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225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녁에 집에 도착한 태화는 오랜만에 부모님과 식사를 함께하고 다음 날 녹음실로 향했다.
강남 쪽에 있는 스튜디오로 영화, 애니메이션 더빙을 주로 맡는 업체였다.
“10년을 불우하게 지냈는데, 굳게 참으며 궁색한 생활을 견뎠고 요직에 올라서도 옛날을 잊지 않으니, 경처럼 훌륭한 이가 누가 있을까.”
심환지는 상당히 늦은 나이 관직에 올랐다.
또한 청렴하기 그지없어, 정조는 그의 성품을 많이 아꼈다고 한다.
영화 속 정조가 정에 호소할 때도 환지의 심성을 주로 칭찬했으며, 그런 편지글들은 의외로 그리운 이에게 보내는 글처럼 달콤하고 포근했다.
태화는 다음 날 있을 작전을 하명할 땐 은밀함을, 사교를 다질 때는 호방하고 친근함을, 부러 화를 드러낼 땐 분노를 담아 편지에 적힐 대사를 읽었다.
분량이 많기는 했으나 혼자 녹음하는 데다, 실수를 하는 일도 적어 2, 3일을 예상했던 작업은 의외로 빠르게 진행됐다.
이제 남은 분량도 1/4 정도.
순차적으로 이뤄졌던 편지의 내용은 어느새 어제 촬영했던 분량을 따라잡았다.
상당히 빠른 속도였기에 조정실에 앉아 있던 이들은 혹시라도 자신들이 너무 대충 들은 것은 아닌지 재차 확인했으나 곧 혀를 내둘렀다.
녹음실에서 작업하는 것은 감정이 잘 잡히지 않는다고 하여 평소보다 못한 모습을 보이거나, 오히려 과장하는 경향이 생기는 데 반해 태화의 녹음은 그런 실수가 없었다.
“인사는 생략한다. 이번 일은 매우 난처······.”
-이태화 배우님, 긴급하면서도 빠르지 않고 또박또박 발음해 주시겠어요?
그가 대사를 읊으려는 찰나 헤드폰에서 스텝의 요구가 들려왔다.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주문이었으나 태화는 별말 없이 호흡 타이밍을 바꿔 긴박함을 표현했다.
“발성이 아주 깨끗하네요. 연기 잘하는 건 알았지만 목소리가 쭉 뻗는 게······. 애니 녹음은 계획 없대요?”
뒤쪽에서 심부름 대기를 하고 있던 스텝이 슬금슬금 현규에게 다가와 태화에 대해 물었다.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감탄이 묻어 있던지라, 현규는 자부심을 드러내며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평소에는 소심해도 일하는 모드로 들어간 그는 언제나 자신감 넘쳤다.
“하하, 저희도 몇 번 권했는데, 배우에겐 배우의 일이 있고 성우에겐 성우의 일이 있는 법이라고 남의 영역을 침범하기 싫다 하네요.”
사실 태화가 직접적으로 성우 작업에 대해 저리 말한 것은 아니었다.
현규가 언뜻 물었을 때, 그는 ‘표정과 온몸으로 연기하는 게 좋아서요. 음성 품질이 별로라 따로 녹음하는 건 좋지만 이미 있는 영상에 목소리만 담는 건 좀······. 저랑 안 맞을 것 같네요.’라 답했다.
크게 문제 되는 발언은 아니었으나 꼬투리를 잡으려 들면 잡을 수 있는 내용.
따라서 현규는 매니저답게 그 말을 좀 더 완곡하고, 호불호를 드러내지 않는 말로 바꿨다.
“오······. 요새 연예인분들은 타 업계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잠식하시는데. 이태화 배우님은 단시간에 올라오신 분답게 마인드가 다르네요.”
성우 일은 의외로 시간 대비 비용이 짭짤하게 나왔다.
그런 경향은 이름값이 높을수록 심했는데, 성우 일은커녕 내레이션 한 번 읊어 보지 않은 유명 연예인이 주인공 더빙을 맡았다가 대차게 욕먹는 건 이 바닥에서 흔했다.
