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224
“나도 그래.”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두 배우에게서 시선을 뗀 태화는 어느새 익숙해진 세트장을 응시했다.
분주하게 오가는 스텝들과 세팅 중인 카메라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태화 배우님, 하길춘 배우님. 촬영 시작합니다.”
“잘 다녀와.”
촬영에 들어가지 않는 차희가 의자에 앉아 손을 흔들었다.
도입부가 끝나고, 드디어 ‘화완 옹주 복위 작전’ 촬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검은 관복을 입은 신하들이 양쪽으로 도열해있는 가운데, 옥좌에 앉아있던 이산이 입을 열었다.
“즉위 초 있었던 정치달의 부인(화완 옹주)에 관한 처분은 선왕의 뜻을 따른 것이고, 오늘 용서해 석방하려는 것 또한 선왕의 의지다. 이미 그녀가 수도(한양근교)에 산 지 오래. 죄가 있다는 것도 모호한데 기록이 남았으니, 오늘로 죄에 대한 기록을 없애 완전히 용서하는 것으로 내 마음을 편케 하겠다.”
도성에 죄인이 된 전(前) 화완 옹주가 기거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신하들이 사실 여부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이던 찰나.
갑자기 떨어진 이산의 폭탄선언에 대전이 술렁였다.
“전하! 아니 될 말씀이시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가장 먼저 나선 것은 우의정 심환지였다.
그 뒤를 따라 좌의정 이병모가 고개를 숙여 통촉해 달라 외쳤고, 나머지 신하들도 고개를 숙였다.
“이는 선왕의 뜻을 이은 흐름이다. 어찌 경들은 여의 명을 무시하는가?”
이산은 기분 나쁘다는 심정을 숨기지 않으며 영조의 이름을 들먹였다.
정치달의 처라 불리는 전 화완 옹주는 선왕 영조에게 가장 사랑받았던 자식.
그러니 그녀를 옹주로 되돌리는 것도 선왕의 뜻이라고, 이산은 밀고 나갔다.
“정처는 죄인 정후겸의 모친입니다. 그 죄가 무겁사옵니다.”
“그러하옵니다. 전하. 죄인 정후겸은 세자 시절의 전하를 모함하였을 뿐 아니라 조정의 신하로서 해서는 안 될 행동을 일삼았음이라, 그런 이를 양자로 들인 그녀의 죄 또한 없어 질 수 없는 것이옵니다.”
아들의 죄가 곧 부모의 죄라 외치는 신하들에게 이산은 코웃음을 쳤다.
“그때는 어쩔 수 없이 그리 했던 것이고, 오늘날도 그렇다. 모든 일은 때에 따라 알맞게 정하는 것이니, 여가 어찌 개인의 뜻으로 말하겠는가.”
이건 다 상황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지, 자신의 사적인 감정 때문에 이러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이산의 태도는 뻔뻔했다.
너무나 당당한 태도에 신하들을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리고 있던 찰나, 심환지가 다시 한번 앞으로 나섰다.
“병신년으로부터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 종사가 편안하고, 윤리, 기강이 바로 서 온 나라 만백성이 사람됨을 유지하는 것은 바로 죄인 홍인한과 정후겸을 벌한 기록인 ‘명의록’이 있었기 때문이옵니다. 그런데 이 명의록이 옛것이 되었다 하옵시고, ‘정처가 수도에 집을 둔 지 오래됐다’말씀하시니 이는 신들의 충성과 정성이 모자라 일어난 일. 만 번 죽어도 부족한 죄이니 부디 신을 죽여주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여가 그리 명한 것은 뜻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전하.”
“불허한다 하지 않느냐!”
이산이 분노를 표하며 소리를 높이자, 중후한 목소리가 대전을 울렸다.
그 기세가 사뭇 매서워, 앞다퉈 거둬 달라 말하던 이들이 일순 조용해졌다.
침묵이 감도는 사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이산은 그대로 대전을 벗어났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합니까?”
“전하께옵서 혈육의 정을 못 잊으셨습니다.”
“이게 다 우리의 부덕함입니다. 더 성심껏 전하를 보필해야 했습니다.”
왕이 사라진 자리에서 신하들은 이를 어찌 해야 할지 한탄했다.
