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23
‘아무리 그래도 이런 어린애한테 몸 영업이라니, 망할 인간들이 참 많아.’
유라에게 달라붙은 소문은 데뷔 초부터 있던 것으로 꽤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성공을 위해 잠자리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루머.
그룹이 뜨면서 가라앉긴 했지만 그녀가 여러 방송을 뛰는 사이 소문은 연예계 전반에 구석구석 퍼졌다.
‘불이익도 없을 거 같고, 꽤 마음에 드니까······.’
너무 높은 사람에게 찍힌 거라면 이유 불문 멀리하는 게 맞으나 고작 평기자 정도라면 그녀 수준까지 영향을 미치진 못한다.
그렇다면 마음에 드는 후배를 위해 조금 어울려 주는 것도 좋으리라.
‘처음으로 후배라 불렸어. 어떡하지?’
유라는 식사에 집중하는 척 고개를 숙였다.
상민이 잘해 줄 때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따가 번호 여쭤도 될까.’
이번으로 세 번째 작품이었지만 친해진 배우는 손에 꼽았다.
저장되어 있는 배우의 번호는 남자들과 같은 아이돌 출신인 이들뿐.
이상민 같은 원로 배우와는 한 번도 친해지지 못했다.
‘한 걸음씩 나가면 되는 거야.’
그녀도 자신에게 도는 소문은 알고 있었다.
그 말을 퍼트린 이가 누군지도 알았고, 한 번 크게 좌절한 적도 있었다.
‘지지 않아.’
그러나 이 빛나는 세계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음해 때문에 꿈을 포기하긴 싫었다.
“선배님. 오늘도 도시락을 따로 싸 오셨네요.”
이제야 식사를 받아 온 것인지 승우가 식판을 내려놓고 그들 옆에 앉았다.
“승우 후배도 참 부지런해. 오늘 오후부터 촬영인데 하루 종일 나와 있고. 요즘 바쁘지 않아?”
“바쁜 건 맞아도 역시 연기가 중요하니까요. 광고보다 선배님 연기를 보면서 공부하는 게 좋거든요.”
능청스레 답하는 그를 보며 상민은 기분 좋게 웃었다.
이런 참한 청년에게조차 후배를 밟는다는 소문이 도는 동네가 참 고약하게 느껴졌다.
“오후부턴 같이 촬영하겠네요. 유라 씨, 잘 부탁해요.”
“네, 선배님.”
“태화야, 너 연기 잘하더라. 선배로서 분발해야겠던걸.”
“감사합니다.”
태화는 여전히 친하게 구는 그를 미소로 대했다.
연기하러 왔으니 그냥 연기만 하면 좋을 텐데 주변에서 가만두지 않았다.
‘아직 반도 안 지났는데 피곤하네······.’
다른 배우들까지 신경 썼던 터라 더 심력 소모가 컸다.
신인인 그가 관여할 부분은 아니었으나 상황은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점점 독이 오른 PD가 방법을 바꾸려 들었으니까.
‘위기 대응이 이런 능력일 줄이야.’
한 배우의 실수 후 창식의 비틀린 입술을 보는 순간, 머릿속에 경종이 울리고 그가 어떤 식으로 이 상황을 이용할지 자연스레 떠올랐다.
NG가 장기화되면 저 사람은 자신을 비교 대상으로 삼아 사이를 악화시킬 생각이다.
막연히 그럴 것 같단 기분이 들자 태화는 자신도 모르게 장애인 연극에서 다른 배우들을 달랬을 때의 행동을 드러냈다.
‘말로 하면 착착 알아들으니 그때보다도 편해.’
상대의 긴장을 풀어 주고 자신감을 심는다.
장애인들의 경우 싫증 내는 경우도 있어 애먹는 일이 많았지만 ,여기 있는 연기자들은 그럴 일이 없었다.
‘재능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은근히 있다니까.’
‘화술’까지 더해진 그의 설득은 놀라울 정도로 효과가 좋았다.
다들 마음을 굳히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으니까.
PD와의 관계는 이미 돌이키기 힘들다.
그렇다면 틈을 주지 않으면 됐다.
“나도 오늘 태화랑 같이 합을 맞추고 싶은데, 아쉬워.”
“원래 강태양이랑 박가람은 마주칠 일이 적으니까요.”
몇 번 스치긴 해도 대부분 외부 장면이다 보니 오늘 스튜디오 촬영에선 겹치지 않았다.
‘연기로 부딪치면 좀 더 알기 쉬울 거 같은데······.’
대놓고 드러내는 창식과 달리 승우의 태도는 여전히 의뭉스러웠다.
저것이 단순한 견제인지 아니면 그보다 더한 악의를 가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속이 복잡함에도 태화는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이며 상민과 유라를 챙겼다.
고작 타인의 악의 따위에 질 생각은 전혀 없었다.
***
“저 먼저 가 보겠습니다.”
“승우 후배, 잘 가.”
“다음에 봬요.”
“수고하셨습니다.”
저녁엔 광고 촬영이 있던지라 승우는 지금껏 남아 있던 촬영장을 벗어났다.
