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210
태화의 외국어 실력은 외모만큼이나 유명했다.
토박이도 인정한 스코틀랜드식 에든버러 방언 영어.
모두를 감쪽같이 속인 영국식 영어.
한국식 억양이 남은 영어 등.
그는 역할에 맞춰 다양한 영어 발음을 소화했고, 그것은 중국, 일본 수출용 작품을 더빙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원판의 느낌을 그대로 느끼고 싶어 하는 자막 애호가들도 그의 더빙은 인정했으니까.
그의 팬들은 유럽 배우들이 기본 3개 국어를 할 수 있는 것처럼, 태화가 다른 외국어도 능숙할 것이라 믿었다.
“글쎄요. 흥미로운 작품이 있다면 전 언제든 노력할 것입니다.”
태화는 어떠한 것도 확답하지 않았다.
그는 ‘히어로즈’를 통해 정보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았다.
알아도 감탄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은 언제나 즐거웠다.
그러나 퍼즐 한 조각을 숨겨 반전을 노리는 것도 꽤 재미있는 일이었다.
‘중요한 건 관객들이 헤어날 수 없도록 빠트리는 거지.’
연기는 도를 닦는 자기 수양이 아니다.
누군가가 봐줘야만 성립하는 행위 예술.
그렇기에, 태화는 자신을 보는 모든 이들이 관객이 되길 바랐다.
열 명이 있다면 그 열 명 모두가 자신의 연기를 인정하고 시선을 고정할 수밖에 없도록,
그 누구도 아직까지 닿아본 적 없는 경지를 원했다.
“오늘 제 귀국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작품에서도 멋진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형식적인 멘트를 마친 태화가 고개를 숙이자, 카메라의 플래시가 이곳저곳에서 터지며 그의 모습을 밝혔다.
***
한국에 돌아왔으니 집에 가는 것이 맞았으나, 태화는 현규가 모는 차를 타고 개인 연습실로 향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만큼 전달사항이 많았기 때문이다.
청소 업체가 미리 치워둔 터라 몇 개월 동안 비어있던 연습실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일단 서연씨가 전해 준 국내 반응 정리와 제안 들어온 작품들 일부야. 그리고······.”
태화의 행동을 짐작한 탓에, 현규는 차 안에서 대본과 자료를 건네지 않았다.
그는 시차 적응도 제대로 못 한 상태로 오자마자 단체 인터뷰까지 마친 배우가 심적으로 지쳐있다는 걸 태화 본인보다 잘 알았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조차 대본을 주면 쉬지 않고 대본부터 살필 태화임을 잘 알았다.
배우의 행동을 가능한 범위에서 조절하고 돕는 것이 매니저의 역할이었다.
“······이번엔 대중성이 아닌 예술성 쪽으로 초점을 맞추는 게 어떠냐는 이야기가 BGA 내부에서 나왔대.”
BGA는 BAA와 연계하여 한국 내 배우들이 미국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것은 BAA가 BGA의 모기업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당연히 BAA는 배우의 미국 내 활동 정보를 ‘보다 정확하게’ BGA와 공유했다.
태화의 캐스팅 제의도 마찬가지였다.
BAA를 통해 미국 내 업계 관계자들의 여론과 들어오는 작품의 경향, 패턴을 전달받은 그들은 한국으로 돌아온 태화에게 ‘어떤 작품이 차기작으로 베스트인가?’에 대한 회의를 나눴다.
그리고 현재 태화에게 부족한 것은 ‘국제적인 인정’이란 결론을 내렸다.
“단순 예술성이 아니라, 국제 영화제에 출품할만한 작품에 들어가서 상을 타자는 거지.”
“와, 그건 또 굉장한 계획이네요.”
경쟁이 치열한 만큼, 3대 국제 영화제라 불리는 시상식들은 암묵적으로 다중 수상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중 프랑스에서 열리는 시상식은 규정으로 다중 수상을 막을 정도.
즉, 작품이 경쟁 부분에 들어갈 정도의 경쟁력이 있으면서, 대상을 탈 수준엔 못 미쳐야 한단 의미였다.
‘아니면 내가 작품보다 눈에 띄어야 한단 뜻이지. ······흥미롭네.’
사실 작품이 모자랄 필요는 없었다.
수백 개의 출품작에서 고작 20개가 경쟁 부분에 오르고 대부분 근소한 차이로 운명이 갈리니까.
최선을 다해도 타기 힘든 상이 바로 국제 영화상이었다.
“확실히 미국, 아니 국제 시장을 노린다면 그만한 길도 없죠. 근데 노력만 한다고 닿을 목표가 아니라는 건 당연하고······. 상을 위해서 작품을 맡는다는 점도 제 가치관이랑 조금 어긋나네요.”
