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231
자신의 존재감만 지우면 될 거라 생각했던, 태화의 실책이었다.
“울 배······? 아 이태화?”
“그렇게 함부로 부르지 마. 배우님이 너보다 나이 많거든? 존경을 담아 부르라고.”
“꼴값 떠네.”
여성이 목소리를 죽인 채 윽박지르자 친구는 질색이란 얼굴로 여성을 쳐다보곤 태화와 선미를 향해 턱짓했다.
평소 그녀가 얼마나 태화를 좋아하는지 아는 탓이다.
“그렇게 좋아하는데 사인받으러 안 가?”
“어휴, 이래서 머글은.”
“뭐?”
“딱 봐도 어머님이랑 나오신 거잖아. 어머님도 참 고우시지. 암튼 저런 사생활은 팬으로서 보호해야 한다고. 팬이 돼서 사람들 시선을 모으고 불편하게 하면 안 되는 거야. 매너 없긴.”
“뭐, 이 병······.”
한심하단 눈으로 바라보는 친구를 무시한 채 여성은 초롱초롱한 눈빛을 지우지 못한 채 모자(母子)를 응시했다.
“이따가 으슥한 데로 가서 쓱싹해야지.”
“······나 너랑 다니기 급 싫어진다.”
친구의 타박에도 그녀는 아닌 척 열심히 태화를 따라가, 결국 인적이 드문 곳에서 사인을 받고 함께 사진까지 찍었다.
마레드에 인증 사진이 올라간 건 고작 5시간 뒤의 일이었다.
끝
ⓒ 마늘소금
백화점에서 태화를 알아본 사람은 그녀뿐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들 태화가 얼굴을 숨기고 있음에도 알아볼 정도의 열성팬들이었고, 그들은 ‘우리 배우님’이 곤란하지 않도록 배려할 줄 알았다.
“우리 아들 인기 많네.”
“오늘따라 알아보는 분들이 많네요.”
태화는 머쓱하다는 듯 그녀에게 웃었지만 사실 그 이유를 알았다.
혼자라면 상황과 배경에 녹아들었을 것이리라.
영화관에 죽치고 있을 땐 심한 경우 한 명도 못 알아봤으니까.
그러나 선미라는 눈에 띄는 외모의 소유자가 옆에 있기 때문에, 태화의 위장은 완벽할 수 없었다.
물론 그런 말을 한다면 선미가 속상해할 것이 뻔히 보여 모른 척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오랜만에 단둘이 외출한 결과는 퍽 성공적이라서, 집에 돌아가는 선미의 얼굴은 밝았다.
[오늘 배우님을 만났습니다]
오늘 친구랑 백화점에 놀러 갔다가 계 탔습니다!
무려 우리 배우님이 어머님과 함께 등장······!
개인 시간인 건 알지만 워낙 만나는 게 희귀 몬스터급이라 ㅠ
방해 안 되시도록 재빨리 사인과 사진만 함께 찍고 ㅌㅌ
사실 오늘도 꽁꽁 숨으셔서 계 못 탈 뻔했는데, 옆에 계신 어머님이 워낙 미인이셔서 눈길이 가더라고요!
보니까 아버님은 이번 영화 정조분장 닮았다던데 유전자의 우월함이란 ㄷㄷ
인증 사진 올립니당(전 오징어라 가림)
(제목 없음.jpg)
└배우님 눈웃음치는 것 좀 보소······. 잔망끼가 나라 여럿 말아먹었을 웃음이네 ㄷㄷ
└와, 다른 게시글에도 어머님 때문에 눈길이 가다가 알아차렸다던데 도대체 어머님 외모는 ㄷㄷㄷ ?
└ㄹㅇ 우월한 유전자······.
평소 ‘위장’의 재능으로 자신을 감추고 다니기 때문에 인파 속에 섞인 태화를 알아차리는 건 어려웠다.
