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236
상냥한 웃음은 상대를 안심시키는 힘이 있어서, 아콰시도 그를 따라 웃었다.
“통과할 때까지 봅니다.”
하지만 봄바람 같은 웃음과 달리 내뱉어진 말은 서릿바람을 몰고 왔다.
그것도 만년설처럼 단단하고 녹지 않을 차가움이었다.
“촬영 끝났다고 놔주지 않을 거니 부디 제대로 외워 오면 좋겠네요.”
“······네.”
“오늘은 여기서 끊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렇게 첫날의 해야 할 일들이 전부 마무리되자, 출연자들을 응시하던 PD가 끝을 고했다.
태화와 다른 멤버들 뒤쪽에 꽂혀 있던 마이크가 회수되었고, 집중됐던 카메라도 사라졌다.
“수고하셨습니다, 여러분. 그리고 아까 말이 강했던 점 사과드리겠습니다. 저 아는 친구들은 좀 울컥해야 제 실력을 발휘하다 보니 버릇처럼 그리 행동했네요.”
촬영이 끝난 후 보이는 준성의 모습은 처음과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촬영 중 보였던 친절이 가시지 않았고, 그의 입가엔 여전히 미소가 감돌았다.
“어이쿠, 아닙니다.”
아콰시가 구수한 한국어를 내뱉으며 손사래 쳤다.
그는 엉뚱한 자신의 질문에도 짜증 한 번,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고 대답하는 준성을 보며 꿈틀거리던 반발심을 완전히 풀었다.
심지어 준성이 가나 음악에도 흥미를 가져 준 덕에 처음의 나쁜 인상은 호감으로 돌아선 지 오래였다.
“오늘 잘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는데 우리 편하게 말하죠. 첫날이라 군기를 잡긴 했어도 원랜 그런 성격이 아니거든요.”
바로 경계를 푼 아콰시와 달리 호덕은 준성의 태도에서 가식을 느꼈다.
견적을 재 보고 적당히 쓸 만하니 처음 보였던 강한 모습을 버리고 친근한 이미지로 다가서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아, 그럴까?”
그러나 호덕은 그 점을 집는 대신 웃으며 맞장구쳤다.
상대가 쓸모없는 인맥도 아니고 이러나저러나 30일 동안 봐야 할 사이인데, 굳이 덮으려는 내용을 끄집어 척을 질 필요가 없다.
사회생활, 인간관계라는 게 원래 다 그랬다.
“저도 형이라 불러도 될까요?”
“아, 좋지. 우리 애들도 날 대표님보다 형이라 부르거든.”
최준도 분위기를 흐리지 않고 넉살을 피웠다.
한국 3대 기획사라 불리는 JB의 대표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 별개로 안면을 트는 게 손해는 아니었다.
그렇게 계산이 오가는 이들과 달리 태화는 별생각이 없었다.
처음부터 준성의 말에 앙금이 생기지 않았을뿐더러 외려 음악에 있어서 그가 대단한 인물임을 인정한 상태였으니까.
장 피엔 때와 마찬가지로 태화는 준성에게 감화되지 않았다.
단지 음악을 배우는 데 있어 강준성을 믿고 따라도 된다고 인정했을 뿐이었다.
“현규 형. 가요.”
“어?”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안녕······.”
“형.”
화기애애한 이들을 뒤로하고 태화가 등을 돌리려는 순간, 준의 목소리가 태화를 붙잡았다.
“30일 간 호흡을 맞추려면 좀 더 친해지는 게 좋잖아요. 그래서 이따 친목회를 가질 건데······ 바쁘세요?”
그룹 채팅이 가능하도록 연락처도 교환해야 하고요.
뒤에 따라붙은 말에는 약간의 사심이 섞여 있었으나, 그것을 눈치챈 것은 태화가 아닌 다른 이들이었다.
준성은 맹랑하다는 눈으로 최준을 힐끔거렸고, 아콰시는 무언가 신호를 받았다는 듯 진지한 모습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태화 씨. 오늘은 함께 친목을 다져야죠.”
영화나 드라마 촬영 현장에선 회식이 있는 경우 감독이나 주연 배우가 미리 말을 전하고 즉흥적일 때는 촬영이 끝나자마자 선언하듯 소리친다.
회식이란 단어 그대로 현장에 남은 스텝들이 전부 참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능의 경우 첫 녹화 날만큼은 되도록 회식을 갖지 않았는데, 출연하는 이들이 서로 알아갈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대본을 보고 역할의 관계만 생각해면 되는 작품 촬영과 달리 예능에서는 가식과 실제 모습이 섞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따라서 좀 더 부드러운 전개가 가능하게, 연예인들끼리 어울리도록 내버려 뒀다.
“아, 예능은 처음이라 잘 몰랐네요. 미안해요.”
태화는 목덜미를 붉히며 사과했다.
현규가 당황하기에 뭔가 잘못됐나 의아했었는데, 바로 뒤에 따라붙은 준과 아콰시의 말이 그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보통 배우들끼리 술자리는 좀 친해진 다음에 가졌으니까······.’