특히 성우는 영상으로 흑역사가 남는 일도 적어, 연기보다 쉽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최종적으로 남는 건 비주류에 가까운 성우 팬들의 미움과 돈뿐이니 한 번 욕먹고 말면 된다는 생각에서다.
그나마 비슷한 직군에 있는 배우는 적당히 선을 지켰지만 ‘적당히’일 뿐 ‘완전히’는 아니었다.
“저희 태화가 직업의식이 남다르긴 하죠.”
그는 뿌듯함을 감추지 않았다.
너무 남달라서 가끔 불안하기도 해도, 태화는 현규에게 자랑스러운 내 배우였다.
“오오, 역시.”
“기석이, 배우님 끝났는데 수다 그만 떨고 가서 도와.”
“아, 넵!”
현규가 고개를 돌리자 헤드폰을 벗고 휴식을 취하는 태화가 시야에 들어왔다.
휴식이라곤 해도 여전히 대본을 놓지 않고 있어서, 그는 녹음 부스 안에 들어가 말을 거는 대신 조용히 다음 작업이 시작하길 기다렸다.
[안녕하세요. 임서연입니다. 배우님 관련 소식이 있어 연락드립니다.]
BGA에서 온 연락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에게 도착한 뉴스는 상당히 놀라운 것인지라, 그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재빨리 녹음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태화야!”
“아, 형. 이제 시작······.”
“너 노미네이트됐대!”
“······아, 그래요? 야누스가······.”
“아니, 아니! 야누스 말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현규를 태화는 조금 떨떠름한 눈으로 바라봤다.
일하는 중 이러는 매니저의 모습이 생소했기 때문이다.
“음, 일단 흥분을 좀······.”
“골든 글러브에, 잃어버린 고리 남우 조연으로 후보자 등록됐어!”
“어?”
“우와! 그거 미국······! 축하합니다, 배우님!”
“축하해요!”
태화보다 한 박자 일찍 뜻을 이해한 이들이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감사합니다?”
조정실에 있는 이들까지 박수를 쳐 주는 가운데, 태화는 여전히 얼떨떨한 심정을 감추지 못한 채 어설픈 감사를 표했다.
끝
ⓒ 마늘소금
미국에서 가장 큰 영화 시상식은 아카데미.
미국에서 가장 큰 드라마 시상식은 에미 어워드다.
여기서 두 번째로 큰 영화 시상식과 드라마 시상식을 꼽으라 한다면 미국인 십 중 십은 ‘골든 글러브 어워드’를 고르리라.
양쪽 모두 1등은 못했지만 미국에서 영향력 있는 상 중 하나임에는 이견이 없었다.
또한 드라마와 영화 양쪽 부문을 심사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백종상과 닮아 있었다.
“솔직히 연락 올 줄 몰랐는데요.”
녹음을 마치고 차에 올라탄 태화는 아까의 이야기를 이었다.
인기 있는 드라마답게 ‘잃어버린 고리’는 미국 내 다양한 상을 휩쓸었다.
태화에게도 ‘잃어버린 고리 시즌5 배우 팀’으로서 초대장이 몇 번 왔었고 데릭 역에 대한 후보자 등록 소식도 하나 있었다.
물론 한국에서 한창 ‘야누스’를 찍고 있던 태화가 참석하기엔 어려웠지만 말이다.
그러나 태화도, 미국에서 알아주는 시상식에 자신이 초대될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현지 쪽 말 확인하니까 외국인이라서 그쪽도 꽤 고민했다고 하더라. 외국어 영화상이 있긴 해도 배우상은 조금 다르잖아.”
A와 B 두 배우가 연기를 잘한다면, 외국어를 사용하는 배우보다 자국어를 사용하는 배우에게 더 무게가 쏠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자막으로 뜻을 이해하더라도 언어를 통해 느껴지는 기백 또한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영어를 외국어로 사용하는 배우보다 모국어로서 사용하는 이들이 더 유리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배우상은 지금까지 영미권 배우들이 대부분을 차지해 왔다.