덕계못이 아니라 그냥 발견 자체가 안 됐고, 그렇다 보니 갈증만 더해졌다.
그러나 오늘은 무슨 일인지 계를 탄 사람들이 우후죽순 등장해 인증 사진을 남겼다.
왜 하필 자신은 아니냐며 분함을 드러내는 이들도 있었으나 배우의 일상을 봤다는 것에 즐거워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팬텀님들 기사 보셨어요? 어떤 기레기 하나가 배우님 어머니 들먹이며 조회수 올리고 있어요 ㅠㅠ
└안녕하세요. 마레드 운영자 엘리스입니다. 이런 찌라시는 클릭수로 먹고 삽니다. 다들 병먹금하세요. 이미 캡처 끝내서 BGA와 배우님의 매니저 측에 전달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와 일처리 속도가 LTE급 ㄷㄷ 수고하십니다.
그러는 와중 ‘톱스타 L모씨. 미모의 중년 여성과 데이트?’란 수상한 제목으로 한 개의 기사가 올라갔다.
제목과 앞쪽 기사만 읽으면 마치 태화가 중년 여성과 스캔들이라도 터트린 것 같았고, 마지막에도 여성의 신원이 어머니로 못 박아지지 않고 ‘~~것 같다’로 끝나 어머니와 데이트인 척하는 스폰이 아니냐는 의혹을 만들었다.
전형적인 흠집 내기 찌라시라 항상 태화에 대한 기사들을 체크하는 마레드 운영자들은 재빨리 증거 사진들을 찍어 BGA 법무팀에 넘겼다.
소속사 최고 배우가 터무니없는 오명을 뒤집어 쓸 것 같자, BGA도 빠르게 대응하며 반박기사를 내고 상대편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해버렸다.
연예인치고 상당히 과격한 대응이었으나 BGA는 ‘테러와의 협상은 없다’를 외치는 미국처럼 상대방을 영혼까지 탈탈 털었다.
일종의 본보기였고, 몇 시간 만에 소문을 들은 다른 신문사들은 함께 침몰하기 싫어, 태화가 선미와 데이트한 것이 마치 훈훈한 미담이나 되는 것처럼 포장해 BGA 편에 섰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렇게 2차적으로 뿌려진 기사들엔 태화의 효자 이미지가 두드러졌고 선미의 미모에 대한 글이 쏙 빠졌다.
네티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런 의도는 퍽 잘 맞아떨어져 선미에 대해 궁금해하던 이들은 곧 태화의 인간성에 초점을 맞췄다.
호기심이 줄어들자 ‘연예인과 관련 있다고 일반인까지 건들지 말자’라는 최근 풍조가 우세한 것이다.
덕분에 태화에게 ‘바쁜 일정에도 가족과 시간을 보내려는 인간적인 톱스타’란 이미지가 추가됐다.
└여러분 배우님 개인 계정에 올라간 두부 영상 보셨나요 ㅠㅠ 대박 귀여워요ㅠㅠ
└으먀뮤ㅠㅠ진짜 커엽. 이름도 두부야.
태화는 록셀이 만들어준 파랑새 계정을 여전히 이용했다.
록셀과 브라이언 등 친한 배우들과 소소하게 소식을 주고받는 용도였는데, 본인임을 드러내기 싫어서인지 작품에 관한 내용은 하나 없고 일상 내용만 종종 업로드 됐다.
업로드 빈도가 상당히 낮았으나 마레드에겐 미칠 듯이 소중한 정보였다.
└배우님 서툰 거 티나곸ㅋ 저런 개인 계정은 잠가놓는데 하는 법도 모르셔 ㅋㅋ큐ㅠ
└덕분에 저희는 기쁘죠!
└하······. 배우님이 두부야, 두부야 부르는데 두부가 되고 싶었습니다. 왜 제 이름은 두부가 아닌가요?
