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209
그렇게 관심이 이어졌지만, 태화는 들어온 작품들을 전부 거절했다.
오는 역할들이 너무나 ‘재미없었으니까’.
‘자본주의로 돌아가는 동네답게 안전하게 가겠다는 건데······.’
색기를 뽐내는 캐릭터, 오싹한 사이코패스 등 이미 검증되었으나 미국인들에게는 신선할 역할들.
그들은 태화에게 한국에서 보인 적 있는 캐릭터를 영어로 다시 한번 연기하길 바랐다.
‘그런 지루한 일을 할 리가.’
세상에는 태화가 평생 연기해도 다 해 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수많은 역할 성격이 남아 있었다.
때문에 태화는 비슷하고 획일적인 연기보다, 도전 정신을 자극하는 배역을 맡아 팔색조 같은 매력을 펼치는 것이 좋았다.
그는 대중들에게,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누구든 될 수 있다는 걸 알리고 ‘이태화가 맡았던 역할은 그밖에 표현할 수 없던 것’이란 인상을 주고 싶었다.
‘그런데 걸리는 게 많단 말이지······.’
영화 산업은 유럽에서 시작되어 미국이 중심을 이뤘다.
주류가 백인인 만큼 유색 인종을 향한 차별은 존재할 수밖에 없었고, 임금부터 역할까지 보이지 않는 여러 족쇄가 작용했다.
태화는 자신이 뻗어 나가지 못하게 막는 그것들이 귀찮았다.
그러나 완전히 떨쳐 버리기엔, 아직 그가 가진 명성과 힘이 적었다.
‘계기가 필요해.’
한 발자국만 더 가면 될 것 같은데 모자라다.
그는 손밖에 있어 닿지 않는 것들에게 갈증을 느꼈다.
「너 가면 많이 아쉬울 것 같아. 또 올 거지?」
「물론이지. 하지만 TV로는 안 올 거야.」
「하하, 그래도 정규 시즌에 비하면 짧은 편인데. 아, 너넨 주 2회랬지? ······많이 길게 느껴졌어?」
가끔 태화에게 ‘너무 여유롭지 않아?’와 같은 말을 들었던 필립스는 숨은 속뜻 알아듣고 어색한 웃음을 띠었다.
태화는 성실하게 데릭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성실했다고 해서 촬영 전반이 만족한 것이냐 묻는다면, 답은 달랐다.
「탄탄한 환경이나 시즌제가 나쁘다는 건 아니야. 단지 나랑 안 맞을 뿐이지.」
미국 드라마는 일주일에 한 번씩 방영했다.
그만큼 퀼리티가 보장됐으나 태화처럼 다작을 원하는 배우들에게는 상당한 걸림돌이 됐다.
비정규 시즌 미니 시리즈의 경우 13화로 준비 기간까지 4개월.
정규 시즌으로 20화가 넘는 경우 6개월 이상 한 작품에 묶여야 했으니까.
게다가 주연이라면 크랭크 업 후 바로 다음 시즌을 준비해야 하니 다른 작품은 꿈도 못 꿨다.
‘영화만큼이나 많은 제안을 받았지만······.’
태화는 고사했던 드라마 대본들을 떠올리고 고개를 저었다.
다소 재미없는 역할만 들어왔던 영화에 비해 드라마 쪽에선 꽤 다양한 역할이 들어왔다.
비중도 상당히 컸고, 데릭처럼 한 시즌만 나오는 배역도 아니었다.
‘그게 문제지.’
한국에서 질(質)과 시간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아 왔던 태화는 느긋한 할리우드 시스템에 조금 불만이 있었다.
일정한 퀼리티와 적당한 타이밍을 위한 선택임을 알았어도 영화에 1년, 미니 시리즈에 4개월을 쏟는 건 태화에겐 견디기 힘든 여유였다.
「아, 그거 알아? 이번 10월 방영하는 블루 홀 시즌3에 한국인이 주연 중 하나로 합류한대. 이름이 류? 루? 이런 이름이었는데······. 다른 방송국에도 한국인 조연이랑 단역이 많이 늘었다더라. 네가 한국이란 나라를 알려서 감독들이 관심이 생겼나 봐.」
잠시 섭섭해하던 필립스가 ‘또 다른 한국 배우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스텝으로도 일한 경력이 있는 만큼, 그는 방송계 전반의 소문에 능통했고, 이런 식으로 종종 태화의 정보통 역할을 해 줬다.
「류? 혹시 류 심 아니야?」
「아, 맞아. 그런 이름이었어. 아는 사람이야? 블루 홀 관계자들도 아는 바가 없어서 궁금해하더라고.」
「한국에서 함께 오디션을 치른 적이 있었어. 연기도 잘하고 박력 있는 배우야.」
태화는 ‘류’라는 이름을 듣고 드디어 BGA가 움직였음을 눈치챘다.
