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221
자리싸움, 밥그릇 싸움도 영화가 뜨고 파이가 커져야 쓸모 있는 법.
그렇기에 오해를 한 이들도 태화를 싫어하거나 적대하진 않았다.
단지 ‘욕심과 사탕발림에 넘어가 훅 가는 배우가 하나 더 생기겠구나’ 하며 혀를 찼을 뿐이다.
그러나 대본 리딩이 시작되고, 태화를 보는 이들의 눈은 달라졌다.
“채상의 집에 조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살아 있을 적 한자리에 앉아 담소를 나눴거늘, 조문 한 번 가지 않으면 그것은 인정이 아니다. 더구나 조정의 채모(體貌)를 살펴야지 않겠는가.”
정조의 편지는 한문으로 적히기 때문에 글이 써지는 장면마다 내레이션이 들어간다.
중심 주제가 어찰을 둘러싸고 이뤄졌으므로, 태화가 독백으로 읽어야 하는 대사량도 상당했다.
겉으로 보이는 자신만만한 군주의 모습과 달리, 어찰의 내용은 인정에 호소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따라서 장면마다 다른 분위기를 연출해야 했고, 대사의 발성 방식도 차이가 났다.
태화는 각기 다른 감정을 훌륭하게 담아냈다.
모략을 꾸밀 때는 은밀하게.
어르고 달래야 할 때는 상냥하게.
친밀을 표할 때는 호탕하게.
신하가 자신만을 아낀다고 착각하게 만들 때는 애절하게 편지의 대사를 읊었다.
그렇게 뒤쪽으로 온갖 수작을 다 벌여 두고, 장소가 편전으로 옮겨질 때는 모르는 척, 침통한 척 시치미를 뗐다.
‘잘하네······.’
‘목소리도 생각보다 중후하면서······. 발음이 뭉개지지 않는데?’
‘얼굴을 보지 않으면 어색함이 없군······.’
태화의 어조는 위엄 있었으며 강인하면서도 부드러움이 스몄다.
누군가를 꾸짖을 때도 기품이 묻어나는 등 흠잡을 데가 없었다.
결국 자리를 함께했던 배우들은 임승찬 감독의 선택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수고하셨습니다! 10분 쉬고 반성회에 들어가겠습니다!”
장면 번호와 장소, 지시를 읽어 주던 감독이 숨을 몰아쉬며 휴식을 고했다.
땀으로 젖은 그의 얼굴엔 만족스럽단 감정이 만연했다.
“정조 대사가 상당히 많았는데 그걸 한 번의 실수도 없이 해내다니 대단한걸?”
“대본을 보고 했으니까요. 그리고 연습할 때도 항상 전문을 읽는 버릇을 들였거든요.”
휴식이 선언되자마자 재빨리 다가온 길춘이 호감을 숨기지 않으며 태화를 칭찬했다.
그와 함께 퓨전 사극이 유행하면서 제대로 된 사극투를 뱉는 배우들이 없어졌다는 푸념도 늘어놓았다.
“요즘 애들은 말이야, 그냥 ‘즈언하’, ‘옵니다-’만 하면 그게 사극투인 줄 안다니까.”
“이봐요, 하길춘 씨. 애꿎은 후배 곤란하게 하지 말고 낄끼빠빠 좀 해.”
태화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길춘의 수다를 들어 주고 있을 때, 총총 다가온 한차희가 길춘의 머리를 냅다 후려치며 나무랐다.
얼얼한 뒤통수를 어루만지던 길춘은 사자성어도 아닌 요상한 단어에 인상을 썼다.
“낄끼······? 그건 또 뭐야.”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라고. 요즘 말투를 그렇게 몰라서 애들하고 대화는 되는지 몰라?”
“이 여편네가?”
“어후, 꼰대 냄새. 요새 여편네라는 말 안 쓰거든? 이 남정네야.”
“이, 이······! 어, 어억!”
그녀는 성질부리는 그의 앞에서 보란 듯이 코를 막고 나긋나긋하게 손을 휘저었다.
차희가 살살 약을 올리자, 길춘은 뒷목을 잡으며 말을 더듬었다.
