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247
레티티아는 인사차 태화를 끌어안은 뒤 기분 좋게 웃었다.
그의 몸에서 나는 은은한 향기를 눈치챈 탓이다.
「환상(Mirage)을 뿌리고 왔군요.」
「항상 애용하고 있습니다.」
‘야누스’가 프랑스에게 개봉하고 세잔의 다른 조향사가 보내준 향수가 있으나, 태화는 처음 받았던 시그니처 향수, ‘환상’을 주로 사용했다.
오묘하면서도 질리지 않는 향이, 어떤 이미지에도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그 독특한 향에 이끌려 호기심을 드러내는 동료들도 있었으나 태화는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말을 피했다.
관능 덕분인지, 의외로 잘 통하는 방법이었다.
「역시. 장이 보여주는 향기는 그 어떤 시그니처보다 잘 어울리네요.」
자리에 앉은 레티티아는 만족스럽다는 감정을 숨기지 않은 채 잔잔한 미소로 태화를 바라봤다.
향수가 그 향에 어울리는 이를 만나 피어나는 건, 언제 봐도 즐거웠으니까.
특히 ‘장이 보여준 향’을 시그니쳐로 사용한단 사실은 여러모로 의미 깊었다.
‘뭐, 이 청년은 거기까진 모르겠지만 말이야.’
본인은 질색하는 말이나 장은 세잔의 뮤즈였다.
장이 보여주는 향기는 조향사들의 상상력과 창의성을 자극했으며 수많은 향을 만들어내는데 기여했다.
게다가 장이 찍은 사진에서 풍기는 향은 그 인물의 내면과 무섭게 어울렸다.
세잔에서 제작한 시그니처 향을 바꾸는 고객은 있어도, 장이 촬영하고 그 속에서 향을 뽑아내 완성한 향수를 바꾸는 고객은 40년 가까이 없었다.
당연히, 장의 위명은 조향 업계에 관심 있는 높으신 분들 사이에 유명했고 은근히 그가 찍어주길 바라는 이도 많았다.
‘광고를 위한 모델은 그나마 좀 찍어주는데 개인 향수 제작은 정말 안 도와준다니까.’
속으로 쪼잔한 할아버지라 투덜거리던 레티티아는 젊고 단정하며 묘하게 여심을 자극하는 청년, 태화를 응시했다.
태화가 프랑스인, 못 돼도 유럽인이었다면 좋았으리라.
장에게 뮤즈가 있었을 때마다 세잔은 부흥기를 맞이했었으니까.
활발하게 활동하는 장은 여러 향을 선보였고, 그 향은 조향사들을 자극했으며, 그 외에도 여러 새로운 향을 탄생시키곤 했다.
그중에는 오늘날까지 명작으로 남은 향수도 있었다.
‘샴페인 타워를 타고 내려가는 술 같은 거지.’
사실 일부 조향사 중에는 태화를 데려다 장의 뮤즈로 써버리자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장에게 뮤즈가 있던 시절을 겪은 장인들로, 그들은 영감이 꿀처럼 흐르던 시절을 그리워했다.
물론 더 이상 작은 향수 공방이라 말할 수 없는 세잔에게 ‘동양인 뮤즈’는 안 될 말이었다.
‘리가 프랑스인이어도 고민했겠지만. 저 사람 모델료가 얼마인데 진짜 단가 생각 안하는 늙은이들. ······모델로만 두기 아까운 일이기도 하고.’
레티티아는 욕심이 많았다.
출세욕도 심했고, 권력욕도 있었으며, 야심도 지대했다.
그녀가 조향 솜씨가 더 좋은 오빠를 제치고 사장 자리에 앉을 수 있던 이유다.
그런 만큼 레티티아는 세잔의 사장으로 취임하고 나서 태화에 대해 알아봤다.
장의 뮤즈.
세잔 내부에선 단지 그렇게 불리고 있을 뿐이었지만 실제 알아본 이태화는 반짝반짝 빛나는 다이아몬드였다.