혼란이 이어지자 이산과 미리 밀지를 주고받았던 이들은 각기 눈을 빛내며 다시 한번 주청 드려야 한다고 여론을 모았다.
“전하께옵선 이날 이때까지 성총을 흐리신 역사가 없습니다. 우리가 길을 밝힌다면, 전하께서도 알아주실 것입니다.”
“맞습니다. 잠시 흔들리신 것뿐일 거예요.”
“제가 나서 주청을 드리겠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앞장설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로 신하들을 다독였고, 또한 뒷짐 지고 있는 몇몇을 부추겨 앞으로 나서게 만들었다.
“대감! 대감께서 그리 말하니 소관도 함께하겠습니다.”
설마 앞장서 반대를 외쳤던 이들이 이산과 한패라 생각하지 못한 채, 그들은 기세가 등등해져 어전으로 향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한 차례 큰 폭풍이 불어버리면 나머지 잔바람은 힘을 잃는다.
그것은 여러 번 꾸준히 부는 바람보다 타격이 작았다.
이산은 모든 굵직한 잡음을 한 번에 끝내기 위해 신하들을 부추겼으며, 그 의도는 그대로 맞아떨어져 멋모르는 이들은 부나방처럼 달려들었다.
또한 이산은 그렇게 생긴 기회를 파직시키려 했던 ‘미꾸라지’들을 처리하는데 사용했다.
기회주의자에 무능하지만 건수가 없어서 내버려두었던 이들을 분노를 가장해 잘라버린 것이다.
실제로 직위를 해제당하는 이들이 생기자 일부는 겁을 먹었고 일부는 자신의 뜻이 옳다며 더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하루 동안 처리해야 할 이들을 걸러 내며 제 뜻대로 일을 처리하던 이산의 귀에 ‘정처가 있는 곳은 서울이 아니라 도성 내부며 을묘년때부터 자리한 것으로 그 시간이 수년에 이른다!’라는 소문이 들려왔다.
전의 두루뭉술한 말보다 더 뚜렷하게 형태를 띠고 있는 그것은 이산이 의도하지 않았던 사안.
때문에 이산은 낯빛을 굳히며 심환지에게 두 번째 계획을 지시했다.
[인사는 생략한다. 이번 일은 매우 난처하다······.]
편지는 3월 6일 저녁 심환지의 자택에 당도했고, 다음날 심환지는 좌의정 이병모, 이시수, 송전 등과 함께 정무 보고 겸 의사를 표명하던 중, 부러 과한 목소리를 내어 이산의 화를 돋우고 스스로 관을 벗는 행위를 선보여 파직당했다.
파직 당하기 직전 심환지가 뱉은 말이 너무 강경하고 과했던지라, 그를 수장으로 하는 벽파는 제 목소리를 내기 묘한 상황에 처했다.
아무리 반대를 해도 선을 넘지 않은 선에서 의견을 표명해야하는데, 심환지가 한 말은 그 정도를 지키지 않은 것이다.
가장 반대하던 벽파가 몸을 움츠리자 다른이들도 조금씩 소극적으로 변했다.
슬쩍 이산의 뜻에 동조하는 무리도 생겼다.
잡음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은 그 전보다 미미해졌고, 덕분에 정국은 다시 이산이 바라는 대로 흘러갔다.
끝
ⓒ 마늘소금
정조가 화완 옹주에 대한 폭탄 발언을 터뜨리고 심환지가 파직당하는 장면은, 어찰 정치의 끝판을 보여 주는 영화의 메인 이벤트였다.
스스로 만들어 낸 무대라 할지라도 이곳저곳에서 반발이 일어나는 탓에 무거워질 수 있는 사건.
그러나 감독은 정조에게 뻔뻔한 얼굴을 씌워 그 부분을 생각보다 가볍고 유쾌하게 풀어냈다.
-윤허할 수 없다.
-전하!
-아, 불허한다 하지 않느냐.
귀만 안 후빌 뿐이지 ‘너희들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라는 제스처를 그대로 보여 신하들을 환장하게 만든다거나.
-······충정이 억눌리고 막혔기에 죽음을 무릅쓰고 되돌려 올리옵니다!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여가 내린 명은 대신들과 만나 내렸던 답을 베끼라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그녀를 돌려보내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전하······!