동갑내기 배우들 사이의 흔한 장난이었으나 둘의 관계를 잘 알지 못하는 태화는 진짜 기분이 상해 저러는 것인지 잠시 고민했다.
“반가워, 한차희라고 해. 잘 부탁해, 손주님?”
“네, 선배님, 잘 부탁드립니다.”
“어머, 어머. 얘 좀 봐. 예의도 바르네.”
이미 태화의 연기를 보고 호감을 가졌던 차희는 별거 아닌 인사에도 호들갑을 떨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정신 사나웠을지 모를 부산스런 행동이었지만 그녀가 하니 참 고상해 보였다.
“내가 정순 왕후 역할만 세 번째인데, 이번에 정-말 기대가 커. 정순 왕후가 정조랑 협력자로 나오는 건 이번이 처음이거든.”
사극에서 정치적 라이벌, 권력을 나눌 수 없는 숙적처럼 그려지는 것과 달리 정순 왕후와 정조는 정치적 동반자였다는 평이 대세였다.
젊은 나이, 기반도 없이 시집 온 젊은 계조모가 의지한 건, 다 늙어 죽어 가는 남편이 아닌 앞으로가 창창할 젊은 태양이었기 때문이다.
끈 없이 들어와 증손자의 수렴청정까지 맡았던 사람답게 그녀는 떡잎부터 달랐다.
자신의 앞날이 영조보다 정조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았던 정순 왕후는 자신의 의붓 손자를 상당히 아꼈다.
또한 결정적인 순간, 자신을 이용하려던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를 역으로 팽해 버렸고, 외척 등용에 앞장서서 반대했다.
정조의 친어머니 혜경궁 홍씨와는 사이가 미묘하게 나빴다.
둘 다 왕의 웃어른 위치에 있으면서 한쪽이 다른 한쪽의 친정을 몰락시키는 데 일조했으니 좋은 게 더 이상했다.
그러나 그런 역사적 정설과 다르게, 순조 시절 수렴청정을 했다는 사실과 정조와 대립한 노론 벽파의 인물이라는 점 등 부각되어, 사극에서 ‘야심만만하고 손자인 정조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젊은 의붓 할머니’가 되었다.
물론 ‘정조’ 이전에도 정순 왕후를 협력자, 조력자로 그린 작품이 없던 것은 아니나, 대중들의 인식을 바꾸지는 못했다.
“뭐, 그런 걸로 따지면 내가 더 참신하지. 그 편지들이 발견되기 전까지 심환지가 얼마나 욕먹는 벽파 우두머리였는데.”
사극에 오래 몸을 담근 이들은 대부분 역사적 지식이 해박했다.
캐릭터 구상을 위해 역사적 사료를 확인하거나, 연대를 이리저리 오가면서 온몸으로 역사를 배웠으니 당연했다.
최근 전통 사극보다 연애나 ‘If’에 치중한 작품이 늘면서 그렇게 하는 이들은 거의 사라졌지만 정통 사극을 주로 맡았던 4, 50대 사극 배우들은 여전히 역사 덕후 기질을 지녔다.
한차희와 하길춘 또한 예외는 아니라서, 그들은 ‘일성록’과 ‘한중록’, ‘일득록’까지 들먹이며 역사 이야기를 꽃 피웠다.
대본을 통해 열심히 연습하기는 했으나 역사에 대한 내공이 부족했던 태화는 둘 사이에 끼어 뜻하지 않게 조용히 휴식 시간을 보냈다.
***
“태화 씨, 이번 영화에 참여해 줘서 정말 고마워.”
“아뇨, 저야말로. 사극도 한번 해 보고 싶었거든요.”
1차 대본 연습이 끝나고, 회장을 나서려는 태화를 감독 승찬이 불러 세웠다.
그는 흐뭇한 표정으로 태화를 응시하며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한 번으로 되겠어? 사내답게 ‘한국사의 살아 있는 역사가 돼 보겠다!’라는 각오 정도는 다져야지.”
“하하······.”
삼국시대부터 근대까지 맡아 보라는 농담에 태화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연습 후, 태화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배우는 없었다.
오히려 성공에 확신을 주는 주연을 상당히 반기며 기꺼워했다.
