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216
이번 한 번으로 입상하면 물론 좋겠지만, 사실 태화는 그러지 못할 가능성도 충분히 염두하고 있었다.
한국이 아닌 국제 시장의 입맛을 맞추는 일인 데다 이번 영화 감독도 그 정도의 실력이 되는지 불확실했으니까.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를 고른 것도, 상업을 목적으로 하는 영화와 얼마나 다른지 체감하기 위함이 컸다.
“일단 받는 걸 상정하고 스케줄을 짜야지. 그래야 일정에 차질이 없어.”
‘히어로즈’가 개봉하고 화제의 인물이 되었을 당시, 태화는 ‘잃어버린 고리’에 집중해야 한다며 대부분의 토크 쇼나 인터뷰 촬영을 거절했다.
작품에 참여 도중 전작과 관련된 일을 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태화가 직접적으로 싫다 말한 적은 없었지만 BGA와 현규는 은연중 드러나는 그의 성향을 읽고 최대한 그에 맞춰 일정을 조절했다.
“하지만 출품 예정이 2월인지 5월인지도 확실하지 않잖아요?”
국제 영화제는 각각 2월, 5월, 그리고 9월에 열렸다.
한국어로 출품하더라도 자막은 필수이기에 아마도 시기는 5월.
그러나 촬영과 개봉 예정일 사이 간격이 짧은 만큼,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는 예측 불가였다.
“그 부분은 이미 상의 끝났어. 5월을 노리고 파리에서도 개봉할 거래.”
5월, 칸에서 열리는 프랑스 영화제의 경우 프랑스의 극장에서 1회 이상 상영한 영화들에게만 출품을 허락했다.
출품을 목적으로 하는 해외 작품들만 상영하는 영화관이 따로 있을 정도.
사실 상당히 빠듯한 일정이었지만, BGA는 사력을 다해 태화를 서포트했다.
“그래도 5월이면 저한텐 넉넉하네요.”
“사실 그래서 말인데······. 난 이쪽이 괜찮다고 생각하거든?”
거기까지 말한 현규는 자신이 들고 있던 서류뭉치 중 하나를 꺼내 태화에게 건넸다.
맨 앞장에 쓰인 글을 읽은 태화의 눈빛이 흔들렸다.
‘정조(正祖):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란 글씨가 단정하게 표지를 물들이고 있었다.
“이거 설마······.”
“응. 사극이야. 그것도 요새 유행하는 퓨전이 아니라 정통 사극.”
현규가 내민 대본은 정조의 생을 다룬 영화였다.
끝
ⓒ 마늘소금
태화는 연애나 코미디 계열의 퓨전 사극이면 모를까, 정통 사극 제의가 올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황금 사과와 동안의 효과로 얼굴이 상당히 어려 보이는 데다 서양인으로 변신했었던 만큼 ‘서구적인 외모’란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특히 사극 분야는 ‘사극 배우’라는 말이 따로 있을 정도로 색채가 짙은 곳이라 퓨전이 아니고선 신인 배우들이 유입되기 어려웠다.
“현규형.”
“응?”
“······이게 정통 사극이라고요?”
대본을 펼쳐본 태화는 황당함이 섞인 얼굴로 현규를 응시했다.
‘경들은 공부도 하지 않는 모양인가 보오? 신하된 이들이 짐보다 몰라서야, 쯧쯧’이라고 핀잔을 주거나, ‘예로부터 술에 취하게 하여 덕을 살핀다 하였으니 오늘 취하지 않고 돌아갈 생각인들 마시오’라는 강권이 쏙쏙 눈에 박혔다.
진심을 말하면, 말투만 하오체일 뿐 하는 행동과 말의 내용은 전혀 왕답지 않았다.
“아······, 그게 여러 사료가 모이면서 정조에 대한 해석이 반전됐거든. 이번 영화가 나온 계기도 그거고.”
사도 세자를 시작으로 정조의 주변엔 ‘내가 이 구역의 인기 스타! 팔로우 미!’를 외치는 인사가 많았다.
그들에 비하면 ‘할아버지에게 사랑받고 똑똑하고 치세에 힘쓴 현명한 왕’이란 정조의 캐릭터는 너무 밋밋했다.
시험에 나올 정도로 눈에 띄는 업적도 그다지 없었고, 장수(長壽)로 유명한 영조와 홍경래의 난 등 굵직한 사건으로 다사다난했던 순조 사이에 끼어 큰 빛을 못 봤다.
똑똑하고 현명한 왕의 포지션에 세종이 버티고 있었다는 것 또한 그의 공기화에 한몫을 했다.
때문에 일정 시기 전까지, 정조의 인지도는 ‘사도세자의 아들’, ‘탕평책’이 거의 전부였다.
“자료요?”
“응. 편지 300장이 발견되면서 상당히 욕 잘하는 왕으로 유명해졌거든.”
“······진짜요?”