그것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커팅돼, 점차 그 찬란한 빛을 밖으로 내보이고 있는 대단한 보석이었다.
‘이런 사람이 커서 장이나 그 늙은이 같은 인물이 되겠지.’
레티티아는 자신이 아는 두 천재를 떠올렸다.
태화의 작품을 찬찬히 살폈던 그녀는 이번에 파리에서 개봉한 ‘야누스’까지 본 뒤 ‘이 사람은 모델이 아닌 배우로 남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태화를 평가했다.
‘조향사였다면 밟으려 들었을지 모르지만.’
같은 업계, 경쟁 업체에서 탄생한 천재면 모를까, 영화계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는 곳이었기에 레티티아는 떠오르는 별을 꽤 기꺼워했다.
그리고 그런 호감은, 태화가 칸 때문에 파리로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구체적인 형태를 드러냈다.
‘······였는데, 그 늙은이만 아니었어도.’
레티티아는 곧 도착한다던 이를 떠올리고 살짝 혈압이 올랐다.
존경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러나 싫다.
거절할 수가 없어 오라곤 했어도 짜증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호호. 프랑스에서 방문할 곳은 정했나요? 가이딩이 필요하면 말해요. 이래도 파리에 오랜 뿌리를 두고 있는 공방이거든요.」
레티티아는 평소와 달리 가식적으로 조신하게 웃으며 대화를 이끌었다.
사실 가식이라 해도 나름 잘 보이고 좋은 관계로 남고 싶다는 진심 탓에 보이는 모습이라 그녀는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이 자리를 망친 ‘늙은이’에게 화가 났다.
「둘이 꽤 즐거워 보이는군.」
와인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던 도중 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흰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신사로, 다리가 좋지 않은 치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리샤르. 왔군요. 리, 인사해요. 세잔의 ‘르 네(Le Nez)’, 조향사 리샤르 카네예요.」
레티티아는 자부심이 담긴 목소리로 리샤르를 소개했다.
업계 내에서 당당하게 르 네(Mr. Nose)라 소개할 수 있는 인물은 많지 않다.
그리고 리샤르 카네는 본인을 그렇게 소개해도 인정받을 수 있는 조향사였다.
「반갑습니다. 태화 리입니다.」
태화는 자리에 일어서서 노신사를 반겼다.
‘네’라는 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진 알지 못했으나, 레티티아의 목소리에 서려 있는 감정, 노신사의 안광에서 느껴지는 분위기 탓에 쉬이 대하기 힘들었다.
태화의 인사에도 불구하고 리샤르는 인사를 돌려주지 않은 채 노골적으로 태화를 훑어봤다.
마치 이 물건이 진품인지 가품인지 품별하는 눈초리였다.
「······정말 동양인이로군. 영락없는 동양인이야.」
「······.」
「리키······!」
그 뒤 이어진 말은 태화가 할 말을 잃게 하고 레티티아를 당황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티쉬. 진정해라. 네가 그러니 맨날 네 아빠에게 혼나지.」
「오, 리키. ······지금 장난해요? 기껏 자리 만들어줬더니 미쳤어요?」
레티티아는 작게 탄식을 내지르고 리샤르의 귓가에 욕설에 가까운 폭언을 퍼부었다.
꼬장꼬장한 늙은이가 아주 제멋대로라며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엎어진 물은 엎어진 물이었다.
「쯧쯧. 사랑이 없는 영혼답게 아주 성격이 더럽게 컸구나.」
그런 레티티아를, 리샤르는 불쌍한 사람 보듯 쳐다봤다.
저게 또 진심인 걸 알아서, 그녀는 열이 뻗쳤다.
「누가 엄말 뺏어가지 않았어도 좀 더 잘 컸겠죠.」
「프랑스 인이니 어쩔 수 없지.」
레티티아는 이를 갈았다.
열다섯, 질풍노도의 시기에 들어선 자식보다 사랑을 택한 그녀의 어머니는 훌훌 이혼하고 리샤르와 결혼했다.
부부끼리는 위자료나 양육권 문제없이 나름 좋게 헤어졌으나 자식들 입장에선 아니었다.
