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239
준성과 태화는 멘토와 멘티 사이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적당히 예의를 지키면서도 배우고 익히는 관계에 집중했다.
태화가 준성의 실력에는 마음을 열면서도 인간적인 관심을 가지지 않기에 벌어진 일이었는데, 더 이상 태화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던 준성은 부러 다가가려는 행동을 멈췄고 그것이 이리 굳어졌다.
‘흡수가 빨라.’
태화를 가르치면서 준성은 조금 아쉬움을 느꼈다.
준성이 처음 예상했던 것과 달리, 태화에겐 음악적 천재성이 없었다.
그러나 가르치는 표현을 잊지 않는 뛰어난 기억력과, 그것을 제 손으로 펼칠 수 있을 때까지 연습을 거듭하는 끈기를 지녔다.
‘음악가로서 대성할 순 없어도 연주자로선 성공할 순 있을 텐데.’
음악적 창조성은 부족하지만 마치 극사실주의 화가처럼 악보를 정확히 건반 위에 옮긴다.
만약 태화가 클래식에 집중했다면 수많은 콩쿠르를 휩쓸었으리라.
콩쿠르는 얼마나 악보를 정확하게, 정밀하게 연주하는가의 싸움이었고 태화의 재능은 그런 쪽으로 특화되어있었으니까.
동시에 준성은 자신의 한계를 아는 욕심쟁이에게 감탄했다.
그가 미련의 부스러기를 버리지 못한 채 마지막으로 붙잡았을 때, 태화는 ‘한우물만 파기도 정신없는데, 한계가 정해진 다른 분야까지 신경 쓰기 싫으니 그 이야기는 그만했으면 좋겠다’라고 단호하게 끊었다.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왜 한계부터 정하냐는 안타까움은 태화를 가르치면서 이해로 변했다.
태화는 옳았다.
그럴싸한 떡잎에 홀려 그를 어중간한 길로 이끌려 한 것은 준성 자신이었다.
‘조금 부럽군······.’
준성은 연기에 관해서 아는 바가 적었다.
그러나 태화의 연기가 대단하다는 건 그가 거둔 성적, 아니 그냥 영화관에서 그가 등장하는 작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연기 보는 눈이 없는 이까지 감탄시킬 수 있는 실력자.
그런 인물이 있으니 한국 영화계는 한 차례 더 발전할 것이다.
사십이란 나이는 준성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그 중에는, 그를 아는 이들은 전혀 믿지 않겠지만 가요계에 대한 걱정도 없지 않았다.
이 나이 되도록 ‘이 녀석이라면 날 뛰어넘겠다’ 싶은 인물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보인다고 해서 응원하진 않겠지만······.’
오히려 밟을 가능성이 크다.
준성은 경쟁자들을 전부 짓눌러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일선에서 활동하는 이상, 그는 자신만한 천재가 나온다면 애증에서 증오가 더 클 것을 알았다.
그렇다고 해도 전체적으로 괜찮은 뮤지션들이 적다는 건 점차 파이가 줄어들고 있다는 의미이기에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지오 녀석이 조금 더 가창력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는 잠시 Exstar를 떠올리고 고개를 저었다.
Exstar는 멤버들 간에 사이는 좋아도 시너지가 부족했다.
1+1은 3이 되지 못하고 그럭저럭 2를 채웠다.
그들이 현재 최고 인기를 구가하는 건 멤버 하나하나가 뛰어난 스타성을 지니고 있어서일 뿐이지, 그들의 뭉쳐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젠 표현력을 끌어올리면서 노래 쪽에 신경 쓰는 편이 나을 것 같군요. 아무래도 노래를 부를 만한 여유가 있는 사람은 태화씨와 준이 정도일 것 같으니까요.”
“그런가요?”
“네. 그리고 안무까진 아니지만······. 잠시 나와 보겠어요?”
준성은 앉은키에 맞춰져 있던 키보드를 입식 높이로 조정하고 가볍게 손을 풀었다.
“자, 키보드가 연인이고 애절하게 끌어안는다고 상상해보세요. 침대 위에서 한껏 땀에 젖은 연인을 쓰다듬는 겁니다.”
상당히 노골적인 표현에 태화가 얼굴을 붉혔으나 준성은 전혀 괘념치 않은 채 키보드 건반을 쓸어내렸다.
유려한 손놀림은 느리게 보이면서도 늘어지는 일 없이 정확한 음을 연주했다.
그와 하모니를 이룬 준성의 낮고 깊은 목소리 또한 연습실을 가득 메웠다.
‘굉장하네······.’
태화는 자신이 과연 이 모습을 정확히 따라 할 수 있을지 가늠했다.
그리고 힘들다는 결론을 내렸다.