사극이란 넓으면서도 좁은 환경에서 부대낀 이들은 대부분 서로를 아는, 약간 가족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어린 후배인 태화를 손주나 자식 보듯 아꼈다.
물론 길춘처럼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배우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런 이들은 주변 배우들의 야유에 알아서 쭈그러들었다.
배우들에게 받아들여지자 태화도 연기하기 편한 환경이라는 걸 몸소 느꼈다.
주요 역할을 맡은 배우들이 전부 명품 조연, 베테랑이다 보니 태화를 띄워야 할 때를 기가 막히게 알았다.
“아직 정통 사극이 죽지 않았다는 걸 보이기 위해서 고르고 고른 이들이야. 다들 연기에 애정이 있고, 과거에 대한 향수도 없지 않지.”
최근엔 드라마조차 장편 사극을 퓨전 사극으로 구성했다.
너무 무겁고 지치는 내용보다, 간간히 유머가 들어가고 시청자들이 듣기 편한 가벼운 대사를 선호한 것이다.
그런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사극 배우들도 변했으나 과거 사극이 꽃피던 시절의 그리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현대에서 넘어왔다는 설정을 통해 사극에도 PPL이 심해지면서, ‘이젠 작품이 아닌 상품’이 돼 버렸다며 씁쓸해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태화 씨를 고른 건, 내가 정말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결과였어.”
‘대청제국’을 보며 반했지만, 승찬은 고작 그 이유만으로 태화를 고르진 않았다.
그는 태화가 촬영했던 모든 작품을 유심히 확인했으며, 그 안에서 보였던 변화, 연기를 자신의 작품에 대입해보며 최종적으로 투자자들을 설득했다.
“실망하지 않으실 거예요.”
“그렇게 말하니 자신감 넘쳐서 보기 좋네. 그럼 2차 리딩 때 보자고. 아, 그때는 분장을 하고 최종 리허설 형태로 진행될 테니까 매니저한테도 말해 두고.”
할 말을 마친 승찬은 분주한 스텝들 사이로 사라졌다.
***
무사히 1차 대본 연습이 끝나고, 며칠 뒤 있었던 2차 연습 또한 별 탈 없이 마무리됐다.
물론 별 탈이 없었다는 건 태화의 입장일 뿐, 그 자리에 함께했던 배우들에겐 잊기 힘든 경험이었다.
-태화 너, 와······. 정말 잘 어울리는구나?
1차 리딩 이후 이래저래 친해진 한차희의 감탄처럼 라텍스를 이용한 주름, 정교하게 만들어진 수염, 그리고 약간 탁해진 홍채는 태화의 나이를 40대 중후반의 인물로 바꿔 놨다.
-그리고 화장하니까 정말 잘생겨졌어. 자, 이 할미에게 사인 좀 해 보세요.
영상이란 특성상 인물의 외모는 점과 같은 특징을 제외하고 따로 고증하지 않는다.
따라서 태화의 외모도 역사서에 묘사된 정조의 외형이 아닌, 대중들이 가진 환상과 자연스럽게 나이 든 모습을 바탕으로 완성됐다.
다르게 말하면 태화의 아버지 이우석의 외모를 정말 많이 참조했다.
-와, 이분 누구세요? 이만한 연예인을 내가 모를 리 없는데. ······헉, 배우님 아버님이시라고요? 아······.
태화는 안타깝다는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던 스텝의 시선을 떠올렸다.
친구 인하가 자주 태화와 우석의 외모를 비교하며 지었던 표정이기에, 태화는 스텝의 ‘아······.’ 속에 담긴 의미를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반응들이 참 한결같아.’
아버지에 비해 아쉬울 뿐이지, 태화는 자신의 외모가 괜찮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오히려 화장으로 꾸미기엔 현재 얼굴이 더 나았기에, 안타까워하는 주변과 달리 태화는 자신의 외모에 만족했다.
“스물. 태화 씨,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쿨다운에 들어가면 오늘 커리큘럼은 끝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뭘요. 언제나 정확히 따라 주셔서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 다른 고객분들도 태화 씨 같다면 좋을 텐데요. 하하하.”
태화의 자세를 잡아 주던 트레이너가 4세트의 마지막 숫자를 세곤 마무리 운동을 준비했다.
