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30
잠깐 들었던 희망을 접으며 나영은 태화를 응시했다.
원래 목적은 유라의 실력을 확인하는 것이었으나 태화의 연기를 보자 한 번쯤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오디션 때도 느꼈지만 태화 씨 연기를 보고 있으면 감탄이 나와.”
“가람이란 역이 저한테 잘 맞은 덕이죠.”
“겸손하기는.”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태화의 인사에 그녀는 크게 확장된 동공으로 그를 바라보다, 곧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역시 태화 씨는 보통내기가 아니라니까.”
나영은 연기할 때 배우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캐릭터를 가장 잘 아는 것은 자신이니까.
배우의 한계를 타인인 자신이 더 잘 안다고 자신했으니까.
그냥 보면 본능적으로 알았다.
가끔 인지도 때문에 픽업되는 배우라도 그것이 거품인지 아닌지, 진짜인지 가짜인지 감이 왔다.
그렇게 홀로 캐릭터를 완성하던 예술가가 이번만큼은 태화에게 조형의 일부를 맡겼다.
그 기대를 태화는 200퍼센트 부응했다.
‘유라 씨도 그렇고 승우 씨도 그렇고, 이번 주연들은 대부분 흥미로워.’
유라가 갑자기 성장한 연기력으로 그녀의 예상을 피했다면 승우는 양파 같은 모습 탓에 가늠하기 힘들었다.
한지아를 제외한 세 명을 떠올리던 그녀는 그제야 승우를 못 본 것을 깨닫고 두리번거렸다.
보조 작가와 통화할 때만 해도 있다고 들었는데 어째 보이지 않았다.
“승우 씨도 여기 있다고 들었는데, 없나?”
“아까 갔습니다.”
그의 말에 나영은 아쉽다는 듯 탄성을 흘렸다.
사실 아쉬운 게 맞았다.
승우는 만날 때마다 조금씩 인상이 바뀌었으니까.
‘오늘은 또 어떤 영감을 불러일으켜 줄까 기대했는데.’
한 조각 남은 치킨을 누군가 날름 집어 먹은 것 같았다.
“앗, 작가님. 아직도 계셨네요.”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나온 유라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미 커다란 장비는 전부 철수됐고 세트장 정리도 거의 마무리됐는데도 둘은 여전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유라 씨! 바로 가지. 피곤할 텐데.”
걱정 섞인 나영의 말에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완전히 배우로 봐 주지 않는 건 서운해도 이런 식의 배려는 기분 좋았다.
“태화 씨에게 잠시 할 말이 있어서요.”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태화는 유라를 쳐다봤다.
항상 맑고 들떠 있던 그녀의 눈동자에 분함과 호승심이 떠올라 있었다.
‘······뭐지?’
그가 긴장하고 있을 때 유라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얼굴로 나영을 돌아봤다.
용건은 있지만 남이 있는 곳에서 말하긴 싫은 듯 보였다.
“작가님, 그런데 왜 하승우 선배님을 강태양 역에 앉히신 거세요?”
“으음. 왤까? 나도 사실 그게 궁금해.”
예상치 못한 질문에 나영은 승우에 대해 떠올렸다.
성격은 친절, 얼굴을 상위 5퍼센트에 들지만 연기력은 간신히 상이라 말할 정도.
맡고 있는 배역은 다 비슷하게 착하고 정의로운 인물.
그런 밋밋한 배우에게 흥미를 가진 것은 그가 자신의 드라마에 출연하면서였다.
‘이미지에 맞는 것 같아서 대충 받아들이고 다음 작품 집필을 고심했을 때였지.’
당시 나영은 여전히 혹평을 받고 있는 유라를 떠올리며 그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배역을 만들겠다고 분개하고 있었다.
덕력은 이런 곳에 써야 한다고, 완벽한 퀸 메이커가 되어 유라를 아이돌이라 무시하는 이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려 했다.
“솔직히 처음 구상한 강태양이란 인물은 따뜻한 인물이었거든? 그런데 이상하게 승우 씨를 떠올리면 흉폭하고 뱀 같은 인물이 만들어지더라고.”
작가의 본분을 위해 현장을 답사하고, 그러다 만나게 된 승우는 그녀의 심상을 자극했다.
이 사람을 남자 주인공으로 쓰면 재밌겠다.
굳세고 에너지 넘치는 ‘바다’, 그런 그녀를 묵묵히 지지해 주는 ‘태양.’
······이라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쓰면 쓸수록 강태양이란 인물은 피도 눈물도 인정도 없는 냉혈한이 되어 버렸다.
하승우를 모티브로 했기 때문에 남주인공은 꼭 그여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지만, 왜 그런 식으로 태양을 그린 것인지는 그녀 자신도 여전히 알지 못했다.
‘재능이란 거, 진짜 무서운 거구나······.’
승우의 본모습을 몇 번 본 태화는 남몰래 식은땀을 흘렸다.