‘저런 가창력이 나한텐 없으니까.’
목소리에 감정을 완벽히 담는 것은 수박 겉핥기식으로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다년간 피나는 연습과 재능이 받쳐줘야 가능한 일이지, 고작 한 달간 연습한다고 해서 손에 넣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럼 저걸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준성의 노래가 진해질수록 태화의 고민도 깊어졌다.
‘브레멘 음악대’가 받은 곡은 두 가지 분위기를 오갔다.
낮고 흘러내리는 초콜릿을 닮은 끈적끈적한 이음새와 빠르고 시원하게 내지르는 절정.
전자는 피아노가 담당하고 있었으며 후자는 기타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여기서 관능을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준성의 연주를 듣고 있던 태화의 눈이 반짝였다.
흔히 악기를 연주하는 이의 모습이 매혹적이고 섹시하다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관능미 넘치는 모습을 연주에 섞어, 부족한 분위기를 메울 수 있지 않을까.
색기는 목소리나 눈빛에 서리기도 하지만 몸집과 작은 표정에도 섞인다.
준성이 말한 ‘상상력’은 다른 말로 하면 연기였고, 그것은 태화에게 가장 자신 있는 분야였다.
“······태화씨?”
“아, 네.”
“그럼 한번 해보겠어요? 몸짓을 익히는 거니까, 노래는 생략해도 괜찮습니다.”
“네.”
태화는 준성이 서 있던 자리에 서, 건반을 응시했다.
자신의 키보다 낮게 설정된 높이 탓에 약간 허리를 구부려야 했지만 그편이 더 좋았다.
‘받은 악보에서 가장 낮은 음 파트를······.’
태화의 손가락이 느리게 하얀 건반을 건드렸다.
피부에 얇게 크림을 펴 바르는 것처럼, 여인의 손등을 쓰다듬는 것처럼.
사랑하는 연인의 뺨을 손등으로 쓸어내리는 것처럼.
그의 손길은 상당히 농밀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키보드 위를 노닐었다.
“그대여-.”
멤버들의 실력을 고려해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음으로 작곡된 노래는 난이도가 높지 않았다.
특히 멜로디를 키보드가 잡아주고 있는 상황에선 어렵지 않게 따라 부를 수 있었다.
‘하. 내가 또 실수했군.’
태화의 연주를 들으며 준성은 입가를 쓸었다.
담백한 인상을 지닌 태화에게 퇴폐적인 분위기에 섹스어필은 어려울 것이라 예상했다.
그는 태화의 연기를 영화로만 접했고, 영화 속에선 그의 관능적인 부분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지금 보이는 모습은 준성도 보이지 못한 위험한 매력을 뿜었다.
‘······이건 방송 금지 처분받을 수도 있겠는데. 아니, 일단 카메라 각도가 별로니 거기까진 안 갈지도.’
손과 표정, 그리고 몸 전체를 제대로 편집한다면 레전드라 불릴 만한 장면이 나올 것 같은데, 지금 그들을 찍는 카메라는 고작 CCTV처럼 천장 쪽에 고정된 두 대와 키보드 위쪽에 부착된 소형 카메라 한 대가 전부다.
어째서 VJ가 한 명도 따라오지 않았는지 화가 났다.
‘PD에게 말해서 이 장면을 다시 찍는다면. 이 부분만으로 하루 분량을 다 씹어 먹을 수 있을······.’
뮤직 프로듀서답게 준성은 태화의 연주하는 장면을 다각도로 분해했다.
“······이 부분은 내가 가르칠 것이 없었군요.”
그리고 연주가 끝났을 때 어떻게든 이 매력을 대중에게 알려야겠다고 결심했다.
끝
ⓒ 마늘소금
‘브레멘 음악대’의 촬영은 주로 JB 사옥 연습실에서 이뤄졌다.
JB의 홍보를 겸한 것이었는데, 식당이나 회의실 등을 오가면서 마주친 이들은 출연진들을 볼 때마다 호기심을 내비쳤다.
아무리 같은 연예계에 종사한다고 해도 가요계와 예능, 그리고 배우 업계는 나름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태화의 경우 접점이 전혀 없는 축에 속하는 터라 가장 많은 관심에 노출됐다.
“저······. 한 가지만 더 여쭤 봐도 괜찮을까요?”
“네? 네······. 말해 봐요.”
사인을 마친 태화는 종이와 펜을 돌려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멀쩡한 장소 놔두고 화장실에 서서 이러는 게 조금 불편했지만, 눈앞의 앳된 청년이 좀 불쌍하게 여겨져 거절하기 힘들었다······.
데뷔 준비 중인 연습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청년 정하진은 화장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불안한 기색을 숨길 줄 몰랐다.
