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271
연기자로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진 않았으나 5년 사이 연애도 몇 번 해봤으며, 깨끗한 마스크와 서글서글한 성격 덕에 안티가 적었다.
동료 배우들과 적당히 친하고, 가끔 후배다운 애교도 부리며, 외동답게 고집도 있는 평범한 배우.
대단한 인기를 구가한 건 아니어도, 모나지 않은 성격과 구김 없는 모습은 이래저래 말 많은 업계 속 공기 청정기와 같아서, 은근 선후배의 귀여움을 받았다.
타인의 본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적의에 민감하지 않은, 사랑받고 곧게 자란 청년이었다.
‘······다른 사람 인생을 본 기분이네.’
5년이란 시간을 빠르게 경험하고 원래 기억을 되찾은 태화는 쓴웃음을 지었다.
생각해보면 태화는 다리를 잃기 전까지 꽤 사교성 있고 다정다감한 성격이었다.
타인의 적의보다 호의를 먼저 읽을 줄 알았다.
‘중간중간 등쳐먹으려는 인간이 없는 건 아니라도 정말 온건한 인생이었어.’
마치 어린 시절 찍은 비디오를 확인한 것 같이 약간의 그리움과 씁쓸함이 남는다.
그러나 그것이 현재의 자신을 부정할 정도는 못됐다.
‘······근데 하승우랑 친해진 건 좀.’
잔잔하게 회상하던 태화는 약간 소름이 돋은 팔뚝을 쓸었다.
그리 위협 안 되는 연기력을 지닌 탓인지 환상 속에서 태화와 승우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은근히 태화를 귀여워하는 선후배엔 그도 포함되어 있어서, 친절한 가면을 쓴 그에게 밥을 얻어먹거나 사적인 술자리도 가졌다.
본성을 알게 된 현실과는 달리 기억이 없는 태화는 ‘좋은 선배님’이라고 승우를 생각했다.
‘어떻게 그 이미지를 유지하는지 알 수 있었지······.’
이상하게도 태화는 본성이 비틀린 배우들에게 은근히 귀여움 받았다.
그들은 엄청나게 특출나진 않아도 연기를 좋아하고 일부 방면에서 순진한 태화를 암묵적으로 돌봐줬는데, 모든 기억이 떠오른 뒤 그것이 묘한 감상을 낳았다.
인간에겐 한 가지 면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몸소 깨달은 것이다.
행동에 따라 그들이 본성이 어떠하든 관계가 변할 수 있었고 호의가 호의로 연결되는 일도 많았다.
적의나 경계였던 것이 호감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적의에 칼 같이 반응한 ‘현재’에선 경험할 수 없던 온화함.
환상을 통한 경험은, 태화에게 인간관계에 대한 인지의 변화를 가져다줬다.
끝
ⓒ 마늘소금
사고의 희생자가 뒤바뀌는 실수가 없었다면 겪었을 삶을 경험한 뒤, 태화는 눈을 떴다.
그림자가 드리워도 황금빛으로 빛나는 한 쌍의 구슬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잠시 눈꺼풀을 깜빡이던 태화는 아름답게 빛나던 구슬이 초승달 모양이 되고서야, 그것이 누군가의 눈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
“어허, 어지러울 텐데 조금만 더 누워있어.”
프레이야는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놀라 일어서려는 태화의 어깨를 본인의 무릎 위에 짓눌렀다.
사르르 짓는 미소는 미의 여신답게 아름답고 사랑스러웠지만 의자에 앉아 지켜보던 하토르는 혀를 찼다.
태화가 깨기 전까지만 해도 그의 복근을 찔러보며 ‘마른 줄만 알았는데 단단하네’, ‘이런 몸이 보양식으로 그렇게 좋다던데······.’와 같은 변태적인 말을 뱉으며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보듯 가늘게 흘겼던 것을 기억한 탓이다.
수많은 유럽 여신들이 그러하듯 프레이야도 성적으로 매우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표정이 좋아졌네. 잘했어.”
그녀는 강아지를 칭찬하듯 태화의 턱 부근을 가볍게 쓸었다.
누가 봐도 희롱이었으나 하얀 공간에 있는 것은 두 여신과 태화뿐이었기에 그 점을 지적할 이는 없었다.
“······저, 일어나고 싶은데.”
태화는 미간을 찡그리며 웃었다.
아무리 친근하게 행동해도 프레이야는 처음 보는 사람, 아니 신이었다.
낯가림이 많이 줄었다지만 초면부터 무릎을 벤 채 있는 것은 태화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쯧. 그러렴.”