차에 타기 전 잠시 태화를 응시하던 그는 묘한 미소로 손을 한 번 흔들곤 밴의 문을 닫았다.
“자, 자! 다들 2시간만 더 힘냅시다!”
주연 하나가 사라지고 창식은 작게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묘하게 착착 끝난 덕에 이미 찍으려던 분량까지 확보했지만, 대여 시간을 허투루 쓸 생각이 없을뿐더러 아직 태화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지 못했다.
‘건방진 새끼.’
신인답지 않게 빈틈없는 그를 욕하며 창식은 어느새 다른 배우들과도 친해진 유라를 쳐다봤다.
마음에 드는 게 하나 없었다.
승우가 사라지자 태화는 한시름 놓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을 바라보던 그의 눈빛은 깊게 가라앉았다.
그와 반대로 친한 척하는 모습은 변하지 않아서, 다가온 배우들은 ‘드라마랑 다르게 참 사이좋네’라는 말을 남겼다.
‘······이것도 일종의 괴롭힘인가.’
차라리 눈치 못 챘다면 편했을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하던 태화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가 알아차렸기 때문에 승우는 완벽한 가면을 쓴 것이리라.
“두 달간 괴롭겠네······.”
“왜 그래요, 태화 씨?”
“아뇨. 드라마 환경은 참 열악하구나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의 대답에 유라는 작게 탄성을 지르고 웃었다.
얼굴엔 피로가 쌓였는데도 그녀의 표정은 밝았다.
“그래도 전 너무 즐거워요.”
“그래요?”
“네, 다 태화 씨 덕분이에요.”
유라는 들뜬 눈으로 태화를 응시했다.
그와 연습하면서 꽤 많은 진전이 있었고, 그 덕인지 오늘 촬영할 때마다 의외라는 시선을 받았다.
물론 ‘황바다’라는 역이 자신의 성격과 비슷한 탓도 있었지만 태화와 합을 맞출 때면 더 자연스럽게, 그리고 더 바다다운 연기를 펼칠 수 있었다.
‘······받아들여진 기분이야.’
인기에 탑승해서 연기 흉내 내는 아이돌이 아닌 배우로 받아들여졌다.
1년 만의 성과가 너무나 기뻤다.
좋아하는 유라를 보고 태화도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분명 괴로운 일도 있겠으나 이 드라마를 찍게 된 것이 후회되진 않았다.
***
“상식아, 오늘도 수고했어.”
“네, 형.”
밤늦게 집에 도착한 승우는 소파에 앉아 대본을 훑었다.
자신의 대사가 아닌 태화가 연기한 부분이었다.
‘나쁘지 않아. 아니, 오히려 좋아.’
그는 태화의 연기를 떠올렸다.
합을 맞춰 보진 못했으나 유라를 대하던 모습은 ‘가람’ 그 자체였다.
건방지지만 주변인들에겐 자신도 모르게 약해지는 남자.
방심하던 스텝들이 실수를 일으킬 만큼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다.
‘그래도 완전히 성장한 건 아니지.’
완성형이 아니라는 게 소름 돋았지만 본인의 연기력보다 보는 눈이 더 뛰어난 승우는 태화의 성장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아챘다.
타인까지 극으로 빨아들이는 주제에 성장 중이라니, 괴물 그 자체였다
‘확실히 최 작가가 보는 눈은 있단 말이야.’
대본을 덮은 승우는 수조에 먹이를 뿌렸다. 하루 종일 굶었던 열대어들이 수면으로 입을 벌렸다.
다들 강태양을 맡은 것이 이미지 변신을 위한 노력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 승우는 이 역을 받아야 할지 고민했었다.
그의 본질이 누구보다 강태양을 닮았으니까.
차갑고 계산적이며 이익을 위해선 가족도 버릴 수 있는 이기적인 남자.
가면 위에 자신의 사진을 붙이는 우스꽝스러운 짓을 하다 실수로 가면까지 벗어 버릴 것 같아, 승우는 그 선택을 ‘무당’에게 맡겼다.
‘뭐 강태양이란 인물이 바다 같은 인간을 사랑하는 건 전혀 이해가 안 되지만.’
먹이를 다 뿌린 그는 몸을 돌려 여전히 대기 중인 매니저를 응시했다.
드디어 ‘수고했다’라는 말이 ‘가 봐라’는 말과 동의어가 아닌 걸 이해한 그가 기특했다.
“상식아.”
“네, 형.”
“태화한테 장난 좀 걸어 봐.”
장난이란 소리에 부동자세로 기립하고 있던 상식은 몸을 굳혔다.
승우가 말하는 장난은 진짜 장난이 아니었다.
알레르기가 있는 재료를 안 보이도록 섞는다든가, 실수로 아메리카노 같은 뜨거운 음료를 부어 버린다든가.
까딱하면 응급실로 실려 갈 행동이 그가 말하는 ‘장난’이었다.
“······저번에도 그랬고 의심하지 않을까요?”
“벌써 한 달 전이잖아. 슬슬 긴장 풀려서 덤벙거릴 때도 됐지. 그리고 상식아?”
태연히 중얼거리던 그는 생긋 웃으며 상식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