회귀 전보다 상당히 늦은 진출.
그러나 태화라는 태풍이 휩쓸고 간 공터를 단숨에 점령할 것을 생각하면, 몇 년의 기다림은 늦은 게 아니었다.
물론, 자신의 존재가 변화를 만들었다는 걸 모르는 태화는 왜 갑자기 미래가 변한 것인지에 대해 잠시 고민했다.
「네 말을 들어 보니 주연에 어울리는 사람인 거 같아 다행이네. 에이블이 부른다. 가자.」
「그래.」
태화는 오늘 촬영할 부분을 다시 한번 상기한 뒤 창고로 꾸며진 세트장 안에 들어갔다.
***
「데릭! 괜찮아? 피가······.」
납치당한 리키를 단독으로 구하러 온 데릭은 페트릭이 쏜 눈먼 총에 등과 배를 관통당했다.
간신히 도망치긴 했으나 꽤 큰 구멍이 난 배에선 출혈이 계속되고 있었고, 그 자국들은 콘크리트 바닥에 흔적을 만들었다.
「먼저 가라니! 내가 어떻게 널 버리고 가······!」
데릭이 검지와 중지로 앞쪽을 가리키며 혼자 가라는 수화를 취했다.
물론 리키가 받아들일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핏자국은 내 옷으로 가리면 돼. 지금이라도 앞뒤를 묶고 가면······.」
거친 숨을 몰아쉬던 데릭은 등을 벽에 기댄 채 한 손으로 리키를 설득했다.
‘여기 있으면 둘 다 위험해.’
‘마커스를 불러와.’
느릿하게 이어지는 수화는 너무나 단호해서, 리키는 눈물을 흘렸다.
「위험하더라도 널 버릴 수 없어.」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는 유약한 친구를 보며 데릭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양손이 묶여 어떤 수화도 펼칠 수 없었지만 그의 강렬한 눈빛은 모든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데릭의 입술이 키스할 것처럼 동그랗게 모여 작게 삐죽였다.
‘가(Go).’
그 말을 끝으로 데릭은 있는 힘껏 리키를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눈짓으로 가야 할 방향을 가리켰다.
「내가······.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잘 숨어 있어야 해? 꼭이야?」
불안해하는 리키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그는 작게 웃었다.
눈물 어린 표정으로 데릭을 쳐다보던 리키는 곧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리키의 신형이 사라지자, 벽에 기대여 있던 데릭의 몸이 천천히 허물어졌다.
「제길, 친구를 그냥 버리고 갈 줄이야!」
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나타난 페트릭은 실 끊어진 인형처럼 벽에 기대 앉아 있는 데릭을 보곤 분한 마음에 소리를 질렀다.
그는 시체가 된 데릭을 넘기고 리키를 찾아 나서려고 했다.
죽은 줄 알았던 데릭이 갑자기 움직여 발목만 잡지 않았더라면 그의 의도는 성공했으리라.
「이 끈질긴 자식! 떨어져! 아아악!」
데릭은 필사(必死)를 각오한 눈으로 페트릭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증오와 굳센 결의는 그의 마지막 힘이 되어 살인마의 발목을 옥죄였고, 그를 바닥으로 끌어내리려 들었다.
「이 망할 새끼가!」
고통에 몸부림치던 페트릭은 총으로 데릭의 등을 연달아 겨냥했다.
총알이 박힐 때마다 데릭의 몸이 움찔거렸지만, 데릭의 손톱은 점점 더 페트릭의 발목을 파고들었다.
마침내 세 번째 총성이 울렸을 때, 데릭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부릅뜬 채 초점을 잃은 눈과 일그러진 표정.
모든 것이 그의 죽음을 알렸으나, 그 와중에도 그의 손은 페트릭의 발목에 족쇄처럼 붙어있었다.
「끄으읍! 젠장-!」
간신히 데릭의 손을 벌린 페트릭은 발목에 그대로 박힌 손톱을 보고 홧김에 데릭의 머리를 갈겼다. 아니, 갈기려 했다.
「젠장-!」
페트릭은 딸깍딸깍 소리만 나는 총을 바닥에 던졌다.
데릭과 사투를 버리느라 시간과 총알을 전부 소진했다.
페트릭에게 있어 최악의 전개였다.
***
「이번 시즌 동안 정말 고마웠어. 마지막 연기까지 소름 돋았다고.」
촬영이 끝나고, 빈센트는 네 눈빛 때문에 NG를 낼 뻔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발목에 발려 있던 실리콘 젤을 보이며 어떻게 손톱이 빠질 정도로 그러냐는 농담도 건넸다.
물론 그 손톱은 태화의 진짜 손톱 위에 붙여 뒀던 인조 손톱이었다.
