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32
‘그 외 내용이 다른 부분은 없고······.’
암기력이 높은 그는 바로 전 읽었던 계약서와 대조하며 빠르게 내용을 훑었다.
역시 장난친 곳은 없었다.
태화가 쉽게 서명하자 도리어 옆에 있던 둘이 당황해버렸다.
“저, 태화씨. 태화씨가 아직 사회 초년이라 잘 모르는 것 같은데, 계약서엔 그렇게 쉽게 사인하면 안 됩니다.”
물가에서 위태롭게 노는 어린애를 보는 기분에 용운은 자신도 모르게 조언을 건넸다.
태화는 방긋 웃었다.
맑디맑은 것이 누가 봐도 순진해 보이는 미소였다.
“아까 계약서와 전혀 다르지 않은 건 확인했습니다.”
“······네?”
“제가 기억력이 좀 좋아서 이 정도는 순식간에 기억할 수 있거든요.”
“······.”
용운은 할 말을 잃은 채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자신들이 새로 계약한 배우는 여러모로, 정말 여러모로 특이했다.
────────────────────────────────────────────────────────────────────────폰 안의 담당자
“······다 외우셨다고요?”
업무 관련 내용에만 입을 열던 변호사가 처음으로 개인적인 질문을 던졌다.
계약서는 대본과 다르다.
규격에 따른 흐름이 있기는 해도 스토리가 있는 건 아니었고 조항 한줄, 단어하나에도 의미가 바뀌었다.
‘단순히 골자를 파악한 거겠지.’
남길은 당황했던 마음을 추스르며 손을 움직였다.
1번 조항은 어떤 내용이며 무슨 의미다, 그런 식으로 정리한 것을 새로 읽은 계약서와 맞춰보고 말한 것이리라.
물론 그것도 대단했으나 경악할 수준은 아니었다.
“4장 정도는 잔상 맞추듯 교차하는 게 가능하죠.”
그러나 태화의 발언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너무 놀렸나?’
할 말을 잃은 두 남자를 보고 태화는 가볍게 웃었다.
연예계는 약해보이면 무시당하는 곳이다. 그러니 같이 일할 이들에게 자신의 특출함을 부각시키고 함부로 대하면 안 되는 인물임을 강조해라.
결국 BGA로 가겠다는 그가 불안했던지 유라가 알려준 팁이었다.
오디션 장도 아닌 곳에서 연기를 펼칠 수는 없었으니 바로 보일 수 있는 특기를 보여주는 게 가장 수월했다.
“······저, 교차라는 게?”
“투명 종이에 내용을 적으면 비치잖아요? 그걸 두 개 겹치면 다른 부분은 표시 나고요. 전 그런 식으로 확인이 가능합니다.”
태화는 검지를 서로 두드리며 예시를 들었다.
암기력이 Ⅱ단계에 진입하고 조금씩 숙련도를 올리자 어느 날부터 소소하게 바뀐 대본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배우의 대사 때문에 자신의 대사가 한줄 밀려있다던가, 쉼표로 표기됐던 부분이 마침표로 바뀌었다던가.
일반적으로 알아채기 힘든 변화가 잠깐 잠깐 눈에 띄었다.
‘뭐, 이 수준으로 끌어올린 건 내 노력이지만.’
남에게 보일만한 특기가 될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에 태화는 텍스트로 이뤄진 문서를 몇 장 내려 받고 주변의 이들에게 그 파일의 단어나 조사 등을 조금씩 바꿔서 인쇄해달라 부탁했다.
그리 어려운 요청이 아니었기에 다들 의아해하면서도 흔쾌히 들어줬고 처음엔 한 장도 힘들었던 전체 암기가 점차 4, 5장으로 늘었다.
“······.”
용운은 그가 허풍을 떠는 건 아닌지 유심히 쳐다봤다.
그러나 얻을 수 있는 이득도 전무했거니와 확인하면 바로 들통 날 거짓말을 계약이 끝나고 할 이유가 없었다.
“······혹시 자폐증이라도 앓았습니까?”
다른 계약서 사본을 보여주며 확인해보던 변호사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조항을 수정하다 실수한 조사까지 집어내는데, 솔직히 소름 돋았다.
‘진짜 서번트 증후군 같은 걸······. 근데 이 좋은 머리로 왜 배우를 하지?’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시선이 마주친 태화가 곱게 눈웃음을 쳤다.
“홍보차 방송이라도 나가면 보여줄 만한 특기가 있는 편이 좋으니까요. 그래서 연습한 것뿐이지 머리 자체는 특출나진 않습니다.”
“어, 생각을······.”
“······얼굴에 다 드러나세요.”
당황하며 볼을 문지르는 남길을 보고 태화는 작게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거짓말이 아님을 알자 변호사의 얼굴에 걸려있던 빈틈없던 미소가 사라졌다.
생각이 그대로 비추는데 모르는 것이 더 힘들었다.
“대단하군요.”
“놀래키는 덴 꽤 좋은 기술이죠.”
“정말 놀랐으니 성공하셨네요.”
괜히 팀장의 직위에 있는 것은 아닌지 어느새 여유를 찾은 용운이 농담을 넉살을 떨었다.
‘처음엔 연예계랑 안 어울리는 친군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잘 맞겠어.’
그는 처음 태화를 보고 했던 생각들을 떠올렸다.
연기력은 있지만 방송에서 확 튀는 얼굴은 아니다.
사람을 잘 믿고 ‘너무’ 착하다.
······라고 느꼈는데, 몇 번의 대화로 그 인상이 바뀌었다.
여기 있는 둘만해도 태화란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계속 고민하게 됐으니까.
방심한 척 행동해도 중요한 부분은 놓치지 않는데다 자신이 만만치 않음을 은은히 경고할 줄도 안다.
