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220
“······그럼 이따 보자.”
“네, 누나도요.”
태화는 슬쩍 웃으며 마스크로 입가를 덮었다.
개막식도 끝났으니 이젠 세계 각국의 영화를 즐길 차례였다.
끝
ⓒ 마늘소금
태화는 모자를 고쳐 쓰며, 나가는 이들의 시선을 피했다.
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동남아 영화는 오늘 처음 접한 건데 묘하네······.’
방금 관람한 작품은 베트남 영화로, 한 여인의 기구한 삶을 조명하고 있었다.
동남아권 영화인 만큼 관람객 또한 진한 초콜릿빛 피부를 지닌 동남아 출신들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그들은 태화가 이해하기 힘든 감성을 선보였다.
태화에겐 별다른 감상이 느껴지지 않는 장면에서 눈시울을 붉히거나 코를 훌쩍인 것이다.
‘감정 포인트가 국가마다 다른 건 알았어도······.’
한 나라 안에서도 정치, 종교, 교육 수준에 따라 느끼는 바가 다 다른데, 태어나고 자란 문화가 다르면 얼마나 차이가 날까.
그래도 비교적 가까운 중국과 일본이나, 자주 접해 익숙해진 미국과 달리, 가까우면서도 먼 동남아의 감성은 태화에게 상당히 낯설었다.
‘저 사람들도 감동시킬 수 있는 연기를 펼쳐야겠지.’
물론 태화에겐 그들도 한국 팬들과 마찬가지로 연기를 선보이고 마음을 울릴 대상들 중 하나였다.
태화는 명작은 국가를 초월한다는 말을 되새겼다.
지금은 불가능할지라도 언젠가 그 경지에 도달하면, 자신도 국가와 문화를 초월한 작품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아직은 까마득한 일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태화는 기죽지 않았다.
서른도 되지 않은, 남자 배우로서 그리 많지 않은 나이다.
꾸준히 노력한다면 못 갈 것도 없었다.
‘어쩌면 더 이를지도 모르고.’
태화는 상자 깊은 곳에 넣어 둔 사신의 구슬을 떠올렸다.
누군가는 편법이라 말할지도 모르나 그는 괘념치 않았다.
아무리 계기가 주어졌어도 그것을 키우고 갈고닦은 이는 자신이었으니까.
지금껏 해 온 노력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을 빠져나가는 흐름에 합류한 태화는 영어 자막으로만 작품을 감상한 데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언어 공부를 좀 더 해야겠어.’
아무리 잘 만든 자막이라도 언어에 스민 뉘앙스를 살리는 건 어려운 일.
문법적으로 유사한 일본어와 한국어 사이에도 그런 오류가 생기는데, 영어와 베트남어 사이에 그런 오차가 없을 리 없다.
‘언어에 대한 재능이 생겼는데 이럴 때 써먹어야지.’
연기를 하는 것뿐 아니라 보는 것도 좋아하는 태화는, 그렇게 다짐하며 다음 영화 상영관을 찾았다.
아직 시상식까지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
이번 시상식은 대만에서 진행되는 만큼 중국어로 진행됐다.
물론 단상에 오른 이들은 각각 자국의 언어로 소감을 발표하거나 올해 수상자를 발표했지만, 기본이 되는 언어가 대만 공통어인 중국어라는 게 중요했다.
「이제 남우주연상을 발표할 순간이 돌아왔군요.」
「올해도 수많은 배우들이 빛났습니다.」
전년도 남우주연상 수상자가 진행자와 주거니 받거니 하며 긴장을 돋웠다.
「그럼 이번 남우주연상 후보들을 살펴보시죠.」
진행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형 스크린 위로 영화 제목, 국적, 배우의 이름이 영문으로 표기되어 나타났다.
각 작품에 대한 설명이 각국의 언어로 진행되었기에 이뤄진 절충안이었다.
「그럼 이제 발표하겠습니다. ······한국, 몬스터. 이태화.」
갈색 봉투가 열리고 진행자가 안에 적혀 있던 이름을 불렀다.
중간에 조사가 들어가면 당사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어, 호명은 간결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이렇게 상을 받게 되어 기쁩니다.”
박수갈채와 함께 단상에 오른 태화는 담담하게 기쁨을 드러내며 준비해 온 소감문을 읊었다.
기하학적 모양의 트로피가 그의 손에서 반짝였다.
└아태 영화제 시상식 보신 분? 이번에 배우님이 남우주연 받으셨는데. 아! 괴물이 감독상도 수상했어요!
