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262
사물을 어떤 식으로 느끼는지, 어떤 식으로 세상을 보는지, 연기의 기류가 무엇인지······.
그런 자연스러운 ‘감각’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동류’가 될 수 없었다.
물고기와 새는 친구가 될 수 있어도 같아질 수는 없던 것이다.
성효가 ‘진짜’라 할 수 있는 배우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녀는 이해받고 싶었다.
어딘가 망가진 세상에서 ‘진짜’들과 호흡하며 이해받고 싶었다.
생각을 밝힌 뒤 그녀를 꺼리는 이들이 늘었지만 성효는 그런 걸 잘 몰랐다.
오히려 ‘조연일 수밖에 없는 이들’과 어울리려 하는 그들에게 안타까움을 느꼈을 뿐이다.
그렇게 상처받아 가며 지냈어도 성효는 꿋꿋했다.
다른 사람에게 직접 말한 적은 없으나 그녀는 방송계에 들어오기 전부터 ‘동류’를 하나 알고 있었으니까.
만난 적도, 대화를 나눈 적도 없었지만 ‘이태화’란 배우는 분명 그녀와 같았다.
그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알 수 있었다.
숨 쉬듯 자연스럽게 무대를 장악하고, 감미로운 목소리로 상대 배우를 조종하고, 눈빛을 통해 관객들을 자신이 연기하는 세계에 초대한다.
카메라 너머의 이들에게 직접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태화는 그녀보다 뛰어난 배우였다.
때문에 성효는 태화와 함께 연기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기뻤다.
외로움을 느낄 때마다 그와의 만남을 꿈꿔왔으니 당연했다.
‘근데 왜 날 싫어하는 걸까······.’
그러나 태화는 성효에게 잔인했다.
그녀가 기뻐할 때도 꺼리는 기색을 풍기더니, 친구와 다툼이 생겼을 땐 불쾌함을 내비쳤다.
위로해 주는 대신 친구의 편을 들었다.
‘나빠······.’
그것은 성효가 차곡차곡 쌓아 온 세계를 무너트리는 행위였다.
한 치 의심도 없던 세계에 의문을 던지고, 믿어 왔던 것들을 의심하게 만드는 행동.
그러나 다시 돌아 봐도 잘못된 곳이 없어서, 성효는 친구와 태화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숨을 쉬고 새는 하늘을 날며 공기의 흐름을 느낀다.
태어나면 본능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고, 의식할 필요가 없는 일들이었다.
새는 물속에서 살 수 없고 물고기는 하늘을 날 수 없다.
왜 다들 그것을 모르고 자신에게 뭐라 하는 건지 성효는 알지 못했다.
‘미워하는 건 알겠어. 하지만 너무하잖아.’
다섯 번 만에 오케이 사인을 받은 성효는 매니저를 떼어 놓고 인적이 없는 구석에서 몸을 웅크렸다.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호흡한다. 그러나 자각하게 되면 스트레스를 받고 숨 쉬는 행위가 버거워진다.
성효도 마찬가지였다. 숨 쉬듯 자연스럽게 이뤄졌던 연기를 의식하기 시작하자 자신이 평소 어떻게 연기했는지 떠올리기 버거웠다.
결국 그녀는 매니저가 촬영했던 자신의 첫 번째 연기를 확인한 뒤, 그것을 ‘따라 하는’ 것으로 장면에서 벗어났다.
자기 자신을 모방한 것이다.
‘어떡하지······.’
태화의 연기는 파도와 같았다.
성효가 모래사장 위에 남겨 둔 흔적들을 남김없이 삼키는 파도.
뒤돌면 있던 발자국들을 떠올리지 못하게 하는 파도.
그녀는 처음으로 연기를 하면서 무기력함을 느꼈다.
처음으로 연기가 무서웠고 두려웠다.
그런데도 빠져나갈 수가 없어서 괴로웠다.
‘다들 이런 기분이었던 걸까······.’
성효는 연기에 재능이 없음에도 무리하게 주연 자리를 꿰어 찼던 이들을 떠올렸다.
연기할 수 없는데도 여전히 연기가 좋았다.
손가락이 잘리고도 피아노를 치고 싶어 하는 피아니스트처럼.
다리를 잃어도 달리고 싶어 하는 마라토너처럼.
자신의 연기를 펼치는 법을 잊었는데도, 성효는 여전히 연기가 하고 싶었다.
***
성효가 구석에 처박혀 우울해하는 사이 촬영을 마친 태화는 서둘러 현장을 떠났다.
‘정조’가 역대 사극 영화 흥행 기록에 도전하면서 추가 홍보가 시급해졌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 정도까지 선전할 줄은 몰랐는데······.’
고전 냄새가 진하게 나는 정통 사극을 연기하는 것은 즐거웠지만, 사실 태화는 중박만 나도 선방한 것이라 생각했다.
많은 평론가와 서평이 언급하는 것처럼 ‘정조’의 대사는 대중성이 떨어지는 편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시기를 잘 맞췄다.