└2222 완전 목소리 달달 ㅠ
└괜히 팔로우해서 배우님 놀라게 하지 않긔 우리가 배우님의 순수를 지켜드립시다!
└최근 업로드 자주 있어서 팔맛나요ㅎㅎ
혹시나 비공개로 돌리면 이 단물도 끝이기에 다들 태화의 개인 계정 정보를 퍼트리지 않았다.
물론 마레드를 확인하는 현규나 나래도 그 사실을 알았으나, 그들은 모른 척 태화에게 ‘혹시라도 알려질 수 있으니 중립을 벗어난 발언은 피해라’란 조언만 남겼다.
이 방법이 하나의 소통으로 자리 잡았다는 걸 알아서다.
나름의 균형을 맞추며 팬과 배우는 은근히 잘 지내고 있었다.
***
태화는 애드리브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사전에 상대 배우 동의 없이 진행되는 애드리브는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본인만 돋보이게 할 수 있을뿐더러, 가끔 작품의 의도를 해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돌발 상황 탓에 일어난 것이면 모를까, 제멋대로 해석해서 내놓은 답은 감독의 의도를 무시한 월권이라 생각했다.
“무정한 님이 그리워 그러는 것을, 내 어찌 말리겠느냐.”
그러나 오늘, 태화는 씁쓸한 얼굴을 한 채 대본에 없는 대사를 뱉었다.
심환지가 찢어버리라는 어명을 어긴 채 어찰을 모으고 있단 이야기에 대한 답변이었다.
원래 대사였던 ‘환지는 그럴 이가 아니니 되었다’와 거리가 있었으나, 신하를 향한 복잡한 심경이 훨씬 더 잘 드러났다.
“······알겠습니다.”
갑자기 다른 대사가 튀어나왔음에도 김신후 역을 맡은 배우는 베테랑다운 태도로 자연스럽게 다음 대사를 읊었다.
“컷!”
갑자기 다른 대사가 끼어들었음에도 감독은 바로 멈추지 않고 원래 끊어야 하는 장면까지 카메라를 돌렸다.
상대 배우가 잘 따라가는 데다 바뀐 대사로 찍힌 장면이 나름 괜찮았던 탓이다.
‘음. 안되려나.’
컷이 외쳐진 후, 화면을 돌려 확인하고 있는 승찬을 보며 태화는 살짝 입맛을 다셨다.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원래 대사로 다시 가면 되겠지만 약간 아쉬웠다.
‘정조의 캐릭터가 너무 인간미 없게 그려지는 것 같아서 바꿨는데 말이지.’
정국을 제 손 위에 올려놓고 입맛에 맞게 조종하는 왕.
그러나 그 모습이 너무 기계 같고, 다른 사람의 마음마저 이용하는 것 같아서 태화는 부러 완벽한 캐릭터에게 ‘빈틈’을 만들었다.
사실 이 편이 어려움 난이도에서 훨씬 동기화 점수가 높았기 때문에 감행한 점도 없지 않았다.
“문수 선배님 죄송합니다.”
“아냐. 솔직히 난 네가 한 쪽이 좋았어. 항상 대화할 때마다 정조가 상대들을 농락하는 듯한 기분이었는데, 오늘 대사는 왠지 아, 이 사람도 사람이구나란 느낌이 들었거든.”
“감사합니다. 잘 받아주신 덕에 살았어요.”
태화는 사전 동의 없이 대사를 마주 해야 했던 권문수에게 사과했다.
영화는 즉흥극이 아니었고 대사는 정해져 있었다.
다음 대사를 준비하고 있는 상대방에게 갑자기 다른 말을 꺼내는 건, NG를 일으킬 뿐 아니라 상대의 연기 템포를 무너트릴 수도 있는 비매너였다.
“좋습니다. 오케이.”
앞을 돌려 지금 찍은 장면을 확인한 승찬은 곧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대기 중이던 스텝들은 그제야 분주하게 움직였고 배우들도 카메라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태화씨. 잠시만.”
