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205
점차 밝아지는 시야에 해맑게 웃고 있는 태화의 모습이 비쳤다.
「천 달러 감사합니다.」
그는 놀란 배우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길고 길었던 전쟁 끝에 마피아가 승리했다.
끝
ⓒ 마늘소금
불이 완전히 켜지고 태화는 옆에 앉아있던 밀라와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이미 감독을 통해 자신을 지목한 이가 없다는 걸 들었기 때문에 태화의 행동엔 거침이 없었다.
곧이어 다른 빌런 측 배우들, 제작진과도 손을 맞잡으며 태화는 성공을 기뻐했다.
「진짜야······? 태하가 우릴 배신했던 거야?」
글로리아가 흔들리는 눈으로 빌런들 사이에 녹아든 태화를 바라봤다.
딱히 배신이라고 할 것도 없고 단지 가벼운 내기에 불과했지만, 받아들이는 배우들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이야기였다.
그 누구도 태화를 천갈궁으로 지목하지 않았다.
바꿔 말하면 아무도 태화를 의심하지 않았다.
인종이 가장 큰 이유이긴 했으나 태화의 성격이나 언행도 그를 용의 선상에서 지우는데 한몫했다.
「······인간의 감이란 무시할 게 못 되는군.」
즐거워하는 태화를 보며 브라이언은 이마를 짚었다.
몇 번이나 태화가 천갈궁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음에도 그는 이성을 믿었다.
한 가지를 제외하고 안 되는 이유가 수십 가지 생각나니 당연했다.
하지만 뚜껑을 열었을 때 결과는 달랐다.
깊숙이 뿌리 내린 고정 관념이 그가 진실을 보는 걸 방해했던 것이다.
「역시 내 운은 데비와 에시를 만난 걸로 다 한 것 같아.」
「왜 결론이 가족으로 끝나는 거야?」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니까.」
너무나 당당하게 가족 자랑을 하는 브라이언을 잠시 질린 눈으로 바라보던 글로리아는 불퉁한 표정으로 태화를 쳐다봤다.
태화를 특히나 아꼈던 그녀는 유감이 참 많았다.
「태하! 너무한 거 아니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아니라고 굳게 믿었는데!」
「글로리아가 전개상 내가 범인이라 말했을 때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모를 거야. 브라이언과 함께 네가 가장 날카로웠거든.」
「어? 어. 그래? 내가 좀 날카롭긴 하지.」
그러나 그렇게 화내던 것도 잠시, 진심이 담긴 태화의 말에 글로리아는 성내던 것도 잊고 콧대를 세웠다.
그 모습을 한심하단 시선으로 응시하던 메이슨이 태화에게 다가왔다.
「축하해. 지금 보니 억양도 속이고 있었네. 굉장한걸.」
「배우들과 스텝들의 협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야.」
태화는 공로를 주변으로 돌렸다.
아무리 혼자 연기를 잘해도 속이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다른 이들이 적극적으로 도왔기에, 비밀이 유지될 수 있었다고 태화는 생각했다.
배우들은 자신이 졌다는 사실에 허탈해하면서 태화에게 축하를 건넸다.
이 작은 추리극에서 중요한 건 상금이 아니었다.
배우들의 눈썰미를 시험하는 동시에 이 장난이 작품의 진정한 반전으로 거듭날 수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한 내기였다.
그리고 태화와 빌런 측 배우, 제작진은 상대 측 배우들과 관객들의 뒤통수를 침으로써 영화의 반전이 성공했음을 알렸다.
「······노먼?」
「역시 알아보네. 오디션장에서 만났지?」
태화가 싱긋 웃는 것을 보며 리처드는 떨떠름한 심정을 감추지 못한 채 그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외모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슈퍼 히어로처럼 갑자기 탈바꿈한 태화를 보자 리처드는 불현듯 오디션에서 만났던 신사 노먼 셀리스가 생각났다.
「잠깐, 태화가 노······. 하지만 그는 영국······.」
「가발과 렌즈의 힘이었지.」
「하······.」
여유로운 분위기와 정장에 어울리는 우아한 행동이 돋보인다.
애벌레가 우화해 나비가 된 것처럼.
미운 오리 새끼였던 새가 백조가 된 것처럼.
태화는 화려한 개시로 미국인들에게 자신을 새겨 넣었다.
「안녕하세요, 천갈궁 역할을 맡은 태화 리입니다.」
무대로 나선 태화가 천갈궁이 보였던 완벽한 퀸즈 잉글리시를 구사하자 여태껏 반신반의하던 이들은 멍한 눈으로 태화가 서 있는 곳을 응시했다.