기간이 짧으면서도 대사가 많기에 이번 촬영은 상당한 체력을 요했다.
아무리 말로 논쟁을 벌인다 하더라도 건강이 받쳐 줘야 실수가 적어지고 오래 집중하기 쉽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화는 크랭크인 직전까지 체력 단련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렇게 다방면으로 노력하던 차, 달이 바뀌고.
드디어 ‘정조’가 크랭크인됐다.
끝
ⓒ 마늘소금
대본 2차 리딩이 있기 이틀 전,
태화는 어려운 난이도의 동기화 100퍼센트를 넘었다.
당시 동기화 점수는 135퍼센트.
100퍼센트도 도달하지 못해 고민하던 것이 무색한 결과였다.
오랜 시간 한 가지에 몰두하다 보면 종종 평소 자신의 기량을 뛰어넘는 결과를 이뤄 내는 경우가 생긴다.
그것은 노력이 만들어 내는 균열이며, 많은 프로들이 그 균열을 비집고 들어가 우연에 의한 결과를 제 실력으로 만들어 냈다.
태화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135퍼센트라는 결과를 만들었을 때, 순간의 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 자신이 정해 둔 연습 시간을 넘기며 실마리를 쫓았다.
잠시 연습실에 들렸던 현규는 대본을 뚫어질 듯 노려보는 태화의 모습에 기가 질려, 음식만 두고 얼른 자리를 떠났다.
집중하고 있는 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다.
다른 일정까지 도외시한 채 대본에 열중하던 태화는 늦은 밤이 되어서 다시 한번 동기화 135퍼센트에 도달했다.
현실만 따져도 10시간이 넘는 혹독한 연습.
기진맥진한 상태가 된 태화는 현실로 돌아오자마자 바닥에 쓰러져 잠들었다.
10시간 동안 대본을 읽느라 눈이 피로했고, 수십일 가까이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던 정신은 휴식을 외쳤기 때문이다.
중간에 확인 차 연습실에 들른 현규가 바닥에 누워 있는 태화를 발견하고 119를 불러 응급실로 실려 가는 소동이 일었다.
달콤한 잠에 빠져 있던 태화는 의사가 아무 이상이 없단 소견을 내놓을 때쯤 일어나 어리둥절한 얼굴로 걱정에 차 있는 이들을 맞이했다.
-너란 애는 어떻게 네 아빠 젊은 시절이랑 똑같니! 정도를 알아야지!
-여보, 난 그래도······.
-당신은 가만히 있어요! 정말 네 아빠랑 너 때문에 엄마가······!
물론 깨어나고 아무 이상도 없다는 소견이 떨어지자마자 태화는 새파랗게 질린 선미에게 등짝을 헌납해야 했다.
서른이 다 된, 회귀 전까지 합치면 서른 중반까지 산 나이었지만 겁에 질린 선미의 얼굴을 보고 태화는 아무 말도 못한 채 통증을 감내했다.
그렇게 혼났어도 크게 변한 건 없었다.
걱정을 끼친 건 죄송하다 생각했다.
그러나 태화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됐다 여기지 않았고, 다음에도 기회가 오면 놓칠 마음이 없었다.
원래 자식은 부모 마음대로 안 되는 법이었다.
그렇게 소동까지 일으키며 목적을 달성한 결과, 태화는 2차 대본 연습에서 현장에 있던 모든 이들을 놀라게 했다.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깊이가 느껴지는 연기력.
노회한 정치가가 제 입맛에 맞춰 정국을 주도하는 것처럼, 태화는 여유롭게 베테랑 배우들을 압도했다.
-우리가 이끌 줄만 알았지, 끌려갈 줄은 몰랐는데.
대사를 읽을 때 현장을 주도하고 현실로 만드는 것은 어렵다.
함께 연습하는 이들도 이미 상대가 할 말을 알고 있으니까.
어떤 대사가 어떤 상황으로 흘러갈지 아는데 이미 스포일러된 영화를 완전히 즐기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화가 다른 중견 배우들에게 몰입감을 줄 수 있었던 건, 외향의 변신으로 충격을 가하고 그 외모와 위화감 없는 연기, 발성으로 다른 이들을 압박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