태화의 태도는 화려한 가식의 칼날 위에서 노닐기엔 충분했다.
“그럼 계약 건은 이것으로 마무리하고······. 석희씨를 통해 필모그래피와 이력 내역을 전달 받았습니다만, 원하시는 이미지나 컨셉이 있다면 오늘 소개시켜드릴 담당자를 통해 알려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태화를 보고 용운은 다행이라 여겼다.
연예인들 중에는 실장 이하의 평직원, 그러니까 딱히 내세울 직함이 없는 직원이 자신에게 달라붙으면 기분 나빠하거나 불안해하는 경우가 많다.
어느 정도 이름 있는 이들은 자신을 저평가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대충 알아보고 뛰어든 신인들의 경우 자신에게 재능이 없기 때문에 어중이를 붙였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매니지먼트이지만 일반 회사와 비슷한 직급을 사용하는 BGA의 시스템은 그들에게 낯설게 다가갔다.
‘그렇다고 직급에 인플레를 일으키는 건 말도 안 되지.’
단순히 직급만 바뀌는 것이니 문제가 없다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BGA는 눈 가리기용 타협을 원하지 않았고 약간의 불평을 감수했다.
“그리고 아직 매니저가 없으시다 들었는데······.”
“아, 혹시 그 부분에 대해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저희는 단순 중개도 겸임하고 있으니까요.”
관련 회사에서 어느 정도 경험을 쌓은 뒤 프리랜서로 일하는 매니저는 적지 않다.
그러다가 담당하던 연예인이 그만둬서 혹은 저 혼자만 기획사로 들어가서, 어쩔 수 없이 구직 활동을 벌이게 된 이들도 넘쳤다.
BGA는 그런 이들을 데이터베이스에 넣었고 신규 등록 이외의 정보를 2개월에 한번 갱신했다.
“지불 가능한 급료, 원하시는 업무 범위와 스타일을 정리해서 알려주시면 5일 안에 중개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대화가 끝나려던 찰나 작은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용운의 허락과 함께 들어온 이는 작은 여성으로 움츠려든 모습이 숫기 없어 보였다.
“아, 서연씨 딱 좋게 왔네요. 태화씨, 이쪽이 태화씨를 담당해줄 임서연씨입니다. 서연씨, 이쪽이 이태화 배우님.”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저, 팀장님······.”
쭈뼛거리며 고개를 숙인 서연은 작은 소리로 용운을 불렀다.
의아해하던 그가 서연에게 다가가자, 그녀는 자신의 폰을 보여주며 작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저, 태화씨. 혹시 뮤직 비디오에 출연하신 적 있습니까?”
“네. 새턴 멤버들이 곤란해 해서 대타로 들어간 일이 있습니다.”
태화는 당시의 일을 설명했다.
인지도를 올릴 겸 당일 알바 수준으로 했던 일인지라, BGA와 계약하는 시점에서 적는 것을 잊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용운이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우 입장에선 그러는 게 당연하지.’
연예계는 인기와 인지도 싸움이다.
무명이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 이곳저곳에 얼굴을 들이미는 건 현명한 일이었다.
‘댓글들이 싸우고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나쁘진 않고······.’
스크롤을 내려 기사의 댓글을 확인한 그는 까슬한 턱을 쓸었다.
이미지가 잘못 박힐 수 있기 때문에 BGA는 작품뿐 아니라 광고와 예능 같은 부수적인 일도 까다롭게 선별했다.
당시 BGA와 계약했던 상태라면 새턴의 팬층, 손익을 계산해 최선을 다해 말렸으리라.
새턴처럼 배타적인 팬층을 가진 걸그룹과 합동을 해봤자 안티만 늘 가능성이 크니까.
그러나 다행이도 현재 기사의 댓글은 크게 두 쪽으로 갈렸다.
└얘, ㄴㄱ?
└배우? 첨 보는데ㅋ? 이런 듣보를 새턴에 출연시켜? 사장놈 담가 버릴까보다.
└드라마 홍보 차원에서 넣은 건가? 쓸데없는 짓을 하네.
└니들 영상 보고 하는 말임? 이번 거 대박ㄷㄷㄷ 특히 쟤 연기하는 거 보고 지림.
└본인이세요?
└ㅇㅈ. 3분짜리 영상을 판타지 트레일러로 바꾸는 기적.
└타팬 ㄲㅈ
└우리 애기들이나 보자. 이번 MV에서 완전 요정처럼 나옴.
└새턴은 원래 요정이었음.
일단 남자가 등장한다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나타내는 이들과 영상을 보고 연기력은 괜찮다는 이들.
과격하기로 유명한 팬층 치고 나쁘지 않은 반응이었다.
“방금 막 MV가 공개 됐습니다. 약속하셨다던 기사들도 나쁘지 않게 나갔고요.”
‘새턴 MV에 등장한 훈훈한 남자는 누구?’, ‘새턴, MV에 처음으로 이성이 나온 이유’, ‘새턴과 호흡을 맞춘 남자는 알고 보니······.’
제목엔 어그로가 다분했지만 내용은 대부분 새턴의 MV에 대한 호평과 홍보가 약간, 마지막으로 태화의 이름과 드라마 내의 역할이 한 줄 정도로 포함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드라마 홍보를 위해 껴 넣은 모습이었으며 딱히 새턴과의 친분은 드러나지 않았다.
‘공적인 관계라면 일에 불과하니까······.’
팬들의 태도가 미온적인 것은 그러한 이유 탓이리라.
사적으로도 친하다는 말이 퍼졌다면 이 정도로 온건하게 대응하진 않았을 것이다.
“일단 이것도 의 홍보와 연관된 일이니 저희가 회사 대 회사로 드림문과 접촉해 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태화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