「반전이 제대로 작동한 것 같아 기쁩니다. 사실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실마리가 많이 제공되어서 조마조마했거든요.」
영상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천갈궁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해할 만한 떡밥들이 은근히 추가된 데다가, 제이 리의 행동도 조금 더 의뭉스럽게 편집됐다.
제이 리를 의심의 눈으로 바라봐야 보일 수준의 사소한 것들이었으나 당사자인 태화는 알아보는 이가 있진 않을까 긴장한 채 관객들의 분위기를 살폈더랬다.
「태화에게 저도 한 방 먹었군요. 두 인물 간의 공통점은 뛰어난 연기력뿐이라 생각했는데······. 그가 제이 리와 천갈궁을 완벽히 연기해 주어 기쁩니다.」
태화의 인사를 시작으로 브라이언과 다른 주요 배우들도 앞으로 나와 짧은 인사를 관객들에게 건넸다.
밀라는 ‘입이 근질거려 혼났다’란 농담으로 관객들에게 웃음을 줬고, 유력 용의자였던 리처드는 ‘가장 큰 가능성을 뺐는데도 맞추지 못했다’라며 태화를 칭찬했다.
마지막으로 감독인 메드닐이 다시 한번 개봉 일까지 비밀을 엄수해 줄 것을 당부하자 오늘 왔던 이들은 한마음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반전을 더 많은 사람이 접해야 한다.
만족스러운 시사회였다고 후기를 올리면서도, 그들은 천갈궁에 대해 떠드는 것을 자제했다.
***
그 후로 일주일이 지나고 ‘히어로즈’가 정식으로 개봉했다.
대학 방학 시즌인 5월 초인 데다 감상 후기도 호평 일색이었던지라 ‘히어로즈’를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는 이들은 나날이 증가했다.
반전을 안 뒤 영화를 보게 되면 또 다른 맛을 즐길 수 있다는 소문이 함께 퍼지면서, 두 번 이상 표를 구매하는 관객도 함께 늘었다.
「히어로즈를 봤는데 SFD에 숨어 있던 스파이가 리처드일 거라 생각했죠. 그런데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저를 또 불러 주어 고맙네요.」
「그런 모습을 보였는데 부를 수밖에 없잖아요! 세상에. 여러분, 이 얼굴이 화장을 하면 완전 다른 얼굴이 되는군요. 맙소사!」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고 지미 쇼는 과거 태화가 언급했던 것처럼 다시 한번 그를 찾았다.
지미는 태화가 천갈궁을 연기한 것에 대해 지대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특히 영국식 발음이 마음에 들었다며 한국인인 그에게 영어 발음을 배웠다.
「그나저나 저번에 봤을 때와 분위기가 또 다르군요! 세상에.」
지미는 태화의 변화에 호들갑을 떨었다.
오늘 태화는 시사회 때와 비슷한 모습으로 참석했다.
깔끔하고 단정한, 신사의 이미지였단 의미다.
「제 스텝은 장소와 시기에 어울리는 외모로 꾸미는 것에 능숙해서요.」
「그런 의미로 저희 제작진이 공수해 온 사진이 있죠! 자, 보세요!」
저번에 제이 리의 사진을 꺼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미는 태화의 또 다른 사진 패널을 책상 위에 올렸다.
오디션을 위해 만들었던 노먼 셀리스였다.
「이게 이 사람이에요! 말도 안 돼! 내가 이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금발에 녹색 눈, 거기에 하얀 피부까지.
사진 속에 있음에도, 노먼은 누구나 ‘이 사람은 현대의 귀족’이라 말할 정도로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그래서 태화 리의 메이크업 아티스트 나래 서를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지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카메라가 시큰둥한 얼굴로 방청객 석에 앉아있는 나래를 비췄다.
오늘 ‘참석해 주면 안 되겠느냐’란 제작진의 부탁만 들었던 터라 그녀는 갑작스러운 조명에 당황했다.
「나래 서,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태화의 얼굴은 정말 자주 바뀌던데, 혹시 저도 가능합니까?」
지미는 호기심이 담긴 눈으로 나래를 바라봤다.
인종을 착각하게 하는 화장은 마치 마법과 같았고 그는 자신이 직접 체험해 보길 원했다.
「그게 아무나 되면 이미 다들 했겠죠······?」
멘트를 준비하지 않았던 나래는 속에 있던 말을 그대로 꺼냈다.
너는 불가능하다는, 어찌 보면 기분 나쁠 수도 있는 발언이었으나 지미는 불쾌한 기색 하나 없이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태화만 되는 거랍니다. 이런, 아쉬워라. 그런 의미에서 태화, 다음엔 젊은 시절 케인 일라이저의 모습으로 바꿔보면 안 됩니까? 내가 엄청 팬이라.」
능숙하게 말머리를 돌린 지미는 젊은 시절의 그를 다시 한번 보고 싶다며 은퇴한 야구 선수의 이름을 꺼냈다.
