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259
끝
ⓒ 마늘소금
성효의 변명을 들을수록 태화는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겐 한계가 있는 결과 속에서 버둥거리다가, 종국에 퇴출당했던 ‘과거’가 존재했으니까.
장애인 극단에서 쫓겨난 이유가 ‘위치에 어울리지 않게 피어버린 재능’이었기에, 태화는 외부에서 자신의 가능성과 한계를 재단하는 것을 질색했다.
게다가 태화는 성효가 말한 ‘재능이 애매하고 주연이 되지 못할 그릇’에 속한 적이 있었다.
사고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연기에 미쳐 개화하기 전까지.
스무 살부터 스물다섯, 스물여섯의 이태화는 재능보다 열정과 연기의 즐거움에 푹 빠진 흔한 연기 인생이었다.
‘성태 형이 재능 있다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연기를 포기했었겠지······.’
회귀 직전 태화를 절망으로 밀어 넣은 것도 성태였지만, 자포자기한 채 죽어가고 있는 태화를 살려준 이도 성태였다.
포기하지 말라고, 너에겐 재능이 있다 말해주며, 성태는 말라 죽어가는 꽃을 가꾸듯 조심스럽고 정성어린 손길로 태화를 도왔다.
그런 성태의 믿음은 태화가 자신을 믿고 끝없이 노력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태화는 마침내 ‘굳건한 정신’, ‘눈빛’, ‘무대 장악’ 등의 재능을 꽃 피웠다.
도전을 거듭해 무사이들에게 인정을 받고 ‘관능’이란 재능이 생겼던 것처럼, 회귀 전의 태화는 무려 다섯 가지의 재능을 새로이 개화시켜 ‘후원하는 신은 없으나 신들의 관심을 받는 별’이 되었다.
상급이긴 해도 최상은 아니었던 재능을, 노력으로 발화시킨 인물.
클래스가 다르다 칭해지는 배우는 그렇게 자신을 불태워 완성된 존재였다.
재능이 온전히 개화하기 전까지 그저 ‘쓸 만한’ 배우였던 태화는 사람이 연습과 의지를 통해 발전할 수 있는 존재임을 항상 명심했다.
실력이 부족한 배우에게 ‘연습부터 늘려라’라고 조언할 수 있는 건 그런 바탕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성효의 발언은 태화의 존재를 전면으로 부정하는 말이었다.
“그 사람이 실력으로 주연을 맡았든, 돈이나 운으로 맡았든 주연은 주연이죠. 실력이 없어서 작품을 망치는 거? 그래, 욕할 수 있어요.”
태화가 불쾌한 기색을 풍기자 성효는 말 잘 들어 주던 선배가 왜 이런 식으로 날을 세우는지 알지 못해 당황했다.
성효가 생각할 때, 그녀는 당연한 이야기를 한 것뿐이었으니까.
그녀는 물기 어린 시선으로 태화를 멍하니 쳐다봤다.
“근데 그 사람들도 무언가 특출난 게 있어서 그 자리까지 올라간 거예요. 천성효씨보다 높이.”
애처로운 성효의 모습에도 태화는 차가운 표정을 고수했다.
실력도 안 되면서 노력도 안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
그러나 연습하고 자신을 갈고닦으려 드는 배우라면, 태화는 그들에게 손 내밀 줄 알았다.
아이돌 스케줄도 바쁜 임승혁이 연기 많은 시간을 투자했을 때, 그를 외면하지 못하고 도운 것엔 그런 이유가 있었다.
‘아무리 재능이 바닥이라도 하루의 반 이상을 연습으로 보내면 늘 수밖에 없지.’
노력해서 안 되는 일도 분명히 있으나 되는 일이 더 많다.
연기에서 재능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경험과 연습도 중요했다.
“그리고 지금 못한다고 해서 나중에도 못할 거란 보장은 없죠.”
상대의 노력을 인정할 줄 아는 것과 함께, 태화는 현재의 모습만 보고 상대의 전체를 결정짓지 않았다.
경사면을 오르는 것처럼 천천히 상승하는 것이 보이는 배우가 있는가 하면 계단을 오르듯 어느 순간 확 성장하는 배우도 있기 때문이다.
태화도 재활 치료를 받으며 고군분투하던 중 어느 순간 확 연기가 늘었고, 그 모습을 본 성태는 ‘드디어 재능이 개화한 것’이라며 제 일처럼 기뻐했었다.
‘작은 계기로도 입장이 바뀌기 쉬운 곳인데 말이지······.’
구석에 있던 낡은 상품이 어느 순간 히트 상품이 될 수 있는 업계가 바로 연예계다.
인간관계에 서툴러 몇몇 지인들과만 친분을 유지하지만, 다른 동료들과도 만나면 얼굴 붉히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지켰다.
솔직히 말하면 사회생활을 하면서 당연한 예의였다.
초기 가벼운 인간 불신에 시달리고 다가오는 사람에게 벽을 쳤던 태화도 그 정도는 알았다.