국제상을 탄다면 그 연기력은 한국을 넘어 세계적인 수준이란 소리가 된다.
게다가 태화는 절대 영어가 부족하다고 말할 수 없는 배우.
다른 동양 배우들처럼 언어적 장벽이나 한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들어오는 역할 폭을 넓히긴 안성맞춤이지.’
동양인이라 확신을 할 수 없다.
아시아인치고는 잘했다.
태화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한계를 정하는 이들에게 자신을 알려주고 싶었다.
“물론 거절할 생각은 없지만요. 그냥 말만 전하는 건 아니겠죠?”
“응. 네 연기력은 이미 잘 알려졌으니까. 그걸 바탕으로 BGA가 예술 영화계에 소문을 퍼트렸거든. ‘이미 미국까지 진출한 이태화의 다음 목표는 국제 영화제다’라고. 덕분에 꽤 많은 작품이 의사를 물어왔어.”
톱의 위치에 선 배우들은 전성기를 지나고 있을 때 예술에 치중한 작품을 거의 맡지 않았다.
안정과 도전의 문제였다.
대중을 목표로 잡는 상업 영화는 그들에게 거대한 출연료와 수익을 약속한다.
그러나 예술과 의미에 중점을 두는 예술 영화는 시상을 하지 못하면 그 해의 커리어를 날리는 결과를 낳는다.
흥행에 중점을 두는 영화가 아니니 성적으로 치지는 않지만 소비된 시간의 가치를 반대에 두면 마이너스.
나중에 할 수 있는 일을 위해 현재를 낭비하지 않는 것은 매년 수많은 상품이 쏟아지는 시장에서 당연한 선택이었다.
“일단 고르고 고른 게 이 두 가지래.”
태화는 건네진 두 개의 뭉치를 받았다.
‘히어로즈’ 때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얇은 대본들엔 각각 ‘야누스의 시선’과 ‘Et in arcadia ego’란 글자가 인쇄되어 있었다.
“······제목들이 참 접근성 없네요.”
“이 바닥이 제목에 많은 의미를 담으려 하다 보니까 좀······.”
심하다는 자각이 있었는지, 현규는 어색하기 웃으며 변명 아닌 변명을 뱉었다.
예술 영화의 경우 세계 명작이나 조각, 그림을 모티브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단한 작품의 주체와 의식을 영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예술적 인지도를 등에 업는, 일종의 처세였다.
태화는 두 작품을 차례차례 확인했다.
한 남자의 치정 살인, 그리고 반전을 담은 ‘야누스’.
장례식을 돌며 시체를 돌보는 장의사의 이야기 ‘아르카디아’.
완성도는 각각 4.0과 4.5로 ‘아르카디아’ 쪽이 약간 높았다.
‘하지만 끌리는 건 야누스란 말이지.’
태화는 ‘야누스’ 대본의 마지막 장은 펼쳤다.
[제발 절 죽여주세요.]
주인공의 그 한 마디가 상당히 인상 깊었다.
“아르카디아를 쓴 감독분이 후보 경력이 있다고 했죠?”
“어. 베니스 쪽에서 두 번 후보로 올랐어. 그래서 좀 더 가능성이······.”
“아뇨. 전 야누스가 좋아요. 이쪽 감독분을 한번 만나고 싶네요.”
의아해하는 현규에게 ‘아르카디아’의 대본을 돌려주며 태화는 웃었다.
아르카디아의 대본은 아름답다. 죽음을 다루는 자세도 여러 번 시상식의 입맛을 맞췄던 사람답게 노련했다.
그러나 영화는 어떤 배우가 맡아도 ‘아름다운 영상’이 빛날 뿐인, 그런 작품이었다.
‘반대로 야누스는 배우가 중요하지.’
스토리와 엔딩만을 볼 때 둘 다 태화의 취향과 거리가 멀었다.
상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면 둘 작품 모두 고사했으리라.
그런 와중에 주인공의 모습이, 그가 ‘야누스’를 택하게 하였다.
“다른 작품도 보고 결정하는 편이 낫지 않아?”
“물론 볼 거예요. 그래도 지금은 다른 예술 영화보다 이쪽을 고를 것 같네요.”
이상적인 인물을 연기함으로써 작품의 정점을 찍는다.
천생 배우인 태화는 자신의 자리를 마련해 둔 극본 쪽으로 정신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끝
ⓒ 마늘소금
‘야누스’의 주인공 서세현은 어린 시절 가정 폭력에 시달렸다.
그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자신의 아내를 때리는 것으로 화를 푸는 졸렬한 인간이었다.
많은 소설과 가상의 이야기에선 그런 폭력적인 가장을 두더라도 어머니는 끝까지 아이를 사랑한다.
그러나 세현의 어머니는 그러지 못했다.
