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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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 당일 저녁 지인들과 짧게 축하 파티를 벌인 태화는 다음 날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를 수많은 기자와 팬, 그리고 카메라가 반겼으나 태화는 짧은 공개 인터뷰만을 마치고 바로 부안 현장으로 향했다.
“오, 월드스타.”
“감사합니다.”
선배 배우들이 짓궂은 환대에 태화는 담담히 감사를 표했다.
놀리는 맛이 없어서인지 좀 어화둥둥 해 주던 이들은 곧 원래대로 돌아갔다.
“축하해, 태화야.”
“감사합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차희가 머리에 가발을 올리며 태화에게 축하를 건넸다.
“하루 정도는 쉬고 올 줄 알았는데 왜 바로 현장에 왔어?”
“쉬는 건 비행기 안에서 12시간 가까이 했으니까요.”
태화가 하얀 한복을 걸치고 곤룡포를 입자 다가온 스텝들이 그의 머리에 상투 가발을 씌우고 라텍스로 분장을 시작했다.
입을 못 움직이게 된 후배를 보며 차희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너도 그 정도면 중독인데. 아직 나이도 젊은 애가.”
“저 올해 서른인걸요.”
“와우······. 그 얼굴에?”
“배우님, 말하지 말아 주세요 주름 뭉쳐요.”
스텝의 주의에 태화가 다시 조용해지자 차희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서른이라 해도 태화의 연기 사랑은 참 유별났기 때문이다.
“난 먼저 가마.”
먼저 분장을 마친 차희는 사뿐사뿐 걸어 세트장으로 다가갔다.
오늘 촬영할 장면은 정조의 문안 인사 장면.
노론의 머리 중 하나인 정순 왕후와 정조가 정답게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었다.
끝
ⓒ 마늘소금
아침에 눈을 뜬 왕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의복을 정갈히 하고 웃어른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는 일이다.
대략 한 시간에 걸쳐 이뤄지는 이 인사는 주로 기 싸움의 시간이 되거나 신하들이 모르는 은밀한 대화가 오가곤 했다.
“주상, 우리는 한배를 탄 몸입니다.”
화완 옹주 복권 사건을 일으키기 전 들어갈 장면을 촬영하는 차희의 태도는 진중하고 은밀했다.
주변에 있는 이들도 혹여나 잡음이 들어가지 않도록 숨을 죽였다.
“예,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차를 손에 얹고 음미하는 태화의 얼굴에선 한 점의 조급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걱정하실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허나······.”
“겁이 나십니까?”
정조 역을 맡은 그는 장지문 밖으로 소리가 나가지 않게 작게 속삭였다.
바람 소리를 닮은 그 음성에 차희는 흠칫하며 두려움이 섞인 얼굴을 했다.
“걱정 마세요. 조정의 대신들은 잘 해 줄 것입니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태화의 미소는 의뭉스러웠다.
분장이 진하게 들어가 표정이 가려질 것 같은데도, 그는 거울을 보고 몇 번 얼굴을 움직여 보인 뒤, 위에 올라간 거죽을 제 것처럼 움직였다.
두껍게 발린 라텍스 때문에 마네킹이 되는 이들과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
특히 노회한 정치가 같은 눈빛은 서늘하면서도 정이 없어, 평소의 태화를 찾기 어려웠다.
“그럼······.”
“소자가 어찌 우당(友黨)을 무시하겠습니까?”
차희의 손을 태화의 손이 조용히 덮고 토닥였다.
분장 덕에 드러난 손에도 군데군데 주름이 보였다.
“걱정하실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왕후 없이 홀로 문안 인사를 온 왕은 여전히 제 속내를 감춘 채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무것도요.”
은밀히 내뱉는 말에는 마치 그렇게 될 거라는 마력이 스며 있어서, 차희는 가발로 무거운 머리를 작게 끄덕였다.
반사판이나 마이크를 들고 있던 스텝들도 숨을 죽인 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일하는 도중 배우에게 빠져드는 것이 좋지 않다는 걸 알지만, 태화가 속삭이듯 전하는 말이 그들에게 누군가의 말을 엿듣는 것 같은, 묘한 감상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컷! 좋습니다! 다들 정리!”
그런 옅은 긴장감은 감독의 컷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태화도 언제 그런 표정을 지었냐는 듯 눈웃음을 치며 차희를 바라봤다.
“수고하셨습니다, 선배님.”
“후, 태화 넌 카메라 앞에만 있으면 기백이 정말······. 아, 고마워요. 가채를 올리지 않아도 이게 참 불편하단 말이지.”