살랑살랑 미소를 짓던 프레이야가 노골적으로 혀를 차며 태화를 놔줬다.
북유럽 신화관 최고 미인을 보고도 한번 감탄한 것이 전부.
눈시울이 살짝 붉어진 것을 보면 의식하지 않는 것은 분명 아닌데, 태화의 의지는 너무나 강했다.
“풉.”
하토르는 프레이야의 신경을 건드리기 위해 고의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제 잘난 외모만 믿고 이리저리 이성을 휘두르던 프레이야가 물을 먹은 게 너무나 즐거웠다.
물론 하토르도 태화의 ‘관능’이 개화하고 마음이 동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잠시 스쳐 가는 흥미보다, 수작을 부리다가 망신당한 프레이야를 관찰하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사심을 열심히 채우더니. 금발 미인은 멍청하다는 말이 사실이 돼버렸어.”
“이 소대가리가······.”
“품위 없기는.”
하토르는 우월감을 드러내며 프레이야를 비웃었다.
태화가 기절해 있는 동안 다른 미의 여신의 품에 안겨있는 그를 은근히 아쉬워하던 하토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저 통과한 건가요?”
신경전을 벌이는 두 여신을 응시하며 태화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싸우는 것은 상관없었으나 일단 지금 겪은 일에 관한 결과를 알고 싶었다.
“당연하지 않나? 원래 처음은 가볍게 가는 법이야.”
하토르는 고혹적인 미소를 지은 채 최근 시련의 경향에 대해 설명했다.
천재라 불리는 이들이 감소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구가 늘고 인간들의 지식 공유가 활발해지면서 재능 있는 인간이 많아졌고, 각 분야의 전체적인 평균도 올라갔다.
단지 그렇게 올라간 수준에 비해 정신 성장이 더뎠을 뿐이다.
“······래서 포기하거나 한 번 넘어졌다고 못 일어나는 이들이 많아졌지.”
신들의 세계에도 새로운 피가 필요하다.
인간의 수는 증가했고 그에 따라 처리해야 하는 일도 늘어갔으니까.
그러나 가장 쉬운 길인 종교를 통해 성인(聖人) 반열에 오르는 인구수는 매년 줄었으며.
벽을 뛰어넘어 다른 차원의 존재를 깨닫는 천재의 수도 조금씩 감소하는 추세였다.
인력난은 심해지고 인간들의 정신은 나약해지니, 그들의 수준을 맞춰 기준을 완화하는 수밖에 없었다.
“맞아. 요즘 애들은 죽지 않으니까 일주일 정도 굶으라고 하거나 불 위에서 춤을 추라면 기겁부터 하거든. 믿음이 없어요.”
종교가 필수였던 시절, 이곳에 다다른 이들 대부분이 광신도였다.
당연히 신이나 천사가 그래야 한다고 하면 의문을 가지지 않은 채 고행을 따랐다.
다른 말로 하면 신앙을 핑계 삼아 다루기 쉬웠던 애들이 머리가 크고 우는 소리가 심해져 환경을 개선했다는 의미였다.
‘그거 완전 악덕 기업 마인드 아닌가······?’
신들 입장에서 불경하다 외칠 생각을 흘리며 태화는 미묘하게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애써 다잡았다.
“그러니까 처음은 첫 키스처럼 마일드한 맛이야. 태화는 신이랑 키스해볼 생각 없어? 아, 무사이 그것들이랑 많이 했으려나?”
프레이야는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태화의 입술을 응시하다가 하토르의 응징을 받았다.
미와 사랑, 풍요와 행복을 관장한다고 알려진 하토르의 또 다른 이름은 분노와 복수의 신 세크메트.
자신을 화나게 한 이들에겐 자비가 없었다.
한참 프레이야를 괴롭히던 하토르가 손을 한 번 휘젓자 공간이 울렁였다.
하얀 의자 하나만 덜렁 있던 공간에, 옻칠한 듯 윤이 나는 검은 문이 홀연히 나타났다.
“축하해. 이제 다음 장소로 이동하면 되네. 하지만 지금처럼 편하진 않을 거야.”
원래 맛보기는 미끼 상품이라 달콤한 것이라며 하토르는 농담 같은 진심을 흘렸다.
“······감사합니다.”
문고리를 잡은 태화는 잠시 고개를 돌려 두 여신에게 인사했다.
벽을 넘어야 한다는 생각에 긴장하고 있던 몸이 하토르와 프레이야의 스스럼없는 태도 덕에 많이 이완됐다.
그것은 전적으로 둘의 호의였으며 태화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건투를 빌지.”