다른 국가, 미국 비주류 인종이 후보자로 선정된 경우도 없진 않았으나 그들도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한 국가 출신들이었지, 태화처럼 아예 다른 언어권 배우가 후보로 오른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태화를 선정할 때도 심사 위원들은 자신들이 올바른 결정을 한 것인지 상당히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외국인으로 따지면 영국 출신들도 참 많은데······.”
“뭐, 할리우드에게 영국은 거의 연리지나 부모 형제 같은 거니까.”
영국 영상계는 그 규모가 작은 편에 속해, 대부분의 작품은 영미 합작으로 이뤄졌다.
게다가 신분에 막혀 미국에서 활동하는 경우도 많아, 영국에서만 활동하는 영국 배우보다 영미에서 동시에, 또는 미국에서만 활동하는 영국 배우의 수가 더 많았다.
“사실 수상까진 힘들 가능성이 높지만······. 한국계가 아니라 한국인으로 골든 글러브 레드 카펫을 밟는 건 태화 네가 처음이니까. 어쩐지 감동스럽다.”
연락받았던 때가 다시 생각난 현규는 코를 훌쩍였다.
매니저라면 누구나 자신의 배우, 자신의 연예인이 최고로 잘나가길 바란다.
그것은 비단 한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계로 뻗어 나가 국제적으로 인정받길 원하는 마음이었다.
물론 점차 현실을 알게 되면서 그냥 손해만 나지 말자, 해체만 되지 말자로 바뀌는 경우가 잦았지만 말이다.
“······저도 기분 좋네요.”
운전대를 잡고 코를 킁킁거리는 매니저를 향해 태화는 입꼬리를 올렸다.
‘사실 큰 상이 아니고선 가능성이 없다고 봤는데······. 의외야.’
태화가 기쁜 이유는 현규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그는 수상 가능성이 있고 레드 카펫에 오르는 것보다 자신의 연기가 ‘외국인의 벽’을 약간이나마 허물었다는 것에 만족했다.
적어도 수십 번 노력해야 가능할 줄 알았던 길이 의외로 간단히 열렸기 때문이다.
‘그럼 솔직히 국제 영화제 수상을 노리지 않아도 되고.’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일이 어렵기에 선택한 방법.
그러나 이미 입구가 열렸다면, 굳이 돌아가지 않고 제가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해결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야누스가 안 되면 다시 미국 가서 오디션을 알아보는 것도 괜찮겠어.’
오는 배역이 단조롭다면 직접 찾아 나서면 된다.
그렇게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태화는 ‘정조’의 남은 대본을 펼치려 했다.
“그나저나 태화야, 골든 글로브 시상식은 1월 초에 있어서 일정을 좀 조정해야 할 거 같아.”
“아, 그런가요.”
“응. 그래서 아까 감독님하고도 통화했거든?”
현규는 태화가 녹음하고 있던 중 감독과 했던 대화 내용을 풀었다.
축하를 건넨 승찬은 이내 현규의 말뜻을 알아듣고 일정 변경에 동의해줬다.
오히려 영화 홍보에 도움이 되겠다며 현장은 걱정하지 말란 호탕함까지 내비췄다.
‘한국 최초’라는 타이틀을 달고 골든 글러브의 레드 카펫을 밟는 만큼 태화를 주시할 한국 언론은 무수히 많을 게 분명한 일.
평소 시상식에 참석할 때보다 열심히 꾸며야 하는 건 당연했다.
그가 연락하기 전 이미 BGA를 통해 소식을 들은 나래도 잔뜩 벼르며 ‘태화 관리할 수 있도록 일정 좀 빼 줘!’라는 부탁을 남겼더랬다.
“시상식을 포함해서 일주일이라······.”
“그것도 최대한으로 줄인 거야.”
“참석하는 이상 제대로 꾸미는 게 맞죠.”
현규는 조금 감격한 눈으로 룸 미러 너머의 태화를 바라봤다.
