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62
태화는 ‘오현수’란 인물을 분석하지 않고 다른 작품들에 더 신경 쓰며 기계적으로 대사를 읊고 감정을 외웠다.
재미있을 것 같은 작품이 두 편이나 있으니 해이해진 것이다.
그런 태도에 익숙해지다 보니 보통 난이도의 연기가 그대로 어려움에 반영됐으며 영혼 없는 ‘오현수’가 완성됐다.
관성적으로 진행한 연기를 자연스럽다고 느낀 어리석은 행동.
결국 자신의 나태가 잘못이었다.
‘······멍청하긴.’
이렇게 보면 ‘고백’이 상당히 뜬금없는 껴 있다는 게 느껴지는데 지금까지 몰랐다는 것이 한심했다.
‘여기서부터 다시 생각해야해.’
그는 ‘좋아합니다.’라는 대사를 톡톡 두드렸다.
10년 가까이 참아왔던 남자가 갑자기 고백한 이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수는 자신의 용기에 확실히 보상을 받았다.
‘그런데도 다시 참기 시작했지.’
곧 헤어질 이혜련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그는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그녀가 원하는 대로 움직였다.
그러나 한번 제 감정을 터뜨렸던 사람이 예전과 같을 수는 없다.
그 결과가 좋았다면 인내심을 더더욱 짧아질 수밖에 없었다.
태화가 잘못된 부분을 깨닫고 오현수에 대해 다시 정립하는 사이,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현규는 슬그머니 자리를 벗어났다.
열심히 준비 중인 배우를 말리는 것보다 매니저의 본문을 다하는 편이 나았다.
‘하승우 전 매니저한테 정보를 알린 사람이 박 PD라고······.’
촬영장 관리를 AD에게 맡겨두고 소홀히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제 영달에만 지대한 관심을 가지던 창식은 상식이 벌인 일들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총괄 감독씩이나 되서 어떻게 현장 일을 모를 수 있냐고 다들 황당해했지만 한 방에 붕 떠버린 신데렐라는 무도회장을 즐기는 정신이 팔려 아래서 올라간 보고들을 대충 넘겼다.
외려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자기가 어떻게 야냐’라고 적반하장으로 나와 AD를 비롯한 조연출들이 복창이 터졌다고 한다.
현장에 조금만 관심 있었다면 알 수 있었던 일을, 국장의 말에 홀려 젯밥만 신경 쓴 탓에 몰랐던 것이다.
‘BGA측에서 대응하려해도 같은 PD들이 감쌀 수 있으니 일단 사이부터 벌려야지.’
연예계 업종들은 외부의 적에 민감하다.
아무리 PD의 부주의가 이 사단을 일으켰다 해도 기득권층에 가까운 만큼 치부를 덮어주기 위해 도와주거나 가장 힘없는 배우, 태화에게 악감정을 가질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먼저 그룹으로부터 떼어내 개인으로 만들어야했다.
다행히 최근 안하무인으로 행동한 터라 창식을 싫어하는 PD들이 은근히 있었다.
“아? 나 PD님? 저 이태화의 매니저 김현규입니다. 아하하, 네, 저번에 고기집에서 뵈었죠. 기억해주시니 기쁩니다. 다른 게 아니라 제가 술이나 한 잔······.”
대본을 다시 정독하는 태화를 힐끔거리고 밖으로 나온 현규는 요즘 창식에게 가장 무시당하던 드라마 PD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태화는 차근차근 대본을 따랐다.
이혜련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그녀가 올 겨울을 넘기기 힘들다는 걸 미리 알려줬다면 좋았을 것을, 고작 운전기사에 불과한 현수에게 의사는 그녀의 건강 상태를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참고 또 참았던 현수는 어느 날 힘들어하는 그녀를 향해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아가씨, 전 아가씨를 좋아합니다.”
“······어? 정말요?”