“연기를 잘 한다고 해서, 남이 이룬 걸 무시하고 그 사람들의 꿈을 한정할 권리는 없어요.”
조연도 신데렐라가 될 수 있다.
태화가 뱉는 서늘한 충고는 그 한 문장을 설명하고 있었다.
“······.”
고개를 숙인 성효는 억울함을 느꼈다.
‘다른 사람의 꿈을 한정 짓다니. 내가 그럴 리 없잖아.’
성효는 실력이 부족한 사람이 주인공을 꿈꾼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들이 원하는 게 당연히 주연을 빛나게 하는 조연일 거라 생각했고, 자신은 그저 그런 이들이 힘들지 않도록 도왔다고 믿었다.
오만한 생각이었지만 밝고 친절한 성효가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을 거라 짐작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가 실력 없는 주연들을 은연 중 없는 사람 취급하고 깔고 뭉개도, 연기파 배우 특유의 자존심이라 여겼다.
“······그리고 주연 배우만 연기 잘하면 작품이 저절로 뜰 거란 망상은 어디서 얻은 건지 모르겠는데, 작품은 다 같이 만드는 겁니다. 배우가 중요한 건 맞아도 전부는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한 번의 실패로 많을 걸 잃을 겁니다.”
시간을 확인한 태화는 마지막 충고를 남기고 발걸음을 돌렸다.
함께 있어 봤자 쓴 소리밖에 안 나올 것 같아서다.
‘롱런하려면 고치는 게 좋을 텐데.’
사실 태화는 성효의 ‘연기’에 호감을 느꼈다.
미리 지인들에게 연기 못하는 배우를 은근히 없는 사람 취급한단 말을 들었음에도, ‘인성이 좀 덜 돼도 연기만 잘한다면야’ 란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랬던 만큼, 어린아이처럼 저를 중심으로만 세상을 보는 성효에게 상당한 실망감이 들었다.
타인의 생각이나 행동이 자신에게 피해만 끼치지 않으면 상관없다 여기는 태화일지라도, 자신과 정반대의 사상을 가지고 그것이 무조건 옳은 것이라 역설하는 그녀를 좋아할 수 없었으니까.
게다가 본인이 비련의 주인공인 것처럼, 피해자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나도 꽤 호불호가 생겼구나.’
최근 지인의 범위를 늘리면서 태화는 사람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냥 ‘함께 일하는 동료 배우’를 넘어 그들의 취미, 평소 일과 등 일상적인 부분에도 호기심을 가지게 됐고, 연기력에 상관 없이 그 사람을 볼 수 있게 성장했다.
‘예전이면 전혀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
용기를 내기 이전이라면 그녀가 어떤 생각의 소유자든 연기를 잘하고 일단 현장에 피해를 끼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고 깊게 들어가지 않았으리라.
이런 변화 자체가 ‘배우 이태화’뿐 아니라 ‘인간 이태화’도 성숙해지는 과정인 것 같아 그는 은근히 뿌듯함을 느꼈다.
‘근데 작품 속 등장인물 생각은 그리 잘 알면서 왜 다른 사람의 마음은 모르지?’
현장으로 돌아가던 태화는 성효의 기형적인 사고방식에 작은 호기심이 생겼다.
성효는 의외로 작가들의 마음을 잘 파악했고, 그들이 그린 작품 속 인물들을 온전히 이해했다.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가 정말로 살아서 움직이는데, 그것에 반하지 않을 작가는 없다.
성효와 한번 일한 작가들이 다시 그녀와 일하고 싶어 하는 이유였다.
타인의 마음과 꿈을 멋대로 재단하는 모습과 괴리감이 있던 터라, 태화는 어떻게 크면 그렇게 기형적인 사고방식을 가질 수 있는 지 궁금했다.
‘등장인물을 이해하는 걸로 봐선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건 아닌데 말이야.’
거기까지 생각하던 태화는 점점 깊어지는 사고를 잘랐다.
궁금한 것과 별개로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배우를 오래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화를 좋아하는 성효에겐 안타깝게도, 그녀는 태화가 질색하고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두 번째 배우가 됐다.
***
“교수님. 이 수술이 성공하면 대통령 각하께서도 저희 병원을 더 애용하시겠죠.”
“그렇지.”
“그 일등 공신이 저임을 잊지 않아 주셨으면 해요.”
“허허허. 우리 유 선생의 공로를 내가 잊으려고.”
성월 대학 병원의 진료담당부원장 김윤성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유시우도 고운 미소를 지어보이곤 방을 나섰다.
“······망할 너구리 같으니.”
원장실을 나오기 무섭게, 그녀의 얼굴 위에 그려졌던 미소는 흔적을 감췄다.
용담호혈, 살얼음판인 권력의 세계에선 흔히 있는 변화였다.
“늙은이 뒤를 닦아주느라 힘들겠어. 아줌마.”
“······조용히 해요.”