연기에 집중할 수 없어서 참석을 거절하려 들면 어쩌나, 준비 기간을 더 줄이려 들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자신의 배우는 의젓한 소리를 뱉었다.
‘아니지. 태화는 원래 일하고 관련된 일엔 다 최선을 다하는 성격이니까······.’
미국 무대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반드시 참석해야 할 영광스러운 자리다.
연기에 비중을 너무 두긴 했지만 태화는 가야 할 길을 귀찮다는 이유로 도외시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럼 부안으로 돌아가는 걸 조금 앞당기는 게 나으려나요?”
“아니, 괜찮아. 서울 올라온 김에 트레이너도 만나고 내일을 품 휴식을 취하는 걸로 하자.”
기승전작업으로 흐르는 태화의 생각을 막으며 현규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노력은 해도 해도 모자란 것이라 생각했거늘, 태화를 보고 있으면 그것도 틀린 말 같았다.
***
태화가 촬영 도중 잠시 빠지는 일로 촬영 팀이 배우들의 일정을 전체적으로 재조정하며 분주해졌듯, 홍보 팀도 슬슬 시동을 걸었다.
일단 한국에서 주로 사용하는 SNS들에 공식 계정을 생성했고, 메인 페이지를 만들어 유입을 한 곳으로 몰았다.
‘야누스’ 때와 비견되는 일 처리 방식에 태화의 팬들은 만족했다.
아니, 만족할 뻔했다.
└우리 배우님 사진은 왜ㅠㅠ?
태화를 담은 현장 사진이 전부 화장 전이거나, 뒷모습, 역광에 가려지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마레드는 주인공의 얼굴을 공개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드러냈다.
‘괴물’ 때처럼 가 봐야 이미 한 번 쓴 전략이라 식상할 뿐이라며 그냥 공개해 버리라는 항의도 빗발쳤다.
그러나 홍보 팀의 답변은 한결같았다.
[신선도 유지를 위해 이태화 배우님의 분장은 영화 개봉 한 달 전, 트레일러로 공개됩니다. 감사합니다.]
미리 공개하는 건 막을 수 없어도 개봉 전에 식상해지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공개를 미루겠단 뜻이었다.
이미 한 차례 있던 일인지라 마레드는 수긍하면서도 분함을 감추지 못했다.
└저번 밥차 다녀오신 분들도 얼굴 미공개하셨는데ㅠ 배우님, 신비주의 요즘 안 먹혀요ㅠㅠ
└얼굴이 너무 파바박 바뀌어서 이젠 얼굴=스포일러가 돼 버리신ㅋㅋ큐ㅠ
└그래도 주인공인데! 왜 내가 주인공이라 말 못 하니 ㅠㅜ
└타미님들, 대본 리딩 영상 공개됐어여. 같이 보쉴?
물론 개중엔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도 없지 않아서, 그들은 영화 떡밥을 차근차근 푸는 ‘정조’ 홍보 팀에 고마워하고 주어진 정보 속에서 즐거워했다.
특히 진지하게 신하들을 꾸짖는 태화의 정조를 확인하고 호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들은 ‘어서 곤룡포를 입은 배우님이 보고 싶다’라 재잘거리며 하루하루 날짜를 셌다.
└하앍! 여러분! 배우님 골든 글러브 노미네이트됐대요! 허ㅂ댜ㅏ이(말잇못)
└저도 기사 봤어요! 와! 역시 배우님. 한국 영화사 역사를 다시 쓰고 계셔!
└이★미★별★
후보자로 올랐을 뿐 상을 탄 건 아닌데도, 마레드 게시판은 이미 수상을 마친 것처럼 열광하며 ‘잃어버린 고리’와 ‘골든 글러브’에 대한 이야기를 꽃피웠다.
그것은 일부 영화관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야누스’에도 영향을 미쳐, 스크린을 내리기 직전을 화려하게 불태울 수 있도록 도왔다.
***
「오랜만이야, 브라이언. 안녕, 에시?」
「오랜만이군.」
「안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