재했다.
접근성이 좋은 것은 TV. 하지만 인정받는 건 영화.
흔하다고 못 하다는 의미는 아닌데, TV 수신료보다 티켓이라는 ‘눈에 보이는 값’을 치르고 보는 영화를 대중들은 더 높게 평가했다.
비용 외에도 역사적으로 영화에 더 많은 돈이 투자되었다는 사실과 시청자들의 의견에 따라 결말이 수정되기도 하는 드라마와 달리 완성된 채 공개된다는 점 등, 여러 요소가 드라마보다 영화가 낫다는 인식을 만들었다.
문제는 그렇게 완성된 대중의 시선이, 영화와 드라마 관계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드라마에서 잘 성공하고 있다가 괜히 영화에 뛰어들어 망하는 배우나 드라마 조연이 될 바엔 돈을 조금 덜 받더라도 영화로 가겠다 말하는 신인이 바로 그 예.
영화를 위로 생각하는 인식 때문에, 촬영 환경이 달라 적응 못 하는 일조차 ‘연기력 문제’로 포장되는 경우가 왕왕 일어났다.
그나마 한국 시장은 드라마가 더 돈이 된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그 경계가 희미해졌다.
톱급이라 불리는 배우도 드라마를 찍는 일이 종종 있었으며, 드라마에서 성공한 배우가 이미지 변신을 꾀하려 영화에 뛰어들기도 쉬웠다.
하지만 미국 업계는 과거와 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심해졌다.
미국의 모 배우가 ‘영화배우 안 되면 뭐 하려 했어?’라는 질문에 ‘아마 TV 배우?’라 대답한 것처럼, 두 직업은 완전히 분리되어 인식됐다.
드라마를 찍다간 영화로 갈 수 없을까 두려워 영화만 고집하는 배우도 있을 정도.
물론 ‘톱’이라 불리는 수준의 배우 중 양립하는 배우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수는 손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유리 천장이었다.
「사실 네가 미국인이었다면 이런 제안 자체를 하지 않았을 텐데······.」
브라이언은 오해하지 말라며 태화에게 내용을 설명했다.
미국인이었다면 시장이 양자택일에 가까우니 배우 인생을 결정지을 수 있는 이런 제안을 건네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태화는 한국에서 주로 활동하는 배우였다.
잠시 드라마에 넘어가더라도, 한국에서 영화를 촬영하는 것으로 감독들에게 재차 어필하는 것이 가능했다.
‘게다가 외국 배우이기 때문에 미국 배우들이 겪은 경계에 어느 정도 자유롭지.’
외국 배우의 경우 미국 영화판과 드라마판 어느 쪽도 본진이 아니다.
따라서 ‘성공만 한다면’ 이동 자체는 미국 배우들보다 자유로웠다.
물론 성공한다는 전제가 너무 어렵고, 그렇게 성공해서 페널티가 큰 드라마를 선택할 필요가 없기에 양쪽을 오가는 외국 배우는 없었지만, 이론적으론 그랬다.
‘태화라면······. 어쩌면 미국 영화와 드라마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을지도.’
브라이언은 태화의 연기가 마음에 들었다.
언어적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어도 전달력 면에서 충분히 합격인 데다, 외국어 연기자가 흔히 갖는 감정 표현의 어색함도 보이지 않는다.
그의 연기는 실제 있는 인물을 그대로 관찰하는 듯한 기분을 선사했다.
브라이언이 동 세대 배우들에게서 느끼기 힘들었던 감각이었다.
당연히 그런 감정은 호감으로 이어졌으며, 이어 안타까움과 아쉬움으로 변했다.
할리우드 영화계에 흔한 고정 이미지 때문이다.
한중일과 싱가포르 등 경제 성장을 이뤄 세계로 진출하는 동양인이 많아졌음에도 미국인이 가지는 동양의 이미지는 한 중국인 배우가 충격을 줬던 그 시절을 벗어나지 못했다.
배우의 연기력을 인정해 굳이 동양인일 필요 없는 역할을 맡기더라도 십 중 구는 암살자, 무술가, 모범생.
그것은 미국에서 인정받는 동양인 배우들이 넘기 힘들어하는 벽이었다.
‘하지만 드라마는 조금 다르지.’
동양인 경찰, 동양인 분석가, 동양인 간호사 등.
영화 업계와 비교하면, 드라마는 동양인의 사용이 유연했다.
지금 브라이언이 제안하려는 역할도 고정관념과 먼 역할이었으며 그는 ‘태화라면’ 그 역할을 성공적으로 소화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리고 그렇게 쌓은 이미지를 다시 영화로 연결하고······. 내가 누군가의 연기력을 이렇게 믿게 될 줄이야.’
그가 생각할 때 태화에게 부족한 부분은 언어, 딱 하나였다.
연기력은 물론이거니와 태화는 동양인들에게 불리한 신체적 조건도 훌륭한 편이었으니까.
‘외모는······. 조금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동양인 특유의 밋밋한 느낌이 없지 않았으나, 어차피 엄청나게 잘생기지 않은 이상 미국은 동양인에게 동양적 느낌을 요구한다.
한국이 서양인 모델에게 서구적인 느낌을 요구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물론 그의 그런 평가는 태화가 영어 실력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과 그의 얼굴이 ‘더 동양인처럼 보이는’ 화장의 결과임을 모르기에 나온 오해였다.
「어떤 역할인데?」
「······먼저 그것부터 물을 줄은 몰랐는데.」
적어도 몇 개월 촬영에, 출연 빈도부터 물을 거라 생각했던 브라이언은 웃음을 터뜨렸다.
태화의 이런 점도 그가 기대하게 하는 요인이었다.
***
크랭크업 파티가 있던 다음날, 태화는 맑아진 정신으로 브라이언이 건넸던 대본을 확인했다.
제목은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
미국 추리 공상 소설 ‘잃어버린 고리’를 원작으로 한 추리 수사 드라마였다.
천재 FBI 수사관 마커스 클레이본이 시즌마다 하나의 살인마를 쫓는 이야기는, 원작을 충실히 재현하면서 PPL의 균형도 잘 맞춘 것으로 유명했다.
‘······라고 해도 미드는 몇 개 보지 않아서 인기를 모르겠네. 시즌 5를 제작한다고 하니까 잘나간 것 같지만.’
물론 이러한 설명은 어제 있던 파티에서 브라이언에게 들은 것일 뿐, 태화는 자세한 내용을 몰랐다.
“태화야. 세팅 끝났어.”
“아, 고마워요 형.”
“뭘. 그런데 소설부터 읽지 않을 거야?”
“원작을 먼저 읽으면 잔상이 남아서. 드라마 감상하는 데 방해될 것 같아요.”
‘구미호’ 때와 달리 ‘잃어버린 고리’는 이미 시즌 4까지 나온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