비장하게 말하는 신하들에게 엉뚱한 답변을 꺼내 뻐금거리는 금붕어로 만들어 버린다든가.
-깊은 밤에 만남을 청하는 것은 유독 나라의 체모를 생각하니 않는 것이니. 그래, 체모를 제쳐도 어찌 여를 이 밤에 불렀나? 경들이 도무지 신하의 분수를 모르는데, 어떻게 여를 섬기겠어. 또 시끄럽게 하려 하는가?
밤늦게 찾아온 대신들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너희 참 예의 없다’라 한탄하며 면박을 주고 입을 막아 버리는 등,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신하들의 청을 되돌렸다.
임승찬 감독은 가끔은 참다가 욱하는 장면을 넣기도 했다.
-너희는 공부나 하지 예는 왜 왔니?
바닥에 머리를 대고 상소 올리는 유생들에게 제 할 일 안 하냐고 쏘아붙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물러가 기다리라 한 것도 다 뜻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 이 하교를 듣고도 더욱 떠드는 겐가? 이번 일은 그대들의 뜻을 헤아려 모두가 이해할 수 있게 하려 했는데 왜 여의 뜻을 몰라?
반대하는 이들을 생각이 얕은 이들로 매도했다.
물론 진지하게 그려진 부분도 없지 않았다.
바로 가장 강렬한, 상위 직함들이 연이어 파직당하는 장면.
심환지에게 편지를 보낸 다음 날, 경연에서 벌어진 상황이었다.
-정처의 흉악한 음모가 극에 달했을 때! 오로지 혜경궁께서 간악한 기미를 살피고 전하를 보호하셨사옵니다! 지금 정처를 용서한다면 자성께서 보호하신 공덕은 어찌 되는 것이옵니까!
‘네가 세자일 때 네 엄마가 널 보호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이 원수나 위하는 폐륜아 새끼야!’라는 말을 이조 판서 이시수가 돌려서 힐난하자 정조는 얼굴을 붉히며 어좌를 내리친다.
-이조 판서는 어찌하여 일의 무게에 편승해 그리 말하는가. 이조 판서는 오늘로 파직되었으니 물러나라!
이시수가 파직당하자, 이어 심환지가 자못 화가 난 기세로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난 못 받아들인다! 배 째!’라는 강경한 태도를 보이며 관을 벗는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신하가 사직을 청하는 것도 아닌 스스로 관모를 벗는 것은 왕의 행동이 잘못됐다고 대놓고 말하는, 무례한 방식이었다.
상당히 과한 시위 방법 탓에 우의정인 그보다 높은 직위에 있는 좌의정을 제외한 모든 신하들이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상황.
윗사람들이 ‘너무’ 막나가 버렸으니 아랫사람들은 새우등이 터지지 않을까 두려워 순한 양이 돼 버렸다.
그것은 정조의 뜻대로 정국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는 신호이자, 배우들에겐 드디어 힘든 파트가 마무리되어 간다는 희소식이었다.
“컷!”
태화가 ‘우의정 심환지를 파직하라’라는 대사를 뱉곤 다른 배우들을 쭉 훑은 뒤, ‘더는 맞서지 말고 삼사의 제신들은 물러가라’라 언짢은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컷’ 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절을 하고 있던 길춘이 일어나 허리를 펴고 몸을 풀었다.
“후! 드디어 끝났네.”
길춘은 매니저가 건넨 코트를 입으며 몸을 떨었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기에 건물에도 보일러를 틀었지만, 워낙 시설이 커 온기가 도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목조로 이뤄진 바닥 또한 뼈를 시리는 추위에 한몫을 했다.
때문에 내부 촬영임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은 컷이 외쳐지기 무섭게 따뜻한 음료를 찾거나 핫 팩과 점퍼로 몸을 보호했다.
태화 다음으로 나이가 적은 이가 서른일곱이다 보니 다들 건강과 체력 분배에 주의를 기울였다.
“수고하셨습니다.”
“태화도 수고했다. 으으, 겨울 촬영은 내부 촬영이어도 힘들단 말이지.”
