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218
이젠 익숙해진 제단이 그를 반겼다.
‘구속복은 진짜 답답해.’
태화는 한동안 조여져 있던 팔을 이리저리 풀었다.
통증이나 저릿한 느낌이 남지 않았는데도 정신적으로 피곤했다.
***
현실로 돌아오자마자 태화는 목을 풀고 발성 연습에 들어갔다.
사극에 도전하게 된 터라, 그는 최근 깊은 목소리를 자연스럽게 내기 위한 연습도 스케줄에 추가했다.
본격적인 연습은 크랭크업 이후 하더라도, 기본은 닦아둬야 일정에 차질이 없기 때문이다.
목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중간중간 휴식을 취할 때마다 태화는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확인했다.
“태화야······. 아, 아직 남았어? 미안.”
“아, 괜찮아요. 좀 안 되는 부분이 있어서 반복 중이었거든요. 무슨 일이에요?”
태화는 헤드폰을 빼며 현규를 바라봤다.
일정을 다 외고 있는 그는 되도록 태화의 연습 시간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리고 만나야 할 일이 생겨도 조금 넉넉하게 연습실을 찾았다.
이런 식으로 태화가 추가 연습을 한다는 걸 알아서다.
그렇기에 오늘따라 시간에 딱 맞춰 찾아온 이유가 궁금했다.
“너 11월에 잠시 대만에 가야할 것 같아.”
붉게 물든 뺨은 분명 차가워진 바람에 베어 그리된 것이련만, 그 안에는 기쁨이 서려 있었다.
“대만에요?”
“응. 괴물이······.”
잠시 마른 침을 삼킨 현규는 말을 이었다.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 경쟁 부문에 올라갔대.”
예상치 못한 국제 시상 소식이었다.
끝
ⓒ 마늘소금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위치한 국가들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영화제였다.
과거 동남아시아 영화제, 아시아 영화제란 명칭을 지니기도 했었으나, 러시아 및 태평양에 위치한 국가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란 이름으로 굳어졌다.
참가국은 한중일을 포함한 22개국.
3대 영화제처럼 경쟁 부문과 비경쟁 부문이 나눠져 있으며 축제인 동시에 프리미어 12처럼 국가 대항전의 분위기를 띠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해지진 못했어도 속한 국가들에게는 나름 자존심을 건 경쟁이었다.
특히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남우, 여우주연상의 경우 기타 시상식들과 마찬가지로 상당한 관심을 받았다.
“물론 여기서 입상하게 되더라도 국제적인 인지도는 그리 올라가지 않을 거야. 일단 넌 이미 아시아 쪽에서 이름 있는 배우니까.”
아시아 활동 기록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태화는 아시아의 영화, 드라마 팬들 사이에서 유명한 축에 속했다.
‘겨울나기’, ‘구미호’ 등 다양한 작품에서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 구매자들의 입맛을 골고루 맞춘 데다, 본인의 배역 더빙을 도맡아 연기하면서 해외 팬들이 가지는 자막과 더빙 사이의 딜레마를 100퍼센트 만족시켜 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거기에 상을 추가해 봤자 ‘역시 이태화’라는 감탄 이외에 나올 말이 없었다.
“그래도 해외 수상 경력은 해외라는 것 자체로 중요해.”
현규는 태화가 수상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태화는 자신이 참여한 작품과 역할에 집중하는 배우였다.
그리고 권위 높은 심사 위원들에게 인정받기보다 대중의 시선에 더 가치를 두는 인물이었다.
그런 태화를 알기에, 현규는 좀 더 열성적으로 그를 설득했다.
아니, 다른 부분까지 공략해 가며 참석의 중요성을 열변했다.
“그리고 일단 국제 영화제에 걸맞게 각 국가의 영화들이 상영되니까 그걸 다 관람할 수 있잖아?”
창룡제가 영화제라 불리긴 해도 실질적으로는 시상식에 가까웠다.
때문에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는 태화에게 온 첫 국제 영화 행사였다.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아도 참석할 생각이에요.”
태화는 현규의 행동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아차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딱히 작품 활동에 들어간 것도 아닌데, 시상에 별 관심이 없다는 이유로 참석을 거부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게다가 말레이시아나 베트남 영화는 보기 힘드니까요. 꽤 재미있는 일정이 될 거 같네요.”
거기까지 말한 태화는 더 전달할 소식이 있는지 확인한 뒤 내일 있을 영화 포스터 촬영을 위해 서둘러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
└배우님, 드라마 잘 봤습니다ㅠ 데릭 죽는 거 보고 울었어요ㅠㅠ
└잘 봤습니다ㅠ 미국 반응 보고 각오는 했지만ㅠ
└▶◀데릭에게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ㅠㅠㅠㅠ 으앙, 배우님이 맡으신 역할 중 제 마음속 최애였는데ㅠㅠ 그래도 끝까지 멋있었어요ㅠ
└야누스의 시선은 왜 공식 소식이 없나요? 무슨 영화가 제대로 된 홍보도 안 해요? 제작사 진짜 마음에 안 드네.
