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201
끝
ⓒ 마늘소금
태화가 나래의 도움을 받아 화장을 마치고, 스텝에게 분장을 받는 동안 그에게 다가오는 배우는 없었다.
그가 시선을 돌리면 부자연스럽게 다른 곳을 바라봤고, 아예 투명 인간 취급하는 이도 있었다.
‘나한테만 그러는 게 아니네. 애덤이야 그럴 수 있다 쳐도 다른 배우들이 저래도 되나?’
태화는 감독인 에이블에게조차 비슷한 태도를 보이는 배우들을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무려 시즌 2부터 5까지 이끌어온 총괄 감독이다.
조금 악의를 갖는다면 작가들을 종용해 슬쩍 중요하지 않은 배역 한둘을 죽여도 괜찮을 권력의 소유자.
그런 사람에게조차 저런 태도를 보인다는 게, 태화는 이해되지 않았다.
「안녕.」
「아, 안녕.」
그가 황당함을 느끼고 있는 사이 누군가가 처음으로 먼저 인사를 건넸다.
전원 무시로 일관할 것이라 예상했던 터라 태화는 한 박자 늦게 인사를 받았다.
「필립스 폭스이야. 리키 역을 맡았어. 만나서 반가워, 친구.」
태화보다 한 뼘 정도 작은 키를 지닌 히스패닉 남성이 악수를 요청했다.
꺼리는 기색을 보이는 배우들과 달리, 그의 얼굴은 그저 맑았다.
‘리키라면 데릭의 수화를 해석해주는······. 아, 그래서 친구인가.’
너무 친밀한 태도에 내심 당황했던 태화는 곧 그 감정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눈치챘다.
역할 간의 관계가 친하다면 배우와도 친해지려 하는 배우가 있었다.
비슷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보다 자연스럽게 역할을 연기하기 위해서다.
태화는 필립스도 그런 타입이라 사람이라 생각하며 손을 맞잡은 뒤 가볍게 흔들었다.
그리고 리키에 대해 떠올렸다.
[작은 체구와 순한 얼굴을 한 히스패닉 청년은 과연 이 무리에 있어도 될까 싶을 정도로 이질적인 존재였다.]
소설 속에서 리키에 대해 설명한 문장은 단출했다.
그러나 그 짧은 표현 그대로, 리키는 데릭과 다른 의미로 CyX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작품 진행에도 데릭에게도 중요한 인물이지.’
살인마의 얼굴을 유일하게 목격한 인물이자 타깃인 리키.
CyX에서 데릭이 중요하게 여기는 단 두 명의 인물 중 하나.
또한 어디선가 흘러들어와 부평초를 자처하는 데릭이 유일하게 가족이라 여기는 존재.
들러리라 생각될 정도의 짧은 묘사와 달리, 리키는 데릭과 함께 사건의 또 다른 키였다.
「데릭 역을 맡은 태화 리야. 태하라 불러도 괜찮아.」
「아하하. 괜찮아. 일하는 가게에 한국인 단골이 있어서 받침발음에 익숙하거든.」
필립스는 그 사람 이름이 택윤이라 다른 한국인 이름은 더 이상 어렵지 않다고 웃었다.
옅은 초콜릿 빛 피부를 지닌 배우는 정말로 웃음이 많았다.
「근데 키가 정말 크네. 내가 본 아시안 중에서 몸도 젤 좋은 거 같아. 데릭처럼 혼혈이야?」
「순수 한국인인데.」
「외모도 상상했던 거랑 비슷해서 놀랐어. 입술 아래 피어스는 진짜?」
「아니, 붙인 거······.」
「그만 말하세요, 문신 망가져요.」
태화의 옆구리에 접착제를 바르고 문신을 옮기는 중이던 스텝이 폐의 진동 때문에 제대로 된 모양이 안 나온다며 태화를 타박했다.
그가 쌀쌀맞은 스텝을 한번 가리키곤 어깨를 으쓱이자,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필립스는 태화를 향해 미안함이 섞은 미소를 지었다.
태화의 문신 분장이 끝날 때까지 필립스는 친절하게 기다려줬다.
아무리 친근감을 느꼈다 해도 처음 만난 사이에 보이기엔 상당히 호의적인 태도였던 탓에 태화는 미묘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할 말 있어?」
「······있었는데 없어졌다고 할까. 뭔가, 진짜 ‘데릭’이네.」
「아까도 그 말 한 것 같은데······.」
「아깐 겉치레였다면 지금은······. 에이블 감독이 널 데려온 이율 알 것 같아.」
필립스는 태화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데릭의 트레이드 마크인 옆이 쭉 찢어진 헐렁한 흰색 탱크 톱(open side tank top).
그 찢어진 틈으로 연결되는 옆구리의 문신과 제 모습을 과시하는 근육.
그리고 화룡점정을 찍은 왼쪽 눈가의 작은 눈물점.