입구에서 머뭇거리는 모습은 누가 봐도 수상했고, 태화는 그를 경계하며 세면대로 향했더랬다.
-저, 정말 죄송한데, 사인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다가오는 그를 보고 한 걸음 물러서려 했던 태화는 갑자기 내밀어 진 종이와 펜에 순간 반응하는 걸 잊었다.
남자 팬에게서 요청받은 일이 없진 않았지만 화장실에서 이러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그가 종이와 청년의 얼굴을 번갈아 힐끔거리며 불편하단 감정을 숨기지 않자, 하진은 정말 죄송하다며 울먹였다.
-대표님도 하지 말라고 했고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 죄송합니다······. 큽.
-아니, 뭐 그럴 수도 있죠. 사인해줄게요. 울지 말고······.
앳된 얼굴이 남아있다곤 해도 다 큰 성인 남성이 우는 것은 아주 곤란하다.
태화는 당황하며 종이를 받아들 수밖에 없었다.
강준성 대표는 소속 연예인들에게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너희들도 연예인이고 뮤지션인데 왜 같은 연예인 사인을 받으려 부산떠느냐는 것이었다.
맞는 말이지만 반발도 없지 않았다.
가수나 아이돌도 TV와 영화를 보면서 즐긴다.
같은 연예계에 종사하는 것과 상관없이 평소 만나기 힘든 직업군에게 팬심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도 대표의 말을 대놓고 어길 순 없어서, 다들 준성이 보지 않을 때 멤버들에게 다가와 사인이나 사진을 부탁했다.
태화에게도 작품 잘 보고 있다던가, 다음엔 어떤 작품을 맡으면 좋겠다는 가벼운 감상을 남겼다.
······그런 식으로 적당히 요령 있게 행동하면 될 것을, 그의 앞에서 불안에 떠는 연습생은 도도하고 샤프하게 생긴 외모와 달리 겁이 많았다.
-이름은 정하진이라고 적으면 되나요?
-아뇨, 누나한테 부탁받은 거라······. 정하윤으로 적어주세요.
찔끔 눈물을 흘리며 이름을 정정하는 그를 보고 태화는 혀를 찼다.
심지어 자신이 가지려고 요청하는 것도 아니었다.
‘들켜서 혼나는 게 무서우면 친누나 부탁 정돈 거절하면 됐을 텐데······.’
과연 저런 성격으로 연예계 생활이 가능할까.
타인에게 무심한 태화가 그리 생각할 정도로, 연습생은 연예계와 맞지 않아 보였다.
‘뭐, 알아서 잘하겠지.’
물론 그런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하진의 가능성을 보고 계약한 것은 JB.
태화가 걱정할 필요 없었으니까.
얄팍한 동정을 지우며 사인을 마치자 어느새 진정한 하진이 머뭇머뭇 호기심을 드러냈다.
휴식 시간이겠다, 대표와 누나 사이에 끼어 고생하는 청년에게 약간의 친절을 발휘하려던 태화는 예상 밖의 물음에 말문이 막혔다.
“화장품 뭐 쓰세요?”
“······네?”
곧 데뷔한다기에 주의점 같은 걸 물을 줄 알았지, 갑자기 사용하는 화장품에 대한 궁금증을 드러낼 거라고 생각지 못했기 탓이다.
태화의 반응을 ‘질문한 이유에 대한 궁금증’으로 해석하고, 하진은 쑥스럽다는 표정으로 볼을 긁적였다.
“저희 코디 누나가 맨날 배우님 피부 좋다고 화장품 알아보고 싶다고 했거든요.”
“음. 그래요······.”
태화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설프레 맞장구쳤다.
처음엔 누나, 이번엔 코디.
게다가 팬도 아니면서 꼬박꼬박 ‘배우님’이라 부르는 성실함.
뭔가 파릇파릇하게 자라나는 여린 새싹을 보는 것 같아 여러모로 신선했다.
“종이 있어요? 좀 길어서. 적어 줄게요.”
이럴 때 말을 돌리는 편이 낫다.
사용 중인 화장품을 알려 주는 게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닌지라 태화는 종이 위에 마법 주문을 닮은 이름들을 적어 내렸다.
뷰티 플라워 안티 에이징 수분······.
가니챠 스킨 액티브 모이스쳐······.
고작 제품명 서너 개를 적는데도 손바닥만 한 메모지는 글자들로 빽빽이 채워졌다.
“와, 전 어느 사 제품 토너, 로션으로만 기억하는데 대표님 말씀처럼 정말 암기력이 좋으시네요.”
“칭찬 고마워요.”
“저, 대표님께 들은 말이 있어서, 지금 코디 누나에게 추천받아서 구미호 천 년의 약속 보고 있어요. 배우님 연기를 닮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