나래는 공식 계정에 올라오는 팬들의 댓글을 읽었다.
대부분 데릭의 죽음을 애도하는 내용이었고, ‘야누스’에 대한 불만도 적지 않았다.
데릭의 죽음이 방영된 날, 웨버의 실시간 검색어 1위는 ‘데릭 사망’이 차지했다.
그 뒤를 이어 ‘잃어버린 고리’, ‘이태화’가 각각 2, 3위를 차지했고, 끝자락인 10위엔 ‘야누스의 시선’이 자리했다.
그러나 정작 주목을 받은 ‘야누스’에 대한 이야기는 부실하기 그지없었다.
감독이 홍보에 쓸 비용마저 카메라 대여에 사용한 탓에 저예산 치고 넉넉한 편이었던 자금 운용이 독립 영화만큼이나 빠듯했기 때문이다.
결국 조회 수를 노리고 ‘야누스’란 제목을 쓴 3류 연예 기사들은, 촬영 중인 배우들의 이름이나 배우들의 SNS 사진 몇 장을 올리기만 할 뿐, 정작 줄거리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그다지 없었다.
속 빈 강정 같은 기사에 팬들은 태화의 공식 계정으로 달려왔다.
기석이 SNS 홍보에 익숙하지 않다며 따로 영화 관련 소통 창구조차 마련해 두지 않아서다.
당연히 태화의 공식 계정은 데릭에 대한 댓글, 영화 소식을 묻는 댓글, 제작사를 욕하는 댓글 등 여러 댓글이 난무해 혼잡해졌다.
댓글이 과열되자 현규는 마레드 팬 카페를 통해 영화 관련 소식을 일부 풀어놓아 팬들의 시선을 돌렸다.
그 행동은 퍽 성공적이라서, 곧 마레드 내부에 ‘야누스’ 관련 공식 게시판이 생성됐다.
또한 한 바탕 난리가 난 덕에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도 ‘이태화가 이번에 야누스란 영화를 찍는다며? 언제 개봉한대?’ 정도의 인지도가 생겼다.
“진짜······. 이번 감독, 일 처리 마음에 안 드네.”
“뭐, 태화에게 좀 밀어 두는 느낌이 크지. 자, 여기 커피.”
“고마워.”
큰물에서 놀아 보지 못한 이는 큰 기회가 오더라도 그것을 온전히 잡지 못한 채 제 크기에 맞춰 기회를 재단한다.
소규모 자본밖에 굴려 본 적 없는 기석도 그것은 마찬가지였으며, BGA 측 편집자를 받아들인 이후엔 은근슬쩍 태화에게 많은 부분을 부탁하려 들었다.
작품 내적인 부분이면 모를까, 거기까지 해 줄 의리도, 이유도 없던 BGA와 현규는 홍보의 일부를 떠넘기려는 감독의 태도를 무시했다.
“그래도 오빠, 오늘 찍을 포스터는 올릴 거지?”
“그건 올려야지.”
영화의 포스터는 태화의 필모그래피에도 사용된다.
이미 오늘 완성될 포스터를 바로 공식 계정에 올린다고 감독에게 이야기하였고, 기석도 영화 홍보에 도움될 일을 당연히 막지 않았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나눠요?”
“아, 네 포스터 말이야. 오늘 나온다고 하니 받자마자 공계에 올리려고.”
“······CG 처리도 해야 할 텐데 오늘 안에 나올까요?”
촬영 러프를 받았던 태화는 미묘한 얼굴로 물었다.
상업성을 노린 영화가 아닌지라 주요 인물 개개인의 브로마이드형 포스터는 제작되지 않는다.
대신 서세현의 이중인격을 암시하기 위해 ‘서세연’을 등장시켰다.
쉽게 말하면, 태화의 여장 모습을 정면에 내세웠다는 의미다.
포스터의 메인 콘셉트는 ‘살로메’.
성경에 나오는 여성으로 춤의 보답으로 무엇을 원하냐는 왕의 질문에 세례자 요한의 목을 달라고 말하는 이였다.
연극에서는 살로메가 자신을 혐오하는 요한과 입을 맞추고 싶어, 그의 머리를 요구했다는 스토리로 흘러갔다.
포스터 또한 그 이야기를 최대한 반영해 눈 감긴 세현의 머리를 세연이 사랑스럽게 감싸 안은 장면으로 갈 예정이었다.
‘물론 진짜 잘린 처리는 안 하지만.’
심의도 생각해야 하기에 검은색 의상을 입은 상체도 분명하게 나온다.
그러나 배경이 검기에, 언뜻 보면 머리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가 이번 포스터의 포인트였다.
“자, 가발망 쓰자.”
“······근데 누나, 사람들이 제가 여장한 거 알아보지 않을까요? 이건 아닌 거 같은데.”
“걱정 마. 그걸 위해서 오늘 화장은 좀 방향을 바꿔 볼 거니까.”
세현의 목을 들고 있는 여성이 여장한 태화라는 사실은, 후일 ‘그래서 포스터에 나온 여자는 누구야?’란 의문이 돌 때쯤 밝힐 계획이었다.