“네, 약혼자가 있는 건 알지만 그래도 이 마음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
“제 마음을 받아주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단지 아가씨를 이리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기억하고 조금만 더 힘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거 쓴 작가 분명이 연애한번 안 해봤을 거야.’
참 닭살 돋는 대사라 생각하면서도 태화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혜련을 향해 고백했다.
그리고 환하게 피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만개한 꽃을 떠올렸다.
너무 피어나 이제 지는 것밖에 남지 않은 꽃을 말이다.
“나도······. 오빠가 좋아요. 항상 날 돌본 건 다른 사람이 아닌 오빠잖아요? 오빤 예전부터 제 부모였고, 형제였고, 연인이길 바란 사람이에요.”
“아가씨······.”
80년대 영화에서도 듣기 힘든 대사를 직접 들으며 태화는 감격을 드러냈다.
글로 보면 오글거리는 대화였으나 초췌하면서 청조한 미인이 그런 말을 내뱉자 의외로 감정 이입이 잘됐다.
“봄이 돼서 내가 좀 더 건강해지면 같이 꽃놀이 가고 싶어요.”
“물론이죠.”
태화는 작은 미소와 함께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감쌌다.
“아가씨께서 원하신다면 어디든 함께 가겠습니다.”
“서로 좋아하는데도 아직도 아가씨라 부르는 거예요?”
“······그건 좀 더 노력하겠습니다.”
“피이······.”
볼을 부풀리던 혜련은 ‘그 정도는 봐준다’는 얼굴로 그를 빤히 응시하다가, 곧 표정을 풀고 해맑게 웃었다.
“열심히 노력해야해요?”
“네.”
“그럼 이제 귤 까줘요.”
“······네.”
기승전귤로 넘어가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태화는 검은 봉투에 들어 있던 귤을 하나하나 까서 그녀에게 건넸다.
“이번 겨울은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 만지지도 못할 눈 같은 건 싫어.”
“네.”
창밖에서 내리는 눈을 보며 투덜거리는 혜련에게 태화는 담담하게 긍정을 표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내일 봐요.”
“네.”
밤이 늦어 병실을 나선 태화의 앞에 다음 스테이지, 장례식장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작게 숨을 쉬고 악어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들과 그 앞에 웃고있는 여성의 사진을 응시했다.
여 주인공 이혜련의 장례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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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일간의 데이트
태화가 감았던 눈을 뜨자 그의 몸은 장례식장에서 이혜련의 병실 문 앞으로 이동했다.
현실감 넘치는 무대지만 이런 부분들을 겪을 때마다 이곳이 극본 안이라는 걸 새삼스레 느끼게 했다.
‘이제부터가 중요한데 말이지······.’
지금까지는 극본을 거의 그대로 따라왔으나 이제부터는 그가 생각했던 ‘오현수’를 연기해야한다.
원 대본처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주인공이 아니라 고백에는 성공했지만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제 감정을 ‘미흡하게 봉합한’ 주인공을 말이다.
‘그나저나 대본 짠 사람이 누구지? 내용 자체는 진부하면서도 나름 참신한데 대사가······.’
특히 여 주인공이 죽기 전까지는 쌍팔년도에도 안 쓸 분위기와 설정을 그대로 채용하고 있었다.
영화였기에 망정이지 드라마였다면 시청률을 그대로 말아먹었으리라.
정말 다행이도 는 한번 표를 끊으면 의자를 박차고 나가지 않는 이상 끝까지 보게 되는 ‘영화’였고, 여 주인공이 죽은 이후의 대사나 행동은 약간의 코미디가 가미돼 톡톡 튀는 맛이 있었다.
‘영상은 김태우 감독이 맡은 만큼 괜찮을 거고 배급사도 GY니 망하진 않겠는데······. 좀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네.’
현재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근 시일 내 영상미로 유명해질 감독과 대형 배급사가 낀 만큼 가 실패할 확률은 현저히 적었다.
그 점이 초반의 아쉬움을 지워주는 건 아니었지만.
