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21
잠시 가늘게 눈을 뜨던 그는 곧 그런 표정을 지운 채 평소처럼 웃었다.
“오, 유라 씨랑 꽤 친한 것 같다?”
그녀가 사라지고 승우는 제법이란 얼굴로 태화를 바라봤다.
숙맥인 동생을 기특해하는 것 같기도, 단순히 놀리는 것 같기도 한 태도였다.
“유라 씨에게 도움을 좀 받아서요.”
“아하.”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태화는 자세한 대답을 피했다.
처음엔 단순한 의심이었으나 이젠 확실했다.
이 사람은 자신을 탐색하고 있었다.
────────────────────────────────────────────────────────────────────────다들 나한테 왜 그래?
지금까지 승우가 한 말들을 돌아보면 대부분 그의 주변의 이야기를 끌어 온 것이었다.
친구가 술 마시고 털어 놨던 가벼운 현황이나 자잘한 해프닝.
그렇게 관찰자의 입장을 취하면서, 승우는 차근차근 태화의 정보를 모았다.
‘······경계하는 건가.’
이렇게 친한 척 다가오는 경우는 처음이라도 태화는 의외로 많은 견제와 경계를 받아 왔다.
회귀 전 장애인 극단에서.
동료들에게 말이다.
그가 있던 극단 배우는 전원 지적 장애나, 뇌에 문제가 있어 장애를 가지게 된 이들로 이뤄져 있었다.
대다수의 배우가 또렷하지 못한 발음, 잘 외워지지 않는 대사, 그리고 섬세하지 못한 표현 등에 콤플렉스를 가졌고, 다리를 제외하면 정상인인 태화를 질투했다.
‘장애인은 무조건 착할 거라니······. 미디어의 폐해지.’
집에서 기르는 개도 요령을 피울 줄 알고 저를 어찌 대하는 줄 아는데 사람이라고 다를까?
지능은 조금 떨어지더라도 그들은 자신의 장애를 방패 삼을 줄 알았다.
‘······그땐 참 곤란했는데.’
처음 태화가 연기를 선보였을 때 일부러 심하게 울거나 싫다고 떼쓰는 이가 있었다.
말로 설명할 순 없어도 자신의 자리가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던 것이리라.
그는 칭얼거림이 통하지 않자 화를 참지 못하고 손발을 사용했다.
다른 사람의 말림에도 그 배우는 제 고집을 부렸다.
사실 사회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의 장애인은 배우를 하기 곤란했지만, 그의 부모가 극단 운영에 많은 후원금을 지불하는 터라 다들 묵과해 왔다.
태화와의 마찰도 결과는 비슷했다.
당시 태화는 ‘우리 착한 애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란 힐책을 들으며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줄곧 살갑게 대한 것으로 배우들과 어느 정도 어울릴 수 있었으나 주연은 잘리기 전에 있던 연극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근데 이 사람은 왜 그러는 거지?’
그는 미소를 지은 채 승우를 슬쩍 훑었다.
떠보고 있는 것은 알았어도 이유는 짐작되지 않았다.
한창 주가를 올리는 스타와 이제 막 방송에 데뷔하는 신인 배우.
딱 봐도 격차가 굉장한데 무시해도 될 인물에게 왜 관심을 갖는 것일까?
말실수하지 않도록 긴장하며 머리를 굴리던 태화의 시선에 들고 있던 대본이 들어왔다.
‘······나 때문에 가람의 분량이 늘고 태양의 분량이 조금 줄었지.’
원래 비중이 바다 5, 태양 3, 가람 1, 기타 1이었다면, 현재의 대본은 바다 4.8, 태양 2.7, 가람 1.,8 기타 0.7 정도로 가람의 대사가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제목이 제목인 만큼 커플 라인이 변경되진 않겠지만 그래도 위기감을 느낀 것이리라.
‘하긴 나라도 다른 사람 때문에 배역이 줄면 말은 못해도 기분은 나쁠 테니까······.’
같은 성별에 나이까지 비슷한 배우이니 느낀 압박감도 클 것이다.
······그렇게 이해하려 해도 친한 척만큼은 거부감이 들었다.
‘그냥 보면 되게 서글서글한데 왜 뱀을 만지는 것 같지.’
소름 돋는 감각에 태화는 결국 다른 핑계를 대며 자리를 피했다.
“가 버렸네.”
승우는 안타깝단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밟거나 괴롭히는 건 실력을 확인한 뒤에 시작해도 늦지 않았으니 정보나 캐며 친해질 요량이었거늘 의외로 눈치가 빨랐다.
‘여자랑 엮는 게 좀 일렀나.’
연예계에선 친하지도 않은 사이에 연애나 호감 등을 묻는 것이 반쯤 금기로 통했다.
어떤 식으로 퍼지고 알려져 연예계 생활을 망가트릴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걸 만난 지 한 시간도 안 된 자신이 물었으니 일단 피하고 본 것이리라.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팬들도 훈훈하게 지켜봐 주지만 아직 서른도 안 된 시점에선 관리하는 게 맞았다.
‘골 빈 애들하곤 무대랑 침대 밖에선 별로 말 섞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할까······.’
잠시 유라를 떠볼까 생각하던 승우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이돌과 합 맞추는 것도 짜증 나는데 카메라 밖에서까지 인사 외의 대화를 나누기 싫었다.
‘나머지는 연기를 보고 결정해야겠네.’
“승우 형, 슬슬 시작할 것 같은데······.”
“그래, 가자.”
매니저의 재촉에 다시 가식적인 웃음을 띤 그는 천천히 촬영장으로 향했다.