따라서 나래는 오늘 자신의 실력을 최대로 발휘해 태화를 꾸미려 했다.
“일단 입술은 영화에 나왔던 붉은 색으로 갈 거고 눈을 강조하기 위해서 청순보다는 진한 화장으로······.”
나래의 말을 전부 이해하지 못한 태화는 그냥 그녀가 하라는 대로 눈을 감고 턱을 올리고 뺨을 보였다.
평소보다 배는 많은 붓질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
“좋아. 이제 가발 쓰고 머리만 세팅하자.”
“······와, 누나 솜씨는 정말 대단하네요.”
슬쩍 눈을 뜬 태화는 변한 자신의 얼굴을 보고 감탄했다.
아이돌들이 눈매 강조를 위해 즐겨 사용하는 스모키 화장이 눈가를 장식했고, 한 톤 밝은 색상이 그의 피부를 덮었으며, 붉은색 입술이 대미를 장식했다.
“근데 여전히 얼굴형이 좀······?”
“걱정 마. 그걸 위한 가발이니까.”
마지막으로, 태화가 걱정했던 남성 특유의 윤곽은 긴 생머리 가발에 의해 가려졌다.
남성적인 부분이 모습을 감추자 조금 건장하고 강한 인상의 여성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좋아. 얼굴 이외 나머지는 CG가 해 줄 거야.”
“근데 외모도 약간 수정해 준다고 하지 않았어요? 이렇게 힘줄 필요는 없었을······.”
“그게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네 얼굴에 수정을 가할 수 있는 건 화장품과 조명뿐이야.”
그녀는 자존심 상한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네 얼굴에 CG 댈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단호히 말했다.
감량 예정이 없었기에 태화의 몸은 누가 봐도 남성의 것인 실루엣을 드러냈다.
때문에 스튜디오 측은 여장한 태화의 모습을 CG로 수정해 포스터를 완성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발달한 어깨를 좁히고, 역삼각의 상체도 크기를 줄이고, 얼굴도 갸름하게 수정해 여성미를 드러내려 한 것이다.
물론 마지막 얼굴에 대한 수정안을 참을 수 없었기에 나래는 칼을 갈고 태화를 꾸몄다.
“이태화 배우님, 준비······. 이태화 배우님······?”
“네.”
“어우 씨, 깜······. 아, 죄송합니다.”
여자의 모습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튀어나오자 무의식중에 ‘어우 씨’를 중얼거렸던 스텝이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건넸다.
“그게 진짜 괴리감이 심해서······. 근데 따로 얼굴 고칠 필요가 없겠어요. 대단하네요.”
혹시나 질책을 당하고 항의가 들어오면 말단인 그의 목은 가을 낙엽처럼 떨어진다.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 스텝은 쩔쩔매며 태화의 얼굴, 아니, 화장을 칭찬했다.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자신도 처음 눈을 떴을 때 놀랐었기에, 태화는 스텝의 실수를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스튜디오로 향했다.
└잠깐. 이거 배우님 원탑 영화 아니었어요? 이 여성분 누구죠?
└웨버 영화에서 여자 출연진들 다 찾아서 확인했는데 안 나와요; 시크릿 맴버인 듯;
└근데 존예. 와 저렇게 섹시한 배우가 있었으면 모를 리가 없는데 누구지@_@? 신인인가요?
그리고 다음 날.
스튜디오의 인력을 갈아 넣어 만 30시간 만에 완성된 포스터가 태화의 공식 계정을 통해 첫 선을 보였다.
필모그래피조차 찾을 수 없는 묘령의 여배우.
몸매를 CG로 수정했기에 사람들은 ‘그녀’가 태화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세잔의 향수 광고마저 알아차렸던 팬들조차 가냘픈 몸매를 지닌 여성이 설마 여장한 태화라곤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진짜 못 알아보네요.”
“내가 안 들킬 거랬잖아.”
그리고 그런 댓글들의 상태를 관찰하던 태화는 여장한 모습이 들키지 않아 다행이라 여기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영화 속이면 모를까, 포스터에 대놓고 여장 모습을 올리는 일은 정말 드무니까.”
운전하고 있던 현규는 의표를 찔렀기 때문에 들키지 않을 거라며 태화를 안심시켰다.
“뭐, 들키게 되면 그것도 재미있을 것 같지만······. 근데, 이 포스터 프랑스에도 보내지나요?”
“······응.”
“······그건 좀 안타까운 소식이네요······.”
태화는 요요히 웃는 포스터 속 자신의 모습을 쳐다봤다.
눈 감은 세현의 얼굴을 위아래로 감싸 소중히 앉고 있는 세연.
검은색과 하얀색이 주를 이룬 포스터에서 그녀의 빨간 입술과 하얀 레이스 천 사이로 드러난 붉은 인조 손톱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뭐, 그래도 좋은 경험이었어요.”
CG로 몸매를 보정한 세연의 모습은 당사자인 태화가 봐도 타인으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