“입이 험했다나 봐.”
물론 정조의 인기가 높았던 적도 있었다.
모 소설의 영향으로 정조에게 ‘암살위협에 시달리며 개혁을 부르짖다 죽은 안타까운 군주’란 이미지가 덥히면서다.
영화와 드라마는 인지도가 높아진 ‘위협받다 요절한 개혁 군주’의 캐릭터를 그대로 가져다 썼다.
그리고 새로운 해석 없이, 단물이 빠질 때까지 씹히다 버려졌다.
그렇게 시들해졌을 때 등장한 것이 바로 정조가 심환지와 나눴던 편지였다.
300여 통의 편지는 정조가 친한 이에게 보인 언행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것은 그가 대외적으로 보였던 문체와 서체를 제한하고 유교만이 옳다라 외친 엄격한 태도와 상당히 달랐다.
지성인이라면 한문으로 적는 것이 상식이었던 시대에 한글을 섞어 쓰지 않나, 구어체와 비속어도 자유자재로 사용했고 신하에 대해 ‘경박하고 어지러워 동서도 분간 못 하는 놈’이라 평하는 등 파격적인 모습이 돋보였다.
“······재미있을 것 같긴 하네요.”
대본을 흩은 태화는 가벼운 감상을 내뱉었다.
‘정조’는 현규가 설명한 정조의 이미지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갔다.
그의 다혈질조차 신하들을 기만하기 위한 술책으로 포장한 것이다.
‘욱하는 성정이 있어 화가 나면 욕과 성질을 참지 못하는 군주’와 ‘신하들을 교묘히 조종해 제 뜻을 이루는 능구렁이 군주’ 사이, 어딘가에 있는 교차점.
학창 시절 국사 수업시간 배운 것이 전부인 탓에 딱딱한 교과서 속 인물밖에 알지 못한 태화에게, 대본으로 확인한 정조의 모습은 흥미로웠다.
“단지 배경이 정조 23년이면 나이가 꽤 많을 것 같은데······.”
자막으로 처리될 ‘정조 23년’이란 글자를 확인하고 태화는 의아함을 드러냈다.
시험을 위해 적당히 공부했던 그는 정조가 언제 즉위했고 언제 사망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정보가 없어도, 조선 시대 왕들이 대부분 성인이 넘어 즉위했으며 23년간 국가를 다스렸다면 적은 나이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역할이 40대 후반이긴 하지. 물론 현대 이미지에 맞출 테니 노인 분장까진 가지 않을 것 같아.”
“와, 40대 후반이라.”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배우가 맡기엔 지나치게 나이 차이가 난다.
태화의 외견이 본 나이보다 어려 보인다는 점까지 겹쳐지면 주인공인 정조와 어울리지 않았다.
“끌리긴 해도 저보다 백준추 선배님이 어울릴 거 같은데요?”
태화는 왕 전문 배우로 유명한 백준추를 언급했다.
실제 나이가 50이 넘어가는 그는 조금만 다듬으면 3, 40대로 보이는 동안의 소유자로, 외모에서부터 귀티가 흐른다 하여 사극에서 대장군, 여러 왕 역할을 소화한 배우였다.
“사실 감독이 강력히 네가 맡기를 요청했대. 네가 대청제국에서 연기하는 것을 보고 충분히 가능할 거라 주장했다더라.”
예전과 달리 특수 분장과 CG를 통해 겉으로 보이는 나이를 속일 수 있게 되었음에도 배우들이 자신의 나잇대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은, 나이를 맞추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연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특히 맡은 배역과 나이 차이가 너무 크면 배역의 감정에 제대로 공감을 하지 못하고 소위 ‘발연기’라 불리는 엉망인 모습을 보이기 쉬웠다.
그것은 명배우라 불리는 이들도 마찬가지였으며 대부분의 배우는 자신의 나잇대에 맞는 역할을 골랐다.
물론 나이를 바꾸는 건 특수 분장에 속했기 때문에 비용절감 측면도 없지는 않았다.
그런 암묵적인 관례를 깬다는 건 감독이 여간 태화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고서는 힘든 일이었다.
“대청제국이면 상당히 오래전이네요······. 게다가 카메오로 잠깐 나온 걸 눈여겨본 감독이 있을 줄은······. 꽤 당황스러운데요.”
당황이라 말하긴 했어도 태화는 그리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런 단편적인 역할을 인상 깊게 봐줬다는 것이 기뻤다.
“지금은 종영했어도 한 때 인기작이었으니까.”
‘대청제국’은 상당한 자본을 투자하고, 내로라하는 중국 배우들이 참여해 완성한 드라마였다.
한국에선 인지도가 낮았으나 중국부터 동남아시아까지 여러 국가에서 두루 인기가 있었다.
‘정조’를 기획한 임승찬 감독도 ‘대청제국’의 애청자로, 그는 외국어에 능하고 어떤 나잇대의 연기도 소화하는 태화를 눈여겨봐 왔다.