자신을 권력의 최상층으로 올려줄 아기, 유남서를 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던 유시우는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불청객에게 험한 말을 뱉었다.
유남서는 아기들이 모여있는 신생아실이 아닌 개인 치료시설에서 집중 간호를 받았다.
희귀한 병과 약한 몸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기가 대통령의 막둥이 자식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 배정이었다.
“댁들이 싸우는 건 상관없는데, 요 꼬맹이 수술 날짜까지 권력 싸움에 집어넣지 마. 진짜 추하니까.”
아기가 들어있는 인큐베이터를 애틋한 눈으로 톡톡 두드리던 이시도가 서늘한 시선으로 유시도를 쏘아본다.
믿음 따윈 하나 없는 시도의 표정을 보고 시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걱정 마요. 당신을 데려온 만큼 실수는 없을 테니까.”
“그래.”
“······그리고.”
아기 볼 마음이 사라져 자리를 떠나려던 시우는 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이석현 환자 일은 고마워요.”
수술 일정이 잡힌 아동 환자, 이석현의 담당의사가 음주 시술을 하려 했을 때, 수련의도 간호사도 그의 권위에 눌려 막아서질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시도는 음주 상태로 집도하겠다던 교수를 기절시키고 제가 메스를 잡았다.
“손해 본 인간이 무슨.”
시도는 코웃음 치며 그녀를 비웃었다.
술에서 깬 담당의사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시도를 욕했으나 그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녹음기를 꺼내 역으로 협박했다.
굴러온 돌답게 시도는 위아래를 신경 안 썼다.
일이 세어나가면 병원 이미지에 큰 손상이 가기 때문에 유야무야 묻혔다.
하지만 그 일로 외과에서 힘 있는 교수 하나가 유시우를 미워하게 됐다.
이시도를 데려온 사람이 그녀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이는 살았으니까요.”
아동 환자는 성인보다 섬세하게 다뤄야한다.
술 마신 교수가 그대로 칼을 가져갔으면 의료 과실이 발생했을 확률이 컸다.
시우는 시도를 감싼 걸 후회하지 않는다는 얼굴로 환자실을 나섰다.
시도가 떠나는 그녀를 향해 몸을 돌리는 일은 없었다.
***
PD는 턱을 쓰다듬으며 작은 카메라 모니터를 응시했다.
아기 모형이 든 인큐베이터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남녀.
나름 고비에서 마음을 모은 만큼 애틋한 감정선이 오갈 만도 한데, 둘의 모습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동지애조차 안 보인단 말이지······.’
연애 물기를 쭉 빼버렸다곤 해도 너무나 담백한 둘의 모습에 용우는 다시 찍어야 할지 고민했다.
“근데 또 그림이 괜찮고······.”
“PD님 연애선 넣고 싶어서 그러세요?”
“뭐, 추 작가는 의학 드라마에 연애 넣는 것만큼 추한 것도 없다고 했지만 있으면 좋잖아. 근데 없네.”
스텝의 말에 대답하며 용우는 살짝 혀를 찼다.
두 배우의 연기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딱딱 맞는 연기만큼이나 감정도 정확히 선을 갈라서, 두 남녀는 정말 딱 하나의 목표로만 연결된 사람들 같았다.
‘그러고 보니 둘이 따로 대화하는 것도 못 본 거 같은데······.’
회식도 두어 번 했지만 두 주연이 공적인 이야기 이외에 대화를 나누는 것은 본 적 없다.
PD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다음 장면을 준비 중인 두 배우를 응시했다.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인다.
하지만 많은 고양이들이 그 호기심을 참지 못했다.
끝
ⓒ 마늘소금
최근, 태화의 일정은 상당히 바빠졌다.
개봉한 지 6주 차에 들어간 ‘정조’가 6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역대 사극 영화 흥행 순위 7위인 ‘신궁’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는 데다, 그런 와중에 ‘젊은 연인의 노래’의 개봉은 나흘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현재 촬영 중인 드라마 ‘이삿갓’도 첫 방영을 앞두고 있어, 주연 배우인 태화가 분주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장마르크 감독이 처음 한국을 방문하는 걸로 영화계가 들썩이고 있지.”
“영화 홍보차는 아니죠?”
“프랑스에서도 안 한 홍보를 한국에서 할 리가. 그냥 호기심이 들어서 개봉하는 김에 온다는데······ 아마 하루 정도는 빼서 함께 관광을 하든 해야 할 거 같아.”
‘배우 이태화의 본격적인 베드신’이란 자극적인 소재 덕에 ‘젊은 연인’은 프랑스 영화치고 유래 없는 관심을 받고 있었다.
한국인 정서에 맞지 않는 프랑스식 언어유희, 진하게 묻어 있는 예술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 관심이 못내 신기했는지, 대부분 유럽에서만 머물던 장마르크 고다르가 ‘젊은 연인’의 개봉 날짜에 맞춰 아시아 동쪽 끝에 붙은 작은 나라에 방문을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