「······그건 코스튬 플레이잖아요.」
「이런! 그럼 누군가 케인의 삶을 영화로 만들어야겠군요. 이 프로그램을 보고 계신 아무 감독님, 부디 케인을 주제로 한 영화를 만들고 태화를 주연으로 해주기 바랍니다.」
지미의 농담에 방청객석에서 웃음이 울렸다.
용인 발음뿐 아니라, 스코티쉬 영어까지 시켜본 지미 덕에 태화는 자신의 장점과 매력을 시청자들 앞에서 한껏 뽐낼 수 있었다.
「아, 가기 전에 선물이 있어요. 이건 제가 한국에서 찍은 영화인데 이번에 더빙판이 나왔거든요. 한 장 드릴게요. 제목은 괴물(Monster)이에요.」
「이거 광고입니까.」
「홍보죠.」
사전에 맞춰둔 부분이었기에 태화는 자연스럽게 주거니 받거니 하며 시디를 선물했다.
물론 지미는 ‘괴물’에 대해 단순히 스릴러라고만 들었다.
「집에 가서 봐야겠군요. 오늘도 유쾌한 만남이었습니다. 자, 지금까지 모두를 속여 온 천갈궁 역의 태화 리, 그리고 저 지미 로모였습니다!」
클로징 멘트와 함께 촬영이 끝나고, 지미는 영화 다 본 뒤 연락하겠다며 웃는 얼굴로 태화를 보냈다.
***
“그거 국내판보다 살벌하던데. 너 진짜 나빴다.”
사전에 들은 바가 없던 나래가 흉악한 악당을 보는 눈으로 태화를 바라봤다.
단순히 자신이 출연한 스릴러라니, 영화에 대한 설명이 너무나 부족했다.
“영미판 성우 계약을 맺으면서 계약 일부를 바꿔서······. 유명인이 생생한 코멘트를 남겨주면 좋을 거라고 현규 형과 알렉산더가 말하더라고요.”
“그 둘이 악마였네······.”
태화는 영어 녹음을 맡으면서 높은 출연료와 순이익 퍼센티지 계약을 맺었다.
그 일반적이지 못한 계약의 중심에는 달라진 태화의 위상이 있었다.
‘괴물’ 촬영 당시 신인에 가까웠던 터라 태화에겐 러닝 개런티가 지급되지 않았다.
때문에 흥행에 비해 번 돈이 적었고, 괴물의 제작사 측은 비교적 싼 값에 큰 이득을 얻었다며 기뻐했다.
그러나 ‘괴물’은 그냥 성공한 게 아닌 ‘너무’ 성공해버렸다.
해외 수출이 활발하게 이뤄짐과 동시에, 태화를 필요로 하는 곳은 많아진 것이다.
홍보에 대한 조항이 명시되지 않았기에 BGA는 융통성 있게 참여해 달라 말하는 제작사의 말을 무시했다.
참석해봐야 손해만 증가하는 데다, 당시 태화가 중국에서 ‘협력자들’을 촬영하고 있었기에 때문이다.
고작 인지도를 올리기 위해 제 일을 뒷전으로 하며 남만 좋은 봉사활동을 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감독이었던 최지환이 정당한 값을 주면 되지 않겠느냔 의사를 표했지만 사공이 된 투자자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그렇게 알맹이가 빠진 채 시작된 2차 시장의 성적은 애매했다.
일본, 중국 등 더빙 수요가 높은 곳은 배우의 연기력을 살리지 못한 미스 캐스팅이라 욕먹었고, 판매량도 적었다.
‘협력자들’, ‘캐트시’ 등에서 완벽한 더빙을 선보인지라, 태화를 성우로 쓰지 않은 ‘괴물’이 비교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 미국 판매의 길이 열렸을 때.
제작사는 타이밍 좋게 미국 작품을 맡은 태화를 고용했다.
태화가 전에 없는 독특한 계약을 맺게 된 이유였다.
“퍼센트가 크다고는 해도 손해 아니야? ‘지금부터 발생하는’이라 해도 단물 거의 다 빠졌잖아.”
“전 영어 더빙도 할 수 있어서 즐거웠어요.”
“······아, 그래.”
나래는 짜게 식은 눈으로 태화를 응시했다.
처음엔 이 정도까진 아닌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연기만 안다.
이게 다 일을 너무 잘하는 주변인들 때문이라 생각하며 나래는 차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나흘 후, 지미의 파랑새에 ‘태화, 난 널 믿었는데 어떻게 이런 배신을 할 수가 있지? 이 정도라곤 말하지 않았잖아.’라는 유언 비슷한 말이 올라가 잠시 화제를 모았다.
끝
ⓒ 마늘소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