그리고 시기가 무르익었다 느꼈을 때 태화에게 손을 내밀었다.
누군가에겐 뜬금없다 할 수 있는 캐스팅이어도 승찬 감독의 입장에선 꽤 열심히 쌓아온 탑이었다.
“촬영 예정 기간은 사극치고 짧네요?”
“응. 일단 막후 정치로 정국을 조종해서 화완 옹주 복권을 이뤄내는 내용을 다루다 보니 장소가 한정되어 있잖아. 외부 촬영도 앞마당을 거니는 정도가 전부라 시간 걸릴 일이 없고.”
일반적인 사극은 촬영 기간이 7개월을 넘는 경우가 허다했다.
사극이란 장르상 스케일이 커지기 마련이고 스케일이 커지면 그만큼 필요한 소품과 장소, 배우들이 많아지기에 기간도 함께 연장됐다.
그러나 ‘정조’의 경우 신료들과 설전을 벌이는 편전과 왕의 침전, 그리고 각 신하의 거처가 주요 무대였기에 장소의 제약이 적었다.
당연히 배우들만 실수 없이 잘한다면 기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미 장소 섭외부터 기본 준비는 상당 부분 끝난 상태고 대본도 이중 고증을 거쳐 10월 안에 최종 수정본이 나올 예정이라 하니 너한테 적당하지.”
“그건 그러네요.”
배우 캐스팅이 완료되면 바로 크랭크인을 할 수 있는 형태.
상대적으로 짧게 잡힌 촬영 기간.
‘야누스’의 홍보가 최소한으로 진행될 것까지 고려하면 5월 안에 거의 모든 일정을 끝내두려는 태화에게 꼭 맞았다.
“지금 바로 결정할 필요는 없을 테니 일단은 마음속에 염두에 두고 현재 영화에 집중할게요.”
“그래. 지금 알린 건 중간보고일 뿐이니까.”
현규와 BGA는 자신들이 보조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항상 명심했다.
그리고 언제나 태화의 의견을 존중해왔다.
이번에 미리 차기작 후보작에 대해 알린 것도 중간보고 겸 조언이었으리라.
그것을 알기에 태화는 ‘정조’에 대한 이야기를 한 구석에 밀어 두고 다시 내일 있을 촬영 연습에 집중했다.
***
서세현은 숨을 헐떡였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과거’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서세연······.”
그는 비틀거리며 먼지가 묻은 벽에 몸을 기댔다······.
세현은 ‘스토커’가 남긴 족적을 따라 자신이 과거 아버지와 살았던 집으로 향했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그는 원인 모를 두통에 시달렸다.
아이의 웃음소리로 추정되는 환청과 다 해진 옷을 입은 왜소한 두 아이의 환영이 그를 여러 번 스쳐 가며 괴롭혔다.
그렇게 머리를 짚어가며 도착한 기억 속의 집은 이미 폐가로 변해있었다.
동네 주민의 말에 따르면 아주 예전에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흉흉한 일이 연달아 발생하면서 그대로 방치되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폐가가 된 덕분에, 세현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비어있는 판잣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가 대문을 넘어 방에 발을 디뎠을 때.
곳곳에 남아 있는 선명한 과거가 세현을 과거에 빠트렸다.
-세현아 내가 지켜줄게.
-안돼요! 세현이 때리지 마요!
-그러니까 세현이 괴롭히지 말랬잖아.
그곳에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언제나 세현을 돌봐줬고, 폭력으로부터 감싸려 했고, 종국엔 그의 아버지까지 죽였다.
“거짓말이야······.”
세현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싶었지만 두 아이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환영임이 분명한데도, 울고 있는 남자아이 옆에 있던 여자아이가 타박타박 세현을 향해 다가왔다.
-네가 사라지라고 말해도 난 널 지킬 거야.
아이가 웃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영상이 재구성됐다.
그곳엔 여자아이가 아닌 세현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하고 있었다.
계단을 뛰듯이 올라갈 때도.
친아버지의 매질은 견딜 때도.
자는 아버지를 죽일 때도.
언제나 세현밖에 없었다.
“그럴 리 없어······.”
세현은 힘을 잃고 주저앉았다.
유년 시절의 기억으로 끝나면 좋았으련만, 또 다른 기억이 해일처럼 그를 덮쳤다.
울면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선영과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직장 동료, 그리고 동문 후배의 모습이 하나둘 떠올랐다.
“그럴 리가 없어어······.”
그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세 여성의 죽음을 파헤치기 위해 세현은 직장까지 그만두고 살인마를 추적했다.
그러나 마지막에 도달한 범인은, 그 자신이었다.
“아아······. 아아악-!!”
세현은 짐승처럼 언어가 되지 못한 비명을 질렀다.
그 안엔 깊은 절망이 스며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