태화는 복잡했던 생각을 한 구석에 몰아 두고 병실 문을 두드렸다.
잠시 기다리던 그는 곧 혜련의 죽음을 떠올렸다는 듯,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들어가겠습니다······.”
현수가 항상 했던 말을 힘없이 내뱉고 태화는 문을 옆으로 밀었다.
새하얀 병실 벽부터 깔끔하게 정리된 침대 시트 등이 눈에 들어온다.
천천히 시선을 돌리던 그는 침대 반대편에 튀어나온 익숙한 머리통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이런 혼자 놀기도 슬슬 졸업해야······. 오! 현수 오빠다. 무슨 일로 온 거지? 내 짐 찾으려면 1층에 가야할 텐데.”
빼꼼히 고개를 들던 소녀는 태화의 모습을 확인하고 반가운 얼굴로 침대를 기어 그가 서있는 문가로 움직였다.
그녀가 누르고 지나간 시트엔 아무런 자국도 남지 않았다.
“오빠, 나 그리워서 온 거예요? 아무리 고백한 사이라도 이러면 부담······. 어차피 보이지도 않을 텐데 상관없나.”
초반과 달리 활발하고 또래다운 장난기를 가진 혜련이 태화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모습이 안 보일 것을 깨닫고 약간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태화가 자신의 원맨쑈를 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아가씨?”
“으허억! 하, 깜짝이야.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 ······어?”
깜짝 놀라 뒤로 넘어간 혜련은 아프지 않은 엉덩이를 습관적으로 매만지고 슬쩍 고개를 들어 태화를 쳐다봤다.
그리곤 마주친 눈에 당황하며 시선을 때지 못했다.
“정말 아가씨입니까?”
“말 놓으라니까 진짜 말 안 들어. 아니, 그보다 오빠, 진짜로 나 보여요?”
불평을 뱉던 혜련은 자신의 손을 그의 앞에 휘휘 휘두르며 신기하단 표정을 지었다.
처음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아무도 없는 병실에 놀랐다.
그 난리가 났는데 기절한 그녀를 간호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으니까.
혜련이 자신의 죽음을 깨달은 것은 청소하는 이들이 들어와 자신의 방을 정리했을 때였다.
묵묵하게 그녀의 흔적을 지우던 이들은 그녀가 아무리 말을 걸어도, 가져가지 말라 소리쳐도 듣지 않았다.
있는 힘껏 제재하려 해도 그대로 지나 통과할 뿐.
그 씁쓸한 경험을 통해 혜련은 자신의 죽음을 강제로 받아들였다.
태화도 그 부분을 알고 있었다.
축복으로 연습할 땐 볼 일이 없는 장면이더라도 대본엔 그녀의 행동과 움직임이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촬영 때는 따로 찍어서 합치는 식으로 표현할 텐데. ······상대가 김효신이니 잘 하겠지.’
넘어진 혜련을 향해 손을 뻗었던 태화는 그대로 통과하는 그녀의 가녀린 손에 충격 받은 얼굴을 한 채 이혜련 역을 맡은 배우를 떠올렸다.
김효신.
성숙하고 도도한 분위기를 가졌으면서도 활발하면서 약간 허당기 있는 역할을 주로 연기하는 배우.
요즘 로맨스 코미디 트렌드와 맞아 떨어져 로맨스의 여왕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가진 7년차 배우였다.
그런 그녀가 에 출연한 것은 의외였으나 나쁠 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일단 외적인 건 밀어두고 연기에 집중하자.’
이번에야말로 120, 130의 동기화를 노리는 만큼 태화는 눈앞의 상대에게 집중했다.
죽어서 유령이 된 이혜련은 그 전의 모습과 완전히 다른 생기 넘치는 소녀의 모습을 선보인다.
항상 병약하고 아스라질 것 같던 분위기와 대조적으로 말이다.
그것을 의아하게 여긴 남자 주인공의 물음에 그녀는 당연한 거 아니냐는 눈빛으로 담담하게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