그는 익숙하지 않았다며 슬쩍 자신을 합리화했다.
붙임성 좋은 효신과 강원도 처음 만난 날 다짜고짜 술자리를 함께하자고 하진 않았다.
술자리는 어느 정도 안면을 익힌 후에 조심스레 권해졌고, 굳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상황도 많았다.
‘······하긴. 대본이 연결점이 되는 거랑 다르지.’
연예계에 발 담근 지도 벌써 5년이나 됐거늘 어쩐지 방금 막 데뷔한 것처럼 느껴졌다.
배우 업계보다 더 친밀한 관계는 미지(未知)를 접하는 것과 같은 두근거림을 태화에게 안겼다.
“준성이 형도 갈 거죠?”
“물론이지. 아, 그 전에 잠시 태화 씨랑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는데 조금 늦게 출발해도 괜찮을까?”
아콰시의 제안에 시원스레 답한 준성은 태화를 바라보며 눈짓으로 동의를 구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감을 잡지 못한 태화는 잠깐 생각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악의를 가진 것 같지 않은데다, 그가 할 말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형, 안 오면 전화하려는데 연락처 먼저 교환하면 안 돼요?”
“······그래요.”
어쩐지 애절하기까지 한 부탁에 태화는 자신의 번호를 준에게 건넸다.
곧이어 태화의 폰 스크린에 낯선 번호가 반짝였다.
“제 번호 저장하시고요. 아콰시 형이랑 호덕 형한테는 제가 번호 알려도 괜찮아요?”
“그래요.”
단체 방을 만들려면 어차피 필요한 과정이기에 태화는 선선히 허락했다.
무엇이 그리 기쁜 것인지, 배시시 웃던 준은 ‘빨리 오세요!’ 라는 말을 남기고 다른 멤버들과 함께 사라졌다.
“위층에 휴게실이 있으니 그리로 가죠.”
연습실을 벗어나는 두 무리를 확인하고, 준성은 태화를 이끌었다.
***
최준은 차에 타자마자 구르듯 의자에 안착했다.
그리고 화면에 찍힌 번호를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렇게 좋냐?”
“그럼 안 좋겠어? 으아! 진짜 우리 형 번호다! 나 계 탔어!”
“어휴······.”
매니저가 한심하게 바라보는데도, 준은 괘념치 않으며 의자 위를 뒹굴었다.
“이 빠돌이 자식.”
“아니거든? 솔직히 우리 형 연기 보면 반하는 게 당연하지 않아? 눈빛이며 분위기며 차원이 다르잖아!”
“잘 나가는 배우가 맞긴 한데 뭐 그렇게까지······.”
“형 눈이 똥이라 그래! 그런 진짜는 엄청 드물거든? 어떻게 진짜랑 가짜를 못 알아봐?”
준은 그러니 맨날 쪽박 차는 작품만 귀신같이 고르는 거라며 매니저를 타박했다.
“솔직히 이, 삼십 대 남자 배우 중에서 진짜 연기하는 배우는 현태 선배님이랑 우리 형 정도라고? 근데 형은 톱 배우라고 다 똑같은 줄 아니······ 어휴, 그런 눈을 가지고 나중에 어떻게 매니지 차려서 독립하려고 그래?”
“시끄러워.”
매니저의 짜증에도 준은 재잘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확 다른데 진짜 모르겠어? 난 저게 진짜 배우구나 싶어서 냉큼 연습생 때려치웠는데.”
“······난 왜 널 따라왔을까?”
“트레이너 선생님이 ‘너넨 준이 없으면 데뷔 힘들 거다.’라고 맨날 쪼는 거 듣고 따라왔으면서 무슨.”
준은 새삼스럽다는 태도로 매니저의 한탄을 비웃었다.
아이돌로 시작해 어느 정도 자리 잡고 배우로 전향하려던 준은 ‘겨울나기’의 오현수를 보고 그날로 연습생 생활을 그만뒀다.
데뷔가 1년도 채 안 남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멤버들이 비난했으나, 그는 편법을 통해 올라가려던 자신이 부끄럽고 바로 연기가 하고 싶어 무작정 계약을 해지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약간의 잡음이 생길 뻔했다.
처음부터 지원비 없이 깔끔하게 계약서를 작성했음에도 준을 놓치기 싫었던 기획사 측에서 ‘관례’를 들먹였으니까.
하지만 부장검사인 준의 큰형이 뒤에서 버티고 있었기에, 준은 별문제 없이 연예 기획사를 빠져나와 몇 달 뒤 배우로서 데뷔할 수 있었다.
“형은 진짜 우리 형 연기 보면서 아무 것도 안 느껴져? 난 겨울나기 마지막에서 우리 형이 눈물 흘릴 때 그게 형 인생 연기인 줄 알았다가 점점 발전하는 거 보고 슬슬 신이 아닌지 의심되던데.”
“······참 잘나셨어요.”