특히 당시 성인이 아니었던 레티티아는 아무리 사랑을 먹고 산다는 프랑스 인이라도 자식보다 사랑을 택한 어머니를 이해하기 힘들었고, 그러고도 아버지의 친구로 남은 리샤르가 미웠다.
지금은 그때의 원한보다 특유의 재수 없음에 짜증 냈지만, 아무튼 그랬다.
‘아니, 기껏 와서 사고 치면 어떡하자는 건데!!’
그리고 저 하고 싶은 말 다하는 저 주둥이도 아주 짜증 났다.
「동양인에게 동양인이라 말한 게 뭐 그리 큰 죄라고. 자네 고개 좀 들어봐. 흠. 마치 한 떨기 줄리엣(Julietrose) 같군.」
태화가 가만히 보고 있음에도 리샤르는 자신이 몸을 숙여가며 이리저리 확인하고 태화를 한 송이 장미에 비유했다.
적응 못 한 태화는 묘한 눈으로 리샤르를 바라봤다.
악의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닌데, 말이 참 날 것 같아서 조금 거북했다.
「정말 미안해요. 리. 리샤르가 뛰어난 조향사이긴 해도 성격이 괴팍해서······.」
「흥. 광고용으로 찍은 사진하고 나한테 온 사진, 그리고 애송이가 보고 반한 사진까지 전부 다른 사람 같은데 그 정도 평가도 못 하냐?」
「즘 득츠으. 호, 호호호······.」
차마 나이 든 노인네의 정강이를 차버리거나 뒷굽으로 찍을 수 없어서, 레티티아는 앞쪽 꾹 한번 눌러 준 채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저 좋은 자리를 만들고 싶었던 그녀에겐 너무나 크나큰 시련이었다.
***
한 차례 소란이 지나고 셋은 자리에 앉아 예약했던 코스를 기다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레티티아는 혈압을 걱정해야 했는데, ‘뭐, 거북하게 느껴졌다면 사과하겠네’라 건성으로 답한 리샤르가 계속 민감한 내용으로 손님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니 걔는 장이랑 세잔을 지나치게 좋아한단 말이지. 그래서 가끔 쓸데없는 짓도 많이 해.」
리샤르가 꺼낸 이야기는 재능이 있으니 이참에 모델로 활동해보는 건 어떠냐는 말이었다.
그러다 인지도가 생기면 ‘세잔에서 광고를 촬영하고 시그니처 향수를 만들었던 과거’도 찾아오고 쭉 세잔과 함께 일하자는 의미.
세잔을 ‘회사’가 아닌 ‘공방’, 아니 수익이 필요 없는 예술가 집단으로 아는 사람다운 발언이었다.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태화는 자신의 손에 있는 포도주잔을 작게 굴렸다.
리샤르의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악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악의가 없다는 게 태화는 조금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래 누나가 그랬지.’
-상대가 이유 없이 널 싫어하는 것 같아? 그럼 싫어할 이유를 만들어 주면 되지. 뺨은 못 때려도 아주 기를 죽여 버려.
-나, 나래야······!
-오빠도 그렇고 태화 너도 아무 데서나 맞고 돌아다니지 좀 마. 제 권리를 주장하라고. 그리고 싫어하는 게 아니라도 널 무시하면 그대로 박아.
-나래야······!
태화가 연기와 관련되지 않은 부분에서 좀 멍한 것 같다 생각하던 나래는 생일이 지나고 며칠 뒤 태화에게 인간관계에 대해 진지한 조언을 건넸다.
과거 현규가 했던 ‘널 좀 아껴’라는 조언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간 것으로 어차피 사이가 나아지지 않을 것 같으면 그냥 못되게 굴고 스트레스 받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태화는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라 생각했다.
「데니가 했던 말이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요.」
태화는 데니얼에 대한 이야기부터 지금까지 거북했던 부분을 하나하나 따졌다.
그것은 참 조곤조곤하면서도 아까까지 있었던 말을 전부 무로 돌리는 처사였다.