그것은 작가가 ‘벼랑 끝에 선 것처럼 위태로운 매력을 흘리는 인물. 나른한 표정으로 고독을 표현하는 한 마리 짐승’이라 적었던 데릭, 그 자체였으니까.
지금은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어 상상력이 필요했지만 카메라 앞에서 날카롭게 노려보는 얼굴은 분명 이를 드러낸 맹수일 것이리라.
드라마가 잘 되길 바라는 필립스로선 다행인 일이었다.
‘내 역할은 데릭이 빛나는 만큼 같이 빛나니까.’
리키는 CyX 내에서 별 쓸모없는 카드다.
몸은 왜소하고 얼굴도 순박한 티가 나는 데다 마음마저 여렸기 때문이다.
먹이로 전락하기 좋은 모습을 하고 있는 리키가 CyX 내에서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건 친구인 데릭 덕분이었다.
경찰을 따돌리거나 무력화시킨 후 약, 물건, 또는 조직원을 빼낸 전적이 181건.
위험한 일에서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하는 프레딕의 번견, 데릭.
그런 데릭의 수화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자 데릭이 아끼는 유일한 친구인 리키는 사건이 진실을 찾아가기 전까지 데릭의 친구로서 존재했다.
따라서 데릭을 맡은 배우가 데릭의 매력을 제대로 표현해줘야만 리키의 캐릭터가 공기화되지 않은 채 무사히 사건의 중심에 다가갈 수 있었다.
역할이 정해진 순간, 의지와 무관하게 한 배에 타게 된 것이다.
필립스가 현장 분위기를 읽고도 태화와 친해지기 위해 다가온 이유였다.
「근데 나야 둘째 치고 왜 감독을 저리 대하는 거지?」
「······응? 응! 아, 그건.」
태화를 바라보던 필립스는 물음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현재 촬영장의 분위기를 설명했다.
「사실 시즌 2초기에나 저랬지, 저번 크랭크 업까지는 다들 저러지 않았어. 백인 우월주의가 심하다고 알려진 애덤도 그럭저럭 에이블의 요구를 따랐고.」
시즌을 세 번이나 같이했는데 손발이 안 맞을 정도면 그 낌새가 시청자들에게도 드러났으리라.
하지만 둘은 그럭저럭 서로의 실력을 인정하고 사적인 부분은 데면데면, 공적인 부분은 찰떡 호흡을 보여 가며 비시즌을 평정했다.
가장 위에 있는 이가 그러니 차별 사상을 지닌 다른 배우들도 감독의 인종에 대해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랬는데······. 저번 크랭크업 파티 때 사이가 좀 틀어졌거든.」
발단은 애덤의 칭찬이었다.
평소 다른 인종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던 그는 자기의 방식대로 에이블에게 칭찬을 건넸다.
문제는 그 내용이 화교 출신인 에이블에게 상당히 모욕적인 언사였다는 것이다.
애덤이 그런 성격임을 알고 있던 에이블은 자신에게 받아들여진 내용을 설명하고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칭찬을 왜곡했다며 애덤은 불쾌감을 표했고, 그 후 크랭크업 파티가 끝날 때까지 감독인 에이블과 단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다.
「주인공 배우가 그런 태도를 보이니까 지금까지 억눌려있던 놈들이 옳구나 하고 분위기를 조장했어. 게다가 너 들어온다는 걸로 사이가 좀 더 나빠졌고······.」
물론 인종에 신경 쓰지 않은 배우도 많았지만 그들은 침묵했다.
괜한 불똥에 관여하지 않는 훌륭한 처세였다.
「······잘 아네? 리키 역 아니었어?」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태화는 의아하단 눈으로 필립스를 살폈다.
리키도 데릭과 함께 시즌 5에 처음 등장하는 캐릭터다.
리키를 맡은 배우 필립스도 이 현장에 시즌 5부터 합류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필립스는 팬으로선 알기 힘든 미묘한 부분까지 마치 직접 본 사람처럼 말했다.
「저번 시즌까지만 해도 스텝으로 참여했거든. 영화가 너무 좋아서 등장인물이 될 수 없는데도 현장에 있고 싶었어. ······뭐, 덕분에 너랑 말하고도 무사할 수 있어서 이리 행동하는 거지만.」
아까 문신 분장을 해주던 이도 단지 불안증이 심해 날을 세운 것뿐이라며 필립은 스텝을 변호했다.
「괜찮아. 아직 내가 보여준 게 아무것도 없잖아. 처음 보는 배우가 낙하산처럼 나타났으니 가시를 세우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그런 변명을 태화는 덤덤하게 받았다.
원래 굴러온 돌은 미움받기 마련이다.
게다가 갑자기 큰 역할을 맡은 미운 오리이기까지 했으니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다.
물론 예상했다 해서 이해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특히 오늘 촬영이 끝나고도 여전하다면 태화는 실력으로 그들을 눌러줄 생각이었다.