스텝이 차희의 머리에 올라간 화관과 거추장스러웠던 가발 부분을 떼어 내자 그녀는 하던 말을 멈추고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가채를 올리진 않았으나 비녀부터 머리위의 관까지 거추장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태화 배우님도 떼어 드릴까요?”
“전 괜찮아요. 모자만 부탁드릴게요.”
상투 가발은 차희가 한 것처럼 뒤쪽에만 달랑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무게가 무거운 것도 아니었기에 태화는 그 위에 얹어진 익선관만 건넸다.
“배우님, 표정 유지해 주세요.”
“아. 네.”
차희와 달리 한 차례 더 촬영이 있기에 특수 분장 팀 스텝은 그에게 주의를 줬다.
얼굴 근육을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라텍스 표면이 우그러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다.
분주하게 움직이며 다음을 준비하는 이들을 뒤로하고 차희와 태화는 세트를 벗어났다.
“며칠 만에 온 만큼 실수할 줄 알았는데, 진짜 넌 철두철미해.”
“감사합니다.”
“단순히 칭찬하는 게 아니야. 나도 젊을 때 연기에 푹 빠져 살았어서 그래.”
차희는 눈앞에 연기 잘하는 후배를 슬쩍 훑었다.
키는 훤칠하고 외모도 준수하다.
화장한 얼굴이 더 낫다고들 말해도 나이 든 그녀의 눈엔 약간 풋풋하고 단정한 맛이 있는 본판이 더 마음에 들었다.
연기에 열정적인 것도 기특했다.
그 나이 또래 이들이 연기보다 인기나 돈, 이미지에 치중하는 것과 달리 태화는 다양한 배역에 홀려 있었다.
제 일도 열심히 하면서 선배들에게도 둥글둥글하니 미워할 수 없는 후배.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태화가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여가 시간은 얼마나 가져?”
“갑자기 여가는 왜······?”
태화는 의아하다는 눈으로 차희를 응시했다.
가끔 본인의 주변을 가지고 투덜거리긴 해도 태화의 생활에 참견하는 법이 없던 이였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던 사람이 뜬금없이 사적인 영역에 대해 묻는 이유를 알기 어려웠다.
“사실 네가 하루 정도는 푹 쉬고 올 거라 생각했어. 오늘 오더라도 오랜만이니 조금은 헤맬 거 같았고. 근데 아까 보니까 현장에 없었어도 연습을 소홀히 하지 않았던 것 같더라. 솔직히 말하면······ 조금 걱정 돼.”
“아.”
그제야 뜻을 이해한 태화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비행기를 타서 할 일이 없었기에 대본을 읽고 그 안에서 연습을 즐겼다.
축복 속에 있는 동안 현실의 시간이 가는 것은 아니나 대본을 읽고, 다시 분석하다 보면 시간은 금방 갔다.
“연습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어요.”
그러니 결과에 비해 현실에서 소비한 시간은 그녀의 생각만큼 길지 않았다.
구김 없는 해맑은 대답에 차희는 고개를 저었다.
“길고 짧은 게 문제가 아니야. 네가 모든 힘을 연기에만 쏟는다는 게 문제지.”
“네?”
“아직 서른이잖아. 마라톤을 할 때도 완급이 필요한데 넌 마치 전력으로만 달리는 것 같아서 위태로워.”
사실 차희는 여기까지 참견할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맡은 배역에 착실하고 현장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프로에게 왈가왈부하는 것만큼 꼴불견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마음 가는 후배의 행동이, 마치 모든 것을 태우는 불꽃처럼 보여 결국 한마디 하게 됐다.
“나도 20대 땐 정말 미친 듯이 연기했어. 결과는 원하는 바에 못 미쳤어도 정말 자기 전까지 대본을 놓지 않고 연기를 중심으로 돌아갈 때가 있었지.”
그녀는 자신의 젊었던 과거를 회상했다.
얼굴이 사나운 탓에 처음엔 못된 역할들만 제안이 왔다.
당시엔 청순한 인상이 여주인공으로 사랑받았기 때문에 로맨스가 중심이 되는 드라마 속 그녀의 역할은 남주인공의 옆에 붙은 악녀였다.
그래도 노력과 재능이 부족하지 않아 나름의 인기를 얻었고, 상도 탔으며, 원탑은 아니나 주연도 몇 번 맡아 봤다.
그러나 어느 날, 그렇게 앞만 보고 달린 삶이 허무하게 느껴지는 순간을 맞이했다.
제 부모의 장례식 날이었다.