「······뭐?」
가만히 있던 태화가 그럴 줄은 몰랐는지 한참 이야기하던 리샤르가 멍한 눈으로 태화를 쳐다봤다.
레티티아는 그런 모습이 고소하다 생각하면서 좀 의외라는 시선으로 태화를 응시했다.
「전 모델로 나갈 생각이 없고, 세잔에 피해 입히면서까지 제 주장을 할 생각도 없어요.」
「크흠!」
「왜 제 인생을 함부로 재단 하려 드세요.」
그건 저희 부모님도 포기한 건데.
태화는 맑게 웃으며 어퍼컷을 날렸다.
끝
ⓒ 마늘소금
사실 태화가 나래의 말을 따를 수 있던 건 이제는 정말 인간관계에서 겁먹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누가 들으면 ‘그걸 이제 알았냐?’라며 기가 막혀 하겠으나, 태화는 누군가를 사귀고 자신의 선 근처에 두는 것에 여전히 서툴렀었다.
깊게 사귄 인연도 대부분 회귀 전의 호감을 바탕으로 이뤄졌다.
더 이상 상처도 없고, 다친 곳도 없으나 뚜렷하게 남은 잔상은 흔적으로 남았던 탓이다.
물론 정작 태화 본인은 그런 자신의 상태를 대부분 잊고 지냈다.
인간관계보다 연기에 대한 열망이 더 컸던 데다, 연기를 최우선으로 여겼던 만큼 그에 미쳐 사느라 결여된 것에 관한 문제는 심각하게 와 닿지 않았다.
연기만 잘한다면 타인의 인성이나 도덕성도 크게 괘념치 않았고, 자신을 싫어하든 좋아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화투를 칠 때 피가 한 장도 없으면 역으로 피박을 면하는 것처럼, 태화의 상태도 비슷했다.
만약 태화가 연기 외 여러 일을 겪으면서 점차 바뀌지 않았다면 효신과 강원이 갑자기 거리를 뒀어도 순간의 안타까움만 느끼고 잊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것이 인하의 전화가 더 이상 오지 않고 갑자기 사무치게 외로워진 회귀 전 어느 날처럼, 상처로 변해 돌아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말이다.
그렇게 제자리걸음을 답보하는 것 같은 태화였으나 주변의 관심과 사랑은 천천히 그를 바꿨다.
그리고 마침내 회귀했던 연도를 맞이했을 때.
태화는 ‘여유와 인간관계’에 대해 재차 생각했다.
첫 단추로 집어 들었던 예능 ‘브레멘 음악대’는 수영 전 적시는 물처럼 딱 알맞은 수준의 온화함과 경험을 선사했다.
물론 갑자기 은근히 무시당했을 땐 괜히 마음을 열었다며 후회하기도 했으나, 그것이 자신을 위한 깜짝 파티를 위한 것이었음을 알고 빠르게 포기하는 버릇을 조금이나마 버렸다.
심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주변에도 보였는지, 지인들은 분위기가 유해졌다는 말을 종종 뱉었다.
동시에, 태화는 자신의 호불호를 조금 더 확실하게 표현할 수 있는 성격이 되었다.
별로 친하지 않은 리샤르의 무례한 말을 대충 흘리는 대신 대놓고 ‘싫다’ 말하게 된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무, 무어?」
태화의 답변이 충격이었는지 리샤르는 말을 더듬었다.
세잔에는 천재라 불리는 인물이 몇몇 있었다.
그 중 리샤르는 특유의 괴팍한 성격으로 유명했는데, 늘 공방에만 틀어박혀 있던 탓인지 그는 안하무인인 구석이 많았다.
전 사장이자 리샤르의 친구였던 뱅상이 리샤르의 그런 기질을 ‘천재의 변덕’이라 허허로이 웃어넘겼으니 뭐라 할 이가 존재할 리 없다.
세잔 최고의 조향사, 언터쳐블(Untounchable) 리샤르 카네.
태화와 다른 의미로 사회화가 덜 된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