어찰첩이 공개되고 그 편지를 중심으로 고증이 이뤄진 첫 사극.
지금까지 제기되었던 노론의 독살설과 반목설을 뒤집어 버린 작품.
새로운 관점으로 제시된 첫 작품인 만큼 ‘정조’는 한국사 관련 업계 사람들에게 상당히 주목받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영화에 스며든 세심한 고증은, 중고등학교 국사 선생들을 만족시켰다.
시각 자료로 써도 손색없는 내용에 너도 나도 ‘정조 감상’을 방학 과제로 내준 것이다.
정확히는 고증 면에서 훌륭한 몇몇 작품 리스트를 건네주고 ‘위 목록에서 한 작품 감상하기’였지만, 영화관 개봉작은 ‘정조’밖에 없었기에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원 도피 겸으로 정조를 관람했다.
그렇게 들어온 유입 덕분일까, ‘정조’는 순항을 거듭하며 순익 분기를 넘겼다.
“500만 넘긴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600을 넘겨서 역대 사극 탑 10을 겨루다니······.”
“오빠도 노리려면 천만을 노려야지.”
“제작비가 다른 사극에 비해 많이 적잖아. 아직 스크린이 내려간 것도 아닌데 300퍼센트 수익률을 보이고 있으니까 대단한 거지.”
나래의 타박에 현규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순수익을 생각해야 한다며 조곤조곤 설명했다.
‘정조’의 제작비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태화의 출연료였다.
다른 배우들이 명품 연기자라 불리긴 하나 그래 봐야 명품 ‘조연’.
태화 다음으로 높은 출연료를 받는 배우가 태화의 6분의 1도 안 됐으니 그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게다가 ‘정조’엔 별다른 액션신이나 독특한 배경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당연히 소품 관련 제작비는 다른 대형 사극에 비해 많지 않았고, 홍보 또한 ‘이태화의 중년 모습’이란 화제성을 타고 자연스럽게 퍼졌기에 예상했던 것보다 큰 금액이 절약됐다.
같은 600만이라 해도 수익이 다른 것이다.
손익 분기 후 러닝 개런티를 지급받는 태화 입장에선 지금의 결과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수준이었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정조 분장이네.”
“······과연 이런 이벤트가 먹힐까요?”
기대된다는 나래의 말에 태화는 복잡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있는 일정은 태화가 영화 속 정조의 분장을 하고 세팅된 옥좌에 앉아 덕담을 해 주는 행사였다.
정조가 팩트 폭력, 말빨로 점철된 캐릭터인 만큼, 덕담은 ‘욕쟁이 할머니의 욕’에 가까웠다.
“걱정 마. 먹힐 수밖에 없어.”
나래는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태화를 안심시켰다.
한국의 구수한 욕은 의외로 친근함과 정겨운 느낌을 준다.
태화의 정조도 마찬가지였다.
신하들에게 보이는 왕의 모습은 약간 날건달 같은 기질이 있었고, 그런 ‘서민적인’ 태도는 호감 포인트로 작용했다.
게다가 분장한 태화는 여성들이 꿈꾸는 미중년 그 자체.
태화는 모르지만 ‘정조’ 공식 홈페이지에 해당 이벤트가 공지되었을 때, ‘고작 100명 선착순 한정이라니 너무 적다’란 내용이 게시판에 도배될 정도였다.
“진짜 걱정 말고 그냥 팬 사인회 한다고 생각해.”
“······네.”
팬들이 마조히스트도 아닌데 과연 이런 콘셉트가 정말 먹힐까.
그런 고민을 하며, 태화는 행사 현장으로 향했다.
***
[정조 ‘왕님이 말씀하셔’ 이벤트 다녀왔습니다]
오늘 M몰 만남의 광장에서 있었던 ‘왕님’ 이벤트 다녀왔습니닷!
으아 사람 진짜 많았어요. ㄹㅇ 이벤트 시작 30분 전에 번호표 줬는데 순식간에ㄷㄷ
그래도 사람이 많은 거 보고 배우님이 이벤트 담당자분하고 이야기해서 50장 늘려 주셨어요 감동······.
사실 저도 그 50인에 들어갔다는ㅋㅋ
옥좌는 좀 싼 티 났는데 배우님이 용포 입고 앉으니까 진짜 용좌가 됐······ Aㅏ. 이래서 옷걸이가 중요한가 봐여
정조에서도 그랬지만 오늘 왕님ㅋㅋㅋ 하는 말도 그렇지만 행동도ㅋㅋ
어떤 여성분이 부끄부끄하면서 ‘사인해 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물으니까 ‘고얀. 여는 함부로 수결을 하지 않아’라고 쿨한 척.
그래 놓고 얌전히 사인 + 사진까지ㅋㅋ
마지막에 ‘그대가 어여뻐서 특별히 해 주는 거야’라며 튕기깈ㅋ
이게 바로 츤데레인가욬큐ㅠㅠ 완전 보배로워ㅠㅠ
솔직히 영화처럼 팩트로 명존쎄하진 않았고요.