“좋은 선택을 하기 바라! 나중에 오면 제대로 놀아줄게!”
잔잔한 미소를 짓는 하토르와 달리 프레이야는 밝은 미소로 뜻 모를 말을 남겼다.
그런 둘에게서 몸을 돌, 태화는 다음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
“몰아붙여! 포탄을 쏘라고!”
“한계입니다, 제독! 피하십······ 으악!”
태화는 자신을 걱정하다가 쇠구슬을 맞고 날아가는 이를 보며 움찔거리는 몸을 다잡았다.
지금 그는 과거 유명했다는 누군가의 외형을 뒤집어쓴 채 처음 보는 이들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망할.’
욕을 하지 않는 성격임에도 지금 겪고 있는 상황은 저절로 욕이 나왔다.
***
태화가 다음 장소에 도착했을 때 그를 반긴 것은 로키였다.
아이의 외형을 한 작은 신은 태화가 자신의 문자를 매번 무시했다며 화를 냈고, 간단한 설명만 대충 한 뒤 태화를 역사나 신화 속 인물로 둔갑시켰다.
-들키면 많이 아플 거야. 힘내라고?
이름만 들어도 아는 유명한 왕, 독재자, 암투 한가운데 떨어진 권력자 등······.
변신의 신이란 이명답게 로키는 태화를 여러 모습으로 바꿨으며 태화는 해당 인물을 완벽히 흉내 내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시련은 축복 속에서 연기하는 것과 비슷했으나 다른 점이 많았다.
첫째로 태화의 외형은 태화 본연의 모습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그야말로 타인의 모습이었다.
키도 나이도 심지어 성별마저 천차만별이었고, 성대를 타고 나오는 목소리도 달랐다.
또한 그들은 태화의 변화에 축복 속 인물들보다 예민하게 반응했다.
태화가 있는 시간, 위치가 상당히 민감하다 보니 샅샅이 태화를살폈으며, 똑같이 연기했다 생각해도 악마가 씌었다든가, 마녀가 변신한 거라고 의심했다.
‘······아픈 건 질색이야.’
가장 심각한 변화는 느껴지는 통증의 강도였다.
상황 속에서 느껴지는 아픔은 비슷했지만 만약 들켜서, 흘러가야 할 스토리가 바뀌면 그때부턴 상당한 고통을 수반했다.
특히 악마에 씐 왕을 정화해야 한다고 화형당했을 땐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을 정도.
물론 미치지 않을 수준이었며 진짜 화형보단 통증의 강도가 확연히 낮았다.
그러나 눈앞에서 혀를 날름거리는 불꽃.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와 군중들의 함성.
발밑에서 시작되는 열기와 팔을 휘감은 까쓸한 나무의 촉감 등.
오감을 장악한 채 다가오는 고통은 무시할 것이 못 됐다.
자연히 태화는 눈빛, 발성, 행동 등 모든 것을 편집적으로 따라 해야 했다.
가끔 실수할 때면 상황을 제대로 넘기기 위해 공간을 장악해야 했고 필요할 땐 잔인한 위정자의 면모를 보여야 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발버둥이었으며 어느 순간부터 태화는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온 상황을 99퍼센트 재연할 수 있었다.
‘아마 무슨 조치를 취해줘서 나를 잃지 않는 것 같은데······. 무시무시하다니까.’
여러 사람의 모습을 뒤집어쓴 채 그들의 행동을 따르니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기 쉬운 상황.
그러나 태화는 본인이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며, 어느 순간 그것이 하나의 안전장치임을 깨달았다.
‘미치고 싶은데 미칠 수 없어서 더 짜증 나지만······.’
차라리 본인이 그 사람이라고 믿을 수 있었다면 시련은 훨씬 간단했으리라.
하지만 안타깝게도, 태화는 자신이 이태화이고 이것이 시련 속이라는 걸 단 한 순간도 잊을 수 없었다.
‘이젠 적응이 돼서 다행이지······.’
그래도 최근의 세 가지 상황은 실수 없이 무사히 넘겼다.
아니, 실수한 경우도 있었으나, ‘무대 장악’을 이용해 분위기를 휘어잡고 몰아쳐 다른 이들의 의심을 지웠다.
더 이상 끔찍한 고통이 싫다는 몸부림은 태화가 숨 쉬듯 자연스럽게 해당 인물이 되는 것을 허락했다.
“좋아. 여기까지.”
한참 적들을 막고 있을 때, 낯익으면서도 얄미운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화를 이곳으로 밀어 넣은 로키의 목소리였다.
“사실 수십 번은 죽을 거라 생각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