└저요! 저 봤어요! 그런데 올라온 영상들 전부 직캠이라ㅠ 이거 깨끗하게 보는 법 없을까요?
└VPN 우회하셔서 대만 정식 사이트에 들어가면 전체 영상 확인 가능해요! 공식 영상이라 화질도 완전 깨끗! ‘最佳男配角’ 찾아서 누르시면 돼요!
‘아시아 태평양’이라고는 하나 최근 3년간 시상식을 주도하고 있던 건 대만을 위시한 동남아, 그리고 호주였다.
한중일 세 국가가 자국 영화제와 시상식에 열을 올리는 사이 벌어진 일이었는데, 그 때문에 영화제 내부에서 중국 본토나 한국, 일본의 영향력은 적었다.
또한 고만고만한 국가들끼리 싸우다 보니 이번 영화제 시상식 영상 또한 개최국인 대만 IP로만 확인할 볼 수 있었다.
상당히 불편하고 번거로운 절차.
그러나 태화를 향한 팬심은 그것을 가능케 했다.
└규모는 작지만 국제 시상식에서 한국어로 말하는 우리 배우님. 진짜 멋지네요.
└야누스 개봉하려면 아직 1개월 이상 남았어요. 이태화 성분이 부족해요ㅠㅠㅠ 광고 하나로 만족이 안 대······.
└만족이 안 대222 그런 의미에서 홍보용 예능 하나 가즈아ㅠ!
└제가 그것 때문에 BGA에 문의했는데 예정이 없대요. 일 좀 해라ㅠㅠㅠ
아직 ‘야누스’가 개봉하지 않았기에 작품에 대한 예의로 태화의 차기작 발표 또한 이뤄지지 않았다.
때문에 마레드는 태화가 일정 없이 쉰다고 생각하며 갈증에 몸부림쳤다.
***
괴로워하는 팬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채, 며칠 뒤 태화는 ‘정조’의 대본 리딩에 참석했다.
크랭크 인보다 한 달 앞서 이뤄진 이번 연습은 사실 태화에 대한 심사대 역할을 겸했다.
“이태화, 이태화······. 이 친구가 연기를 잘하긴 하지. 10년 전 현호 보는 것 같은 느낌이야. 근데 정조 맡기엔 나이가 영······.”
“아이고, 벌써부터 견제세요, 하길춘 씨?”
정순 왕후 역을 맡은 배우 한차희가 동갑내기 배우 길춘을 나무랐다.
50이 넘은 나이에도 40대 초반 같은 미모를 자랑하는 그녀는, 여러 사극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대비 역할을 선보이며 왕실 웃전 전문 배우로 유명했다.
물론 기가 센 상전은 권력 관계상 왕과 대척하는 일이 많기에 그녀는 ‘왕권을 위협하는 계모’, ‘어린 아들을 수렴청정으로 휘두르려 하는 대비’ 역을 주로 맡아 왔다.
그녀와 대화 중인 길춘은 무게감 있는 외모 덕에 권신(權臣)을 자주 맡았으며, 차희와 호흡을 맞출 때는 권력을 위해 음모를 꾸미는 악당 듀오로 출연했다.
“어허! 견제는 무슨. 이번 정조 역을 맡은 애가 아무리 연기는 잘한다고 해도 나이가 너무 어리잖아. 걱정되니까 그렇지.”
차희의 놀림 섞인 빈정거림에 길춘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일반적으로 역할과 본래 나이의 차이는 다섯 살을 넘지 않았다.
혹여 그 이상 차이가 난다고 하더라도 인물의 청년기부터 장년기를 연기하기 위해서일 뿐, 최종적으로는 작품에 주로 등장하는 인물의 나이와 배우의 나이를 얼추 맞췄다.
물론 외모가 너무나 동안이라 본래 나이보다 어린 역할을 맡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나이 어린 배우가 중년이나 노년의 연기를 맡는 일은 드물다 못해 최근 5년간 전무했다.
“사극이란 건 고정 수요층이 있는 장르잖아. 보는 사람들 눈이 얼마나 까다로운데.”
역사를 다루는 작품이다 보니 역사적 사실뿐 아니라 작품 내 의상, 도구와 같은 소품들까지 세세하고 꼼꼼히 살피는 시청자들이 많았다.
특히 이번처럼 전통 사극이란 타이틀을 달 경우, 고증 오류가 생길 시 상당한 반발을 일으켰다.