“가끔은 주변을 보는 것도 중요해. 앞만 보고 달리면 중요한 것들을 놓칠 수 있거든. 특히 너처럼 취미까지 전부 일하고 관계되면 진절머리 날 때가 올 수 있어.”
“글쎄요······.”
태화는 모호한 표정으로 차희를 바라봤다.
그녀가 어떠한 조언을 하고 있다는 건 느꼈지만 피부로 와닿지는 않았다.
다리를 잃고 배신당하고 마음을 닫았을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부족했다.
많은 이들에게 자신의 연기를 보여 주고 싶었으며 다른 사람들이 도달하지 못한 곳까지 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한시도 지체해선 안 됐다.
“이해하기 힘든 말인 거 알아. 그런데 시간은 공평하더라고. 돌이켜 보니 내 친구라 할 수 있는 이들은 전부 연예계 사람들이고 취미라 자신 있게 말할 만한 마땅한 것도 없더라. 태화, 넌 취미 물으면 바로 답할 수 있니? 연기와 관련되지 않은 걸로.”
“음······.”
다른 일을 하는 것보다 연기 연습이 더 즐거웠던지라 태화는 말문이 막혔다.
“어느 정도 성공했으니 안주하라는 의미가 아니야. 가끔은 주변을 보라는 거지. 그러다 보면 발견하지 못한 가치들도 볼 수 있고 널 돌아보는 계기도 되거든.”
멀리서 봤을 때 더 잘 보이는 것이 있다.
그것은 비단 타인의 시선만을 의미하지 않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에도 유효했다.
“나이 먹으니까 걱정만 늘어서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젊을 때 가 버린 시간은 돌아오지 않아. 그때만 쌓을 수 있는 경험과 추억도 있는 법이고.”
차희의 진심 어린 조언에 태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회귀 전 가슴 속에 응어리졌던 것을 풀기 위해 정신없이 달린 것은 사실이었다.
현규와 나래, BGA의 직원들 등 그를 최선을 다해 돕는 이들이 많았기에 더더욱 옆 모르고 달렸다.
“빵 만들어 본 적 있어? 빵이나 쿠키를 구울 때는 반죽을 위해 잠시 쉬어 주는 시간이 있어. 그게 있어야 빵이 더 맛있어지고 촉촉해지지. 사는 것도 똑같아. 가끔은 호흡을 고를 시간을 가지는 게 좋아.”
잔소리가 길어져 미안했다며 차희는 태화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 화장을 지우러 사라졌다.
태화는 잠시 멈춰 현장을 훑고 구석에서 통화 중인 현규를 응시했다.
***
선미는 인터폰 너머로 보이는 아들의 모습에 재빨리 문을 열어 줬다.
“어머, 오늘도 부안에 있는 줄 알았는데.”
“이젠 내부 촬영만 남아서 앞으로는 서울 쪽 스튜디오에서 작업할 거 같아요.”
“그럼 집에서 자고 다니는 거니?”
“네.”
“잘됐다.”
태화의 말을 듣고 선미는 참으로 기뻐했다.
그녀는 언제나 외국으로 지방으로 내려갈 때면 일 때문에 가는 것이니 서운해하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나 그런다고 마음이 다스려지는 것은 아니라서, 저녁 식탁의 빈자리를 볼 때면 종종 외로움을 느끼곤 했다.
“앞으론 좀 더 일찍 들어오도록 해 볼게요.”
“일이 네 맘처럼 되는 게 아니잖니. 무리하지 마.”
그렇게 말하면서도 너무 기뻐하는 선미를 보고 태화는 자신의 무심함을 반성했다.
회귀 후 다시 만나게 된 부모님이다.
들어가지 못하는 날에 연락하고, 외국에 있을 때도 시간을 정해 통화했지만 그래도 연기에 빠져 최소한의 행동만 했다는 게, 죄송스러웠다.
평소 회의가 끝나고 저녁 늦어서야 집에 들어오는 우석도 오늘은 일찍 퇴근했다.
“와 있었냐?”
“네. 그런데 그건······.”
그리고 그런 우석의 팔에는 하얀 털뭉치 하나가 올라가 있었다.
“여보, 그게 뭐예요?”
“요즘 외로워하는 것 같아서 한 마리 사 왔어요. 받아요.”
“세상에, 귀엽기도 하지.”
막 젖을 뗀 새끼 강아지는 정말 작고 털갈이를 하지 않아 보송보송한 털로 무장하고 있었다.
두 손에 감기는 강아지를 받아 들고 선미는 어쩔 줄 몰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