물리적으로 괴롭힘당하는 것보다 자신이 맡은 배역의 비중이 점점 사라지는 것이, 배우에겐 더 괴로운 일이었으니 말이다.
「낙하산? 표현 재미있네. 근데 진짜 한국인이야? 영어가, 솔직히 내 친구들보다 나아. 걔들은 집에서 스페니쉬만 써서 영어 발음이 영······.」
조금 친해졌다 여긴 것인지 필립스는 태화의 옆에서 이런저런 말들을 재잘거렸다.
그 모습이 리처드를 떠오르게 해, 태화는 자신에게 이런 성격의 사람을 끌어들이는 성질이라도 있는 것인지 잠시 고민했다.
***
마커스가 CyX와 대면하는 장면.
원작에서 보면 리더인 프레딕이 백인에 가까운 흑백혼혈이기에, 한 가지 인종으로 통일되는 경향이 강한 다른 집단에 비해 CyX는 여러 인종이 섞여 있다는 묘사가 나온다.
때문에 지금 애덤의 앞에서 준비하는 배우들도 그 인종의 풀이 상당히 다양했다.
‘······저 배우로군.’
배우들을 훑고 있던 애덤이 시선이 한 배우에게서 멈췄다.
다른 부산스러운 이들과 달리 구석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머리를 빗고 있는 배우.
태화였다.
‘마음에 안 들어.’
에이블이 먼저 굽히고 들어오길 기다리던 애덤은, 그가 굽히기는커녕 다른 동양인을 데려왔다는 사실이 상당히 못마땅했다.
당연히 그 불만은 비빌 언덕이 없어보이는 태화에게 향했다.
‘여기가 미국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지.’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태화를 노려봤다.
작은 우물에서만 놀다 큰 물에 나온 촌놈에게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태화는 자신을 간질거리는 적의를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주인공 마커스 역의 배우 애덤과 시선이 마주쳤다.
‘왜 다들 생산적이지 못한 일에 목숨을 거는 건지.’
인정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은 다르다.
따라서 연기에 문제가 없다면, 태화는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괘념치 않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인간의 감정은 연기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태화는 그 점이 불만이었다.
‘작품에 집중해도 완벽하게 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인데······.’
주연인 애덤은 그 구별을 잘해낼지 모른다.
인종 차별주의자라는 사실이 알려졌음에도 주연을 맡을 수 있다는 건, 그가 공적으로 그 점을 드러내지 않았거나 그런 걸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연기를 잘한다는 의미니까.
하지만 그것은 애덤에게 한정된 것일 뿐. 그에게 영향을 받은 다른 주변 배우들을 포함하지 않았다.
‘원작에서 고독한 늑대라 표현했더니 진짜 고독해졌어.’
할리우드는 생각보다 아름답지 않다.
태화는 묘한 실망감을 느끼며 마음을 다잡았다.
다들 연기에 집중하지 않는다면, 집중하지 않고선 잡아먹힐 거란 위기감을 주면 됐다.
그렇게 서로가 다른 생각을 지닌 채 촬영이 시작하고 한 시간이 지났을 때.
현장에 있던 배우들은 어느 한 배우에게 강제로 끌려가, 제가 가졌던 감정을 잊고 배역 자체가 되어 작품 속에 녹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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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늘소금
태화에게는 Ⅲ단계에 이른 재능이 다섯 가지 존재했다.
발음을 명확하게 해주는 딕션.
그것을 지지해주는 발성.
‘눈으로 말해요’를 실현시키는 눈빛.
그 눈빛을 조금 더 깔끔하게 만들어주는 시선 처리.
마지막으로 모든 재능을 더해 공간을 휘어잡는 무대 장악.
대본을 통해 많은 육체적 재능들을 얻었으나 태화를 지탱하는 재능은 그가 회귀 전부터 갈고닦아왔던 기초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드라마는 상당히 의미 있지.’
태화는 자신이 가진 재능들을 골고루 사용해왔다.
클리어 보상으로 연기에 도움이 될 만한 재능들만 선택해왔으니 당연했다.
그러나 해외에 진출하면서 태화는 다른 요소들보다 언어에 조금 더 신경 썼다.
아무리 배운 언어를 원어민처럼 발음할 수 있어도 외국어는 외국어였고, 언어에 어떠한 버릇도 없다는 건 반대로 쉽게 물들 수 있다는 의미기에 혹시나 실수하지 않게 조심했다.
특히 ‘히어로즈’에선 두 가지 억양을 번갈아 썼던 터라, 가면이 바뀌는 일이 없도록 언행에 주의를 기울였다.
‘데릭이 말을 하지 못한다는 걸 처음엔 제약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상황은 데릭이란 역할을 맡으면서 바뀌었다.
표정과 눈빛, 제스처로 언어를 대신하는 인물, 데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