“응. 나 원래 잘났잖아. 최씨네 막둥이가 잘나지 않으면 누가 잘났겠어?”
“······어휴. 말을 말자.”
말이 통하지 않자 매니저는 질린 얼굴로 대화를 그만두고 시동을 걸었다.
큰형과 열 살 차이 나는 막둥이다 보니 준은 스물셋이란 나이에도 어린 구석이 있었다.
그런 매니저의 태도에도 최준은 스마트폰 화면에 뜬 번호를 보며 기뻐하기 바빴다.
“나 이번 예능으로 친해져서 다음 작품 같이하고 싶은데, 되려나? 우리 형이 주인공하고 난 형, 동생 역 하면 좋겠다.”
“······하려면 주인공을 해야지. 근데 맨날 이태화만 우리 형이라 불러서 형님들이 슬퍼하시겠다.”
막내를 오냐오냐하는 걸로 따를 자가 없는 이들을 매니저가 언급하자 준은 코웃음 쳤다.
“형이 끼는데 내가 주연이라니. 조연한테 눌리는 조연이 얼마나 꼴불견인지 몰라? 그리고, 강이 형님이랑 현이 형은 그런 걸로 안 삐지거든? 형님들이 형인 줄 아나.”
“······넌 진짜 개념 학습부터 해야 하는데.”
“아, 밖에서 안 새니까 됐잖아! 맨날 나한테만 뭐라 그래.”
“내가 앓느니 죽지······.”
철없이 투덜거리는 준의 행동에 매니저는 한숨을 내쉬며 약속 장소로 차를 몰았다.
연예 기획사를 나와 배우 기획사로 들어간 뒤 준의 전속 매니저가 되어 최씨 집안에서 따로 수고비까지 받고 있지만, 가끔은, 아주 가끔씩은 애 돌보기가 버거웠다.
***
다른 ‘브레멘’ 멤버들과 헤어진 태화는 준성과 함께 휴게실에 도착했다.
촬영이 일찍 끝났다곤 해도 6시가 넘은 시간이라 그런지, 휴게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까 전에는 말이 좀 심했죠? 다시 한번 사과할게요.”
“아뇨. 저희가 음악을 모른 건 사실이니까요.”
물까지 직접 떠다주는 준성을 보며 태화는 이상함을 느꼈다.
대표씩이나 되는 사람이 이러는 게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뭘요. 태양을 품은 바다에서 노래 부르는 거 보니까 음악에도 소질이 있어 보이던데. 제이 리 선생도 가수 안 한 게 안타깝다고 말했는걸요.”
“아.”
태화는 과거 자신의 가창을 도와줬던 제이 리를 떠올리고 미묘한 미소를 그렸다.
단순히 ‘가창’이란 재능이 생겨 운 좋게 맞아떨어졌을 뿐인데, 크게 평가받는 것이 복잡했다.
‘······내가 노래 불렀던 걸 알 줄은 몰랐는데.’
‘태양을 품은 바다’에서 태화는 주요라고는 하나 주연이 아닌 조연이었다.
때문에 그의 필모그래피 최상단에 위치해 있지만 언급되는 일 자체는 적었다.
“······태화 씨?”
“아, 네. 죄송합니다.”
잠시 데뷔 초를 생각하고 있던 태화는 준성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그가 한눈을 팔았음에도 준성의 눈빛은 부드러웠다.
“아뇨. 그럴 수도 있죠. 차기작도 그렇고 생각할 게 많은 시기니까요. 태화씨는 해외 무대까지 고려해야하니 더 복잡하겠죠.”
“그······.”
“오늘 따로 보자 한 건, 태화 씨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어섭니다.”
“······제안이요?”
“네.”
경계하는 초식동물을 어르듯, 준성은 시종일관 그린 것 같은 미소로 태화를 대했다.
“혹시 멀티 엔터테이너에 관심 없어요?”
그리고 가만히 있는 대어에게 미끼를 던졌다.
끝
ⓒ 마늘소금
멀티 엔터테이너.
일반적으로 만능 엔터테이너라 불리며 연기, 노래, 예능 중 복수의 분야에서 뚜렷한 활약을 보이는 이들을 말한다.
최근 가장 두드러지는 멀티 직업군은 누가 뭐라고 해도 아이돌이었고, JB는 그런 아이돌들이 가장 속하고 싶어 하는 연예기획사 중 하나였다.
“관심 없는데요.”
물론 가수 일에 흥미 없는 태화에겐 무용지물이었지만 말이다.
“······예능도 나왔으니 조금은 고민할 줄 알았는데.”
“눈을 돌리고 여유를 가져보려 참여한 거라서요. 뭐, 여유라기보다 잠시 집중할 무언가가 된 것 같지만요.”
익숙하지 않은 악기로 30일간 연습해서 공연까지 가는 걸 너무 쉽게 생각했다며 태화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강준성 대표님. 일주일 뒤에 있을 테스트는 분기점이 아닌 분발해야 하는 시점으로 바꿔주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