무의식적으로 남의 본성을 담아 내다니 이 정도면 초능력이었다.
‘······도망친 거였네.’
매니저를 위해 남아 있겠다던 남자가 갑자기 사라진 이유를 알았다.
이 사람과 마주하고 싶지 않아 자리를 피한 것이리라.
“오늘 승우 씨를 보면 뭔가 더 알 수 있을 거 같았는데 안타까워.”
“그러게요. 저도 조금 안타깝네요.”
태화는 담담히 그녀의 말을 받았다.
당황하는 승우의 모습을 봤다면 참 좋았을 텐데, 아쉬운 장면을 놓쳤다.
“저······. 선생님.”
“뭐니?”
보조 작가의 주눅 든 음성을 듣고 나영은 새침한 목소리로 답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언제나 그랬듯 눈치가 없었다.
“그, 박 PD님이 잠시 보고 싶······.”
“넌 내 밑에 있는 거니? 걔 밑에 있는 거니? 맘대로 PPL 쑤셔 넣은 것도 그렇고. 너, 내가 우습니?”
마음에 안 드는 일 처리에 그녀는 전에 있던 일까지 들먹이며 보조 작가를 나무랐다.
“아, 아뇨오······.”
민혜는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 울면 분명 더 화낼 것이다.
기분에 따라 바뀌긴 하지만 나영만 한 작가도 많지 않다.
집안일도 거의 안 시키는 데다 구상하는 작품도 안 뺏어 가고 기분 좋으면 나름 기회도 준다.
‘다른 애들에 비하면 여긴 천국이야, 천국이라고.’
그녀는 스스로를 세뇌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되는데 여기서 버려질 순 없었다.
“······작가님, 여기까지 오셨는데 그래도 PD님은 만나고 가셔야죠.”
다른 사람들도 보잖아요.
유라는 핑계를 붙이며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나영을 달랬다.
남의 식구 일에 함부로 끼지 않는 것이 연예계, 아니, 사회의 암묵적 규칙이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 유라 씨, 태화 씨. 잘 들어가고. 다음에 봐. 넌 따라와.”
그렇게 나영이 사라지고, 숨을 내쉬던 둘은 서로의 모습을 보며 작게 입술 끝을 올렸다.
“뭔가 돌풍이 지나간 것 같네요.”
“그러게요.”
“······.”
“······.”
그 말을 끝으로 둘 사이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무언가 말하고 싶단 눈치를 보이면서도 유라는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태화는 조용히 기다렸다.
복잡해 보이는 그녀를 재촉하고 싶진 않았다.
“저······.”
“유라야? 차에 돌아가 있는 줄 알았는데 여기서······. 아, 태화 씨. 안녕하세요.”
유라가 드디어 무언가를 말하려던 순간 한 방해꾼이 둘 사이를 갈랐다.
새턴의 매니저 민태였다.
“안녕하······.”
“저! 노력할 거예요!”
타이밍만 재다가 아무 말도 못할 것 같은 불안감에 그녀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머리를 거치지 않은 목소리는 너무나 컸고,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자 유라는 새빨개진 얼굴로 ‘갈게요!’란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네에······. 힘내세요.”
바람처럼 도망가는 그녀의 뒤로 태화는 떨떠름한 응원을 건넸다.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왠지 그래 줘야 할 것 같았다······.
***
‘망했어! 망했어!’
밴에 올라탄 유라는 조수석 머리 받침대 머리를 박았다.
뜬금없이 노력한다니, 자신이 생각해도 멍청했다.
“······내가 뭔가 잘못한 거 같네.”
운전석에 탄 민태가 눈치를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애가 차에 없어 급하게 찾은 것뿐인데 아무래도 타이밍이 나빴던 것 같다.
“아니야. 매니저 오빠 아니었으면 아예 아무 말 못 했을지도······. 으으! 떠올리기 싫으니까 이 주제 금지!”
“그래그래.”
그가 조용히 차를 출발하자 몇 번 더 머리를 박던 그녀는 시무룩한 얼굴로 숨을 내쉬었다.
사실 분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매니저가 찍어 준 영상에서 태화는 유라를 ‘이용’하고 있었으니까.
이용.
단어의 의미 그대로 그녀는 동료 배우가 아닌 하나의 소품처럼 사용됐다.
‘난 그냥 말 거는 게 늦었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바라보는데도 눈치채지 못하는 여주인공.
그런 주인공에게 닿고 싶으면서도 자신의 마음이 들킬까봐 몇 번이고 머뭇거리며 평상심을 연기하려 하는 단짝 친구.
그는 한계까지 침묵하며 둘 사이의 어긋남을 극대화시켰다.
‘그런 거 치사해.’
너와 나의 거리는 이만큼 차이 난다고, 같이 걸어가는 존재가 아닌 이끌고 이끌리는 사이라고 선이 그어진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