“뭐, 어쩌겠어. 사극 세트가 다 그렇지.”
“그래도 부안에 괜찮은 시설이 생겨서 다행이야. 2주 전 촬영했던 데서 오늘까지 촬영했다면······. 으아,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방금 전 길춘의 옆에서 같이 핏대를 세우던 좌의정 이병모 역의 김호창과 이조 판서 이시수 역의 최만호가 핫 팩을 하나씩 손에 들고 고개를 저었다.
주변 건물과 배경을 그대로 활용해도 괜찮은 현대극과 달리 사극은 등장하는 건물을 일일이 제작해야 했다.
‘정조’의 경우 대부분의 촬영이 내부에서 이뤄지는 덕에 그러한 제약이 적은 편에 속했지만, 그래도 외부, 그러니까 궁을 배경으로 하는 장면도 없지 않았다.
처음 대여했던 촬영장도 그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선택한 곳이었는데, 문제는 현대식 건물과 멀어지기 위해 경기도 북쪽 구석 숲속에 만들어진 장소라 상당히 추웠다.
현재는 폭설이 내리고 있다고 하니 계속 그곳에서 촬영했다면 일정이 지연되었으리라.
“여긴 뭐······. 관광객이 많은 걸 빼면 괜찮지. 좀 춥긴 해도 한 겨울에 입김 안 서릴 정도면야.”
“사람들이 말이야, 휴대폰을 끄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진동으로 돌리라는데 그걸 안 하는지. 쯧.”
만호가 관광객의 벨소리 때문에 NG가 났던 것을 떠올리곤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부안 사극 세트장은 일반인들에게도 오픈된 장소였다.
촬영이 있는 걸 지역 홍보에 이용했기 때문에 다른 스튜디오보다 싼 값에 대여가 가능했고, 왕궁뿐 아니라 양반들이 사는 가옥, 저잣거리, 평민촌까지 갖춰져 사극 촬영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관광지를 겸했기에 입구에는 푸드 트럭이나 포장마차가 즐비했으며, 가끔 배우를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 스텝의 지시를 따라 달라는 경고를 무시한 채 행동하는 관광객들이 존재했다.
“죄송합니다······.”
태화는 투덜거리는 배우들을 향해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유난을 떨었던 이들 대부분이 태화가 목적이었던 탓이다.
특히 말이 안 통하는 걸 빌미로 은근슬쩍 지시를 무시하는 외국인 관광객들은 스텝들에게 통제하기 어려운 이들이었다.
“아니, 네가 미안할 건 없지.”
“그래. 지시만 잘 따라 주면야 우리야 홍보되고 좋은 거고······. 뭐, 외부 촬영이 많은 것도 아니잖냐.”
배우들은 손사래 치며 태화를 두둔했다.
그들은 이 후배가 좋았다.
인기 있으면서도 연기만 진지하게 바라보고, 카메라 앞에서 조금이라도 더 나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특히 부안 숙소에 함께 머물면서 하루라도 연습을 빼먹지 않는 성실한 태도를 제 눈으로 본지라, 현장에서 태화를 싫어하는 이는 없었다.
아니, 있다고 해도 모두가 태화의 편이니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오늘 서울 올라갔다 온다며. 이제 가야지?”
“네, 아마 내일 모레쯤 돌아올 것 같네요.”
‘정조’는 어찰을 중심으로 스토리가 돌아갔기 때문에 내레이션으로 진행되는 대사가 많았다.
당연히 현장에서 대사를 읽는 것이 아닌, 방음이 잘 된 녹음실에서 작업해야 했다.
따라서 태화뿐 아니라 어찰을 주고받는 다른 배우들도 녹음을 진행할 필요가 있었다.
다만 일정 관계상 분량이 가장 많은 태화가 먼저 작업을 하고, 그 뒤에 나머지 배우들이 순서를 정해 순차적으로 작업에 들어갔다.
“서울 올라가는 김에 푹 쉬다 오고. 네 매니저가 네 걱정 많이 하더라.”
“네, 그럼 전 가 보겠습니다.”
“그래.”
어려운 고비가 마무리됐다며 회식을 외치는 감독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태화는 선배 배우들의 배웅을 받으며 현장을 떠났다.
***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