“이 친구 연기를 보고 싶단 생각은 했지만 이런 만남은 아니었어.”
태화는 길춘에게 ‘후일’ 합을 맞춰 보고 싶은 배우였다.
다르게 말하면, 지금은 아니었단 소리다.
“뭐 어때. 다 늙어 죽기 전에 창창한 후배랑 호흡 맞추면 좋지.”
“난 젊은 것들이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왕 같은 중한 역을 맡는 게 마음에 안 든다는 거야.”
“어쩌겠어. 요새 유행이 왕과 능력 있는 궁중 여성 간의 사랑인데. 다 늙어서 로맨스 찍고 싶어?”
“사극이 사극다워야지 허구한 날 로맨스. 에잉.”
그는 자신이 젊을 땐 고증에 더 신경 썼다며 늙은이 같은 발언을 일삼았다.
계속 듣고 있던 차희가 불만을 멈추지 않는 길춘을 흰 눈으로 응시했다.
“내 손자 왔을 때도 그러면 꼬집어 줄 거야.”
“허 참, 벌써부터 손자야?”
“물론이지. 여섯 살 차이 나는 스물아홉 창창한 의붓 손자라니. 젊어진 기분이라니까?”
영조가 말년에 들인 부인이기에, 정순 왕후와 정조의 나이는 고작 여섯 살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
정조의 친모인 혜경궁 홍씨의 나이가 시어머니인 정순 왕후보다 많았으니, 영조 덕에 이리저리 꼬인 족보였다.
“정말 새파랗게 어린애던데 잘할 수 있을런가 모르겠어.”
“승찬 감독이 배우 보는 눈은 있잖아. 오늘 보고 말해도 늦지 않아.”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두 중견 배우는 밖에서 이는 소란에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인공 등장이네.”
화제의 인물인 이태화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
회의장 입구에 들어선 태화는 자신을 향하는 은근한 시선들을 느꼈다.
텃새나 굴러 들어온 돌을 보는 눈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안에는 진하게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역시 내가 못 미더운가 보네.’
이미 상정했던 상황이기에 태화는 모르는 척, 태연히 눈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20대 배우가 중년을, 잠깐도 아닌 주연으로 영화 내내 연기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함께 출연해야 하는 배우들 입장에선 당연히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건 보여 주는 것밖에 답이 없어.’
태화가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 건 원래부터 그런 성격인 데다 사극이 처음인 탓도 있었지만,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배우들의 불안을 거두기 위함이 더 컸다.
작품 속 정조가 모든 상황을 이끌고 정국을 제 의지에 맞게 다루듯, 태화도 영화의 중심으로서 다른 이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주연이 되어야 했다.
‘오늘은 화장하지 않았지만······. 화장이 부수적인 거란 걸 알려야겠지.’
태화는 자신이 화장빨 배우라 불린다는 걸, 외모 덕에 유리하단 소리를 듣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다변하는 인상은 역할에 어울리는 1차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것일 뿐, 그 안에 있는 알맹이는 언제나 태화였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으나, 많은 이들이 가장 쉽게 간과하는 부분이었다.
태화는 자신의 자리 앞에 앉아있는, 심환지 역을 맡은 배우 길춘을 향해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어려움 난이도 내내 그를 의심하던 심환지도 종국엔 태화의 정조를 받아들였다.
주변을 맴돌던 환관과 상궁도.
정순 왕후와 그 외 대신들도.
태화의 연기에 합격점을 줬다.
‘······재미있겠어.’
이제는 실전에 들어갈 차례.
호기심과 불안을 담고 있는 이들을 찬찬히 훑으며 태화는 ‘정조 役’이라 적힌 자리에 앉았다.
***
처음 자신을 보며 웃는 태화를 마주했을 당시, 길춘은 태화의 소문이 꽤 부풀려졌다고 생각했다.
오늘이 단순한 대본 연습이 아님을 알 텐데도 긴장하지 않고 웃는 모습이 약간 실망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독이 들어오고 대본 연습이 시작되었을 때.
길춘은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피부로 느꼈다.
끝
ⓒ 마늘소금
임승찬 감독은 이번 영화를 위해 사극 좀 한다는 중견급 배우들을 캐스팅했다.
이름을 들으면 ‘이 사람 연기는 믿을 만하지’라는 소리를 들어도 티켓 파워는 애매한 이들이었다.
때문에 일부 배우들은 나이도 맞지 않는 태화를 정조의 역할에 캐스팅한 것이 흥행을 위한 선택이라고 지레짐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