가볍게 뺨을 찰싹찰싹한 정도ㅎ?
어떤 분은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뭐라는진 안 들렸는데- 배우님이 그분 뺨을 톡톡 두드리면서 ‘이렇게 좋은 날 친우들하고 놀아야지 괴팍하기는’ 하면서 웃으니까, 갑자기 ‘즈은~하! 승은을 내려 주세요!’이래서 경호원 아찌들 달라붙고 배우님 움찔하곸ㅋ
(귀요미.jpg)
전 그 와중에 찍었ㅋㅋㅋ 배우님 왜 중년 분장을 했는데 귀여워여ㅠㅠ
여러분 정조 세 번 보세여 다섯 번 보세여!
└와 저랑 같은 공기 마시셨네ㅋㅋ진짜 오늘 배우님 포텐 지대였어요ㅎ
└ㅠㅠ 왜 저는 못 갔죠ㅠㅠ?
└사진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네요. 배우님 움짤 ㄹㅇ 희소······.
└와, 저 정조 좀 지루하다고 해서 손이 안 갔는데 대역죄인인 듯. 바로 영화관 갑니다.
└역사적 사건 미리 알고 가면 이해 쉬워요 베스트글에 ‘정조 더 즐겁게 보기’ 한번 읽고 가세요
이벤트가 끝나기 무섭게 마레드에는 관련 후기들이 올라왔다.
저녁 식사 시간대에 이뤄진 행사임에도 경쟁이 치열했다는 말과 함께 정조의 매력을 직접 느낄 수 있어 좋았다는 평이 대부분이었다.
반짝이긴 하나 하락세를 보이던 일일 관객 수 그래프가 소폭 상승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그리고 3일 뒤.
‘정조’가 누적 관객수 626만 명을 기록하며 사극 영화 흥행 순위 7위였던 ‘신궁’을 제쳤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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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하나의 산을 넘자 여기저기서 축하 메시지가 날아왔다.
기록을 핑계 삼아 태화와 친분을 터보려는 이들이었다.
오가다 인사 한두 번 한 것이 전부인 PD.
같은 작품에 단역으로 나왔다고 주장하지만 기억에 없는 배우.
시상식 리셉션에서 통성명만 한 배우······.
얼굴도 이름도 희미한 인물들이 이때다 싶어 태화에게 축하를 건네고 술자리에 초대했다.
태화는 그들의 접근을 전부 거절하진 않았다.
BGA와 현규에게 물어 나름 기브 앤 테이크가 확실한 이들과는 적당히 안면을 텄고, 쭉정이는 걸렀다.
성공하면 달라붙고 실패하면 떨어지는 관계가 만연한 동네에서 결벽적으로 행동해봤자, 남는 건 ‘사회성 없다’라는 악의적인 꼬리표뿐이었으니까.
물론 태화는 그런 소문이나 이익관계를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은 위치였다.
그러나 달라붙는 이들에게 철벽을 쳐서, 적으로 돌릴 필요는 없었다.
“이태화 배우님. 저 어제 젊은 연인 보고 왔어요. 프랑스어 연기도 정말 대단하세요.”
“감사합니다.”
현장에 도착해 촬영을 준비하는 태화에게 수줍은 표정을 지은 스텝이 다가와 ‘젊은 연인’에 대한 감상을 전했다.
‘정조’가 역대 사극 영화 흥행 순위 7위를 기록한 날, ‘젊은 연인의 노래’가 개봉했다.
영화관에 걸린 스크린 포스터에는 태화의 이름이 주연 배우인 레베카의 이름만큼이나 커다랗게 적혔다.
구도 또한 프랑스 포스터와 달리 마치 태화가 남자 주인공인 것처럼 편집됐다.
관객들이 관람 포인트가 본토와 달랐기 때문이다.
칸에서 3차례나 수상한 감독, 프랑스 최고 섹시 여배우, 영어도 아니고 무려 프랑스어로 대사를 소화하는 한국인 톱스타, 프랑스에서 연일 이어지는 호평 등.
청소년 관람 불가 판정을 받았음에도, 기대감에 이끌려 영화관을 찾은 관객은 많았다.
폭력성이 아닌 선정성이 높았던 탓에 남녀로 관람 오는 이들보다 동성 혹은 개인으로 영화관을 찾는 관객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남녀가 진하게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면 모를까, 주인공 살로메가 워낙 이 남자 저 남자와 방탕한 밤놀이를 펼치는지라 ‘젊은 연인’은 커플끼리 보기엔 부적절한 영화로 꼽혔다.
“정조도 대박 나고 젊은 연인도 그렇고 이제 낼모레 이삿갓만 잘 되면 되겠어요!”
스텝은 한 마디라도 더 나누기 위해 이런저런 말들을 덧붙였다.
주연 배우가 아무리 친절한 성격이라고 해도 일개 스텝이 배우에게 업무 이외의 말을 거는 것은 암묵적으로 금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