「그럼 난 먼저 갈게.」
「다음 주에 소셜 미디어를 확인해 봐. 분명 너······. 아니, 데릭에 대한 추모가 퍼질걸?」
「알았어.」
오늘로 촬영이 끝난 그를 많은 스텝과 배우들이 배웅했다.
처음 왔을 때 싸늘했던 반응을 생각하면 180도 다른 태도였다.
‘죽는 역할도 나쁘지 않네.’
절대적으로 저지해 보겠다는 데릭의 간절함은 죽는 순간까지 생기로 가득 차 있었다.
죽음과 가까운 연기를 많이 해 왔지만 한 번도 죽어 본 적 없던 배우는 약간 홀가분한 얼굴로 현장을 벗어났다.
그리고 이틀 뒤, 태화를 실은 한국행 비행기가 로스앤젤레스의 하늘에 떠올랐다.
끝
ⓒ 마늘소금
한국에 도착한 태화를 수많은 카메라가 반겼다.
‘히어로즈’가 한국에서 천만 관객을 돌파하고 전 세계적으로도 흥행한 탓이다.
영화 성공의 주역 중 하나가 한국 배우라는 것은 대중들이 충분히 자랑스러워할 거리였으며, 태화의 인지도가 연령을 불문하고 퍼져나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국위선양.
사실 그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맡았을 뿐이고, 그 작품이 잘된, 그저 그런 이야기였으나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겐 그렇지 못했다.
“이렇게 많은 분이 마중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태화는 테이블 앞에 앉아 카메라와 기자들을 살폈다.
KBC, SBC, NBC를 시작으로 다양한 로고가 제 존재를 과시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태화는 도착해서 인터뷰를 해야 한단 이야기를 듣고 ‘히어로즈’ 촬영 중간에 와서 몇몇 기자들을 만났던 것처럼 소규모 회장이 마련될 것이라 예상했다.
영화가 인기 있었다는 말을 들었어도 이미 극장에서 내려 간 지 오래라 그 열기가 한차례 식었을 것이 분명했거니와, 신예 천성효가 ‘직장생활백서’ 이후 촬영한 KBC 드라마로 백종 여우주연상이란 엄청난 일을 벌였다는 걸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저번 방문 때와 거의 비슷한 규몬데?’
그러나 그를 반긴 인파는 상상 이상이었다.
태화는 다른 할리우드 스타들과 홍보차 한국에 왔을 당시를 떠올렸다.
브라이언, 글로리아를 위시한 할리우드 스타들의 방한에 한국은 들썩였다.
특히 주연들이 전원 한국을 찾았다는 건 한국 시장이 그만큼 할리우드에 중요하단 의미였기에, 한국인들은 늘어난 관심에 기뻐했다.
그 안에 한국 배우 이태화가 껴 있다는 것도 그들을 자랑스럽게 만든 한 가지 요소였다.
비록 당시에는 제이 리의 역할밖에 알려지지 않아 과대포장이란 소리를 들었지만 말이다.
“JBCO의 나상현 기자입니다. 지금 미국에서 잃어버린 고리의 인기가 대단한데······.”
질문 대부분은 태화의 미국 내 성적을 칭찬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성적에 대한 감상, 낯선 환경에서의 경험, 친해진 배우······.
그리고 마침내 차기작에 대한 질문이 돌아왔다.
“아직 결정한 차기작은 없습니다만, 다음 작품은 한국에서 이어갈 것 같습니다.”
“WNB의 박무진입니다. 미국에서 인종차별 문제가 심각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특히 잃어버린 고리의 애덤 그레치와······.”
어느 눈치 없는 기자가 예민한 주제를 언급하자 비난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러나 대답이 궁금한 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인지라, 기자를 말리는 대신 고개를 태화에게 돌렸다.
“인종차별······. 미국에서 고작 두 작품을 맡은 제가 논할 주제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작품의 완성에 누군가의 사상은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며, 저는 작품 촬영에 만족스럽게 임했다고 단언합니다.”
단호한 태도로 답하면서 태화는 현규에게 감탄했다.
그의 매니저는 한국에서 인터뷰가 결정된 순간, 예상 질문 리스트와 모범 답변을 태화에게 건넸다.
개중에는 ‘설마 바보도 아니고 이런 질문을 던질까’ 싶은 것도 있었는데, 지금 그런 질문이 무려 3개나 나왔다.
사람이 많이 모인 만큼, 장소 파악,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인간들이 의외로 있던 것이다.
기습적으로 받았다면 할 말을 찾아 헤맸을 수 있었으나 이미 모법 답을 아는 태화는 거침없었다.
“시간상 마지막 질문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KBC의 임휘연입니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 더빙에 참여할 정도로 다양한 외국어에 능통하신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미중일 이외의 국가 작품에도 참여할 계획이 있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