그녀는 겁이 많았고, 부당한 폭력이 지긋지긋했다.
그래서 어느 날 밤, 그녀는 여섯 살 난 세현을 버린 채 집에서 도망쳤다.
혐오하는 남자의 핏줄이자 족쇄가 될지 모를 아이를 버린 것이다.
어머니란 방패막이가 사라지자 폭력은 어린 세현을 향했다.
아비란 인간은 정도를 모르는 인간이었고, 세현은 점점 구석으로 몰렸다.
그때 등장하는 것이 그의 형제이자 반쪽인 ‘서세연’이었다.
세연은 세현을 끔찍이 사랑했다.
그가 받지 못했던 모든 사랑을 주었고, 그를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려 들었다.
그녀에게 세현의 아버지는 ‘적’일 뿐이었다.
죽여도 괜찮을 적.
아니, 세현을 보호하기 위해선 반드시 죽여야 하는 적.
때문에 세연은 자고 있는 남자를 살해했다.
고작 일곱 살짜리에게 무슨 힘이 있으련만, 목적을 가진 인간은 무서웠다.
반쪽의 계획을 몰랐던 세현은 자신에게 일어난 참상에 한계까지 몰리고 결국 아버지의 죽음과 세연의 존재를 잊어버린다.
사건을 담당한 경찰은 범인으로 세현을 의심했지만, 형법상 죄를 물을 수 없는 너무나 어린 나이인지라 모든 것을 잊은 그를 더 이상 건드리지 않는다.
그렇게 혼자가 된 아이는 고아원을 통해 어느 마음씨 좋은 부부에게 입양된다.
부부는 사랑으로 세현을 길렀고, 불안정했던 세현은 점차 안정을 찾았다.
‘이 과거가 없다면 그저 유약하고 착한 청년일 뿐이었을 텐데.’
태화는 후반부 밝혀지는 세현의 과거를 다시 한번 읽고 다시 첫 번째 장으로 돌아갔다.
첫 장면에서 세현은 정말 행복하게 웃는다.
비록 불우한 시절이 있었지만, 그의 양부모는 진심으로 그를 사랑했고 교우 관계도 인생도 평탄하게 흘러갔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에겐 두 달 뒤 결혼을 약속한 피앙세도 있었다.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는 양부모, 신뢰할 수 있는 친구, 상냥하고 평안을 주는 약혼자까지.
힘든 과거를 넘어선 그는 보상이라도 받듯 상냥한 세계로 편입된다.
좋은 환경 속에서 세현은 양부모에게 ‘자신의 힘들었던 과거는 두 분을 만나기 위해서였다’라고 말할 줄 아는 청년으로 성장했다.
번듯하게 자란, 착하고 상냥한 서세현.
그러나 그의 불행은 자신을 맹목적으로 사랑하고 지켜줬던 ‘반쪽’이 여전히 존재했다는 사실에서 시작됐다.
그 반쪽이 비틀림 속에서 태어난 괴물이었다는 게, 그의 미래가 망가진 이유였으리라.
서세연.
그녀는 서세현의 속에 잠들어 있던 또 다른 자아였으며, 자신이 세현의 보호자이자 형제, 연인이라 생각하는 인격이었다.
‘이중인격이라······. 게다가 다른 인격이 여성이라는 점이 흥미롭지.’
극의 결말은 씁쓸하다.
자신이 세 명의 여성을 죽였다는 걸 인정한 서세현과 달리, 법원은 심신미약을 고려해 그에게 감형을 내리고 병원에 수감한다.
그런 결과 뒤엔 ‘서세현을 불쌍하게 여긴’ 인권단체가 있었고.
‘대중의 시선을 이기지 못한’ 판사가 위치했으며.
‘서세현이 고통받길 원하는’ 피해자의 부모가 존재했다.
그렇게 갇힌 세현이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제발 죽여 달라 외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흥행하기 힘든 엔딩이야······. 하긴, 식견이 나타내는 흥행성도 고작 2.0이었으니.’
자신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상대가 죽었다면 누구의 잘못일까.
그 살인마가 자신의 또 다른 인격이라면 그 죄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처벌받길 원하는 피해자를 처벌하는 것은 올바른 일일까.
재미나 단순 콘텐츠 소비보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태화야, 나갈 시간이야.”
“네.”
차에 앉아 대본을 읽던 태화는 현규의 부름에 읽고 있던 것을 덮고 차 문을 밀었다.
기다리던 ‘우리 사이느은’의 스텝이 태화의 얼굴을 보자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섰다.
“안녕하세요, 이태화 배우님. 오늘 촬영하실 우사에 대해서 추가 설명해 드리려 왔습니다. 먼저······.”
태화는 스텝의 설명에 귀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