분장을 정리하려던 태화는 감독의 부름에 발걸음을 돌렸다.
기분이 상한 건지 잠시 걱정이 들었으나 다행히 승찬의 얼굴엔 언짢음이 없었다.
“일부러 바꾼 거야?”
“······네. 해석이 바뀌면서 정조가 상당히 계산적이고 냉혹한 인물로 바뀌었는데, 그렇게 가면 작품은 매끄러워도 주인공으로서의 매력은 많이 부족해 보여서요.”
태화는 살짝 긴장한 채 승찬을 응시했다.
감독 중에는 자기 작품에 대한 애착이 강한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배우가 자신이 만든 작품을 그대로 따라 하는 소품이라 생각했으며, 제멋대로 움직이는 걸 월권이나 자신에 대한 도전이라 생각해 길길이 날뛰었다.
그가 그런 류의 감독이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겪기 전엔 모르는 법이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 배우가 자기 역할에 대해 그리 말할 수 있지. 사실 나도 진휘 대본 보고 주인공 캐릭터가 조금 밋밋하단 느낌이 있었거든. 덕분에 편집 방향을 정확히 잡았어. 고마워.”
“아뇨. 그리 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연히 일어난 것도 아니고 배우가 작정하고 대사를 바꿔버렸으니 감독으로서 기분 나쁜 게 당연하다.
그런데도 자신의 부족한 점을 먼저 되짚는 모습을 보자, 태화는 이번 현장이 상당히 축복받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이제 일주일 뒤면 크랭크업인데 계획 있어?”
“아직은요.”
‘야누스’가 프랑스 내에서 인기를 얻었다곤 하나 칸에 초청될지는 4월 중순까지 미지수.
어차피 쉬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태화는 어떤 식으로 여가를 채울지 아직 고민 중이었다.
“뭐, 태화씨니까 잘하겠지. 크랭크업까지 잘 부탁하고, 6월 홍보도 잘 부탁해.”
“네.”
승찬 감독의 말에 대답한 뒤 태화는 다음 장면을 준비하기 위해 분장 스텝을 찾았다.
촬영이 막바지에 다다른 만큼 힘내야 했다.
***
“수고하셨습니다!”
일주일이 채워지기 하루 전.
드디어 ‘정조’의 촬영이 모두 종료됐다.
배우들과 스텝들은 서로에게 박수와 고생했다는 말을 건넸다.
“회식합시다! 소고기로!”
“와아!”
승찬이 성격에 안 맞게 카드를 번쩍 들며 외치기 무섭게 다들 고단함을 잊고 소리를 질렀다.
소고기는 어느 순간이든 옳았다.
“태화야 수고했어.”
“형도요.”
“나야 항상 보는 것밖에 못했는걸.”
현규가 오늘 찍은 현장 영상을 건네며 웃자 태화도 따라 웃었다.
“형에겐 언제나 신세 지고 있어요.”
“에이, 나야말로 그렇지. 아참, 이거. 아까 서연씨가 보내줬어.”
비실비실 웃던 그는 방금 찍은 영상을 확인하는 태화에게 또 다른 종이들을 내밀었다.
고작 두어 장씩 묶여있는 서류들로 대본이나 시놉시스라 보기엔 조금 많이 얇았다.
“뭐예요?”
“저번에 말했던 시즌제 예능들.”
“아.”
예능의 트렌트가 바뀌면서 배우들이 잠깐 들어가기 좋은 예능들이 늘었다.
작품을 고르면서 쉬엄쉬엄하기 좋은 예능들.
따로 몸개그나 억지웃음을 요구하지도 않아서, 배우들도 꽤 흥미를 가지고 참여했다.
“촬영 기간이 짧고 힐링 위주로 잡았더라.”
“그거 좋네요.”
태화는 종이들을 팔랑팔랑 확인했다.
과연 이 중에 제 구미에 맞는 프로그램이 있을지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