강태양의 등장 파트가 꽤 늦게 있는데도 다른 배역들과 비슷한 시간이 온 이유는 전부 ‘박가람’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러니 그의 연기를 망막에 아로새겨야 했다.
***
“여유가 있어도 순서대로 안 찍네요.”
“······죄송해요. 제가 스케줄이 바빠질 예정이라 오늘 4화까지 분량이 가장 많은 집 배경부터 찍는 거예요.”
태화가 1-4부터 장면이 시작되는 것에 의아해하자 유라가 슬그머니 사과를 건넸다.
새턴이 곧 컴백하기 때문에 한 장소에서 현재 나온 장면까지의 영상들을 찍고 다음 장소로 넘어가는 방식을 취하게 됐다.
이동으로 지체되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려는 것이리라.
감정 연결이 툭툭 끊기기 때문에 배우들이 좋아하지 않는 형태였다.
“원래 촬영이라는 게 배우들 사정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거잖아요.”
그는 별거 아니라는 태도로 유라의 사과를 넘겼다.
축복으로 연습하는 내내 장면을 강제로 전환 당했던 태화에겐 크게 상관없는 부분이었다.
태화의 배려에 작게 미소 짓던 그녀는 대본에 집중하고 있는 그를 응시했다.
원래 훈훈한 얼굴이었지만 작정하고 힘을 주자 하승우에게 비빌 수 있을 정도로 눈부셨다.
“······태화 씨, 오늘 되게 멋지세요.”
유라는 승우가 있었을 때 건네지 못했던 칭찬을 입에 담았다.
진정됐던 심장이 다시 팔딱거렸다.
“유라 씨 소개라 그런지 원장님이 힘 줘 주신 것 같아요. 다행이죠.”
태화는 환한 웃음으로 답했다.
그도 처음 거울을 봤을 때 구상했던 ‘박가람’의 이미지가 그대로 비춰지는 것을 보고 놀랐다.
이 정도 실력자를 추천해 준 유라가 고마웠고, 또 설명을 그대로 표현해 준 원장에게도 감사했다.
‘다음에도 또 오라고 한 걸 보면 유라 씨랑 퍽 친한 것 같아.’
단지 그를 화장하는 재미에 빠진 것이었으나 태화는 그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여자가 화장으로 인해 극적으로 변하는 영상이나 사진은 몇 번 봤어도 그는 그것이 남자에게도 적용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연극을 위해 스스로 화장할 땐 절대 그런 모습이 안 나왔으니까.
평균치도 못 되는 자신의 실력과 연극 특유의 과한 화장을 간과한 채 태화는 자신을 화장해 준 아티스트들의 솜씨에 감탄했다.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마침 동선 체크까지 끝낸 PD가 그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유라 씨, 지금 몇 신지 알아요? 유라 씨 때문에 타이트하게 가는 건데 늦으면 안 되죠.”
“죄송합니다.”
“그리고 태화 씨. ······신인이면서 돈이 좀 있나 봅니다?”
아직 준비도 끝나지 않았건만 창식은 5분 지각한 유라를 나무라고 태화를 못마땅한 눈으로 훑었다.
그러나 트집거리를 찾지 못했는지 그는 불퉁한 얼굴로 태화의 과소비를 비꼬았다.
“첫 드라마인 만큼 최대한 이미지를 맞추려 했습니다.”
“됐고. 대본들은 다 외워 왔어요?”
“네.”
“네.”
“그리고······.”
PD는 둘을 깎아내리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행동했다.
애드리브 이후 좀 누그러졌던 태도도 다시 뾰족하게, 아니, 더 날카롭게 변했다.
‘악의를 가진 게 뚜렷이 보이는데······. 촬영 괜찮으려나.’
전체로 보면 작가의 힘이 세지만 현장에서 직접 요구하는 건 PD다.
그만큼 좋은 관계를 만들어 놔야 일정이 편한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미움받은 것 같았다.
태화의 생각대로 창식은 그에게 불만이 많았다.
태화가 붙음으로써 받은 돈의 일부를 토해야 했다는 게 문제였다.
‘연차만 좀 됐어도 그냥 꿀꺽했을 텐데.’
본인의 잘못이었으나 창식은 그 원망을 태화에게 돌렸다.
사실 묵은 원한을 가진 유라보다 이젠 태화가 더 마음에 안 들었다.
‘조금이라도 못하면 몇 번이고 NG를······.’
망신을 주고 연기 실력도 폄하할 수 있다는 기대에 창식은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둘을 보냈다.
태화는 PD의 마지막 미소를 보고 그의 생각을 눈치챘다.
이유는 몰라도 그의 의도대로 따라 줄 마음은 없었다.
‘정말 하나같이 못 잡아먹어 안달이네.’
작게 한숨을 쉬면서도 태화의 입술 끝은 위를 향하고 있었다.
장애를 겪은 후부터, 그의 편은 소수였다.
언제나 악의에 차서 마음에 안 든다는 눈초리로 바라보던 시선들.
그런 이들이 자신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자신을 부정하지 못하게 됐을 때 태화는 묘한 희열을 느꼈다.
‘······꽤 재밌겠어.’
아무것도 지적하지 못한 채 오케이를 외치는 PD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
“유라 씨, 잘 부탁해요? 태화 후배님도. 아까 도너츠가 맛있었는데 어디서 산 거예요?”
“선배님, 말 편하게 하세요.”
“어머, 그래도 돼? 우리 후배님 친절하네.”
세트장 위에 서 있던 상민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녀와 대화하며 태화는 아까부터 느꼈던 이상함의 정체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