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63
“이젠 이렇게 행동해도 품위 없다 꾸중할 아버지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오빠도 말 좀 편하게 해요.”
고통과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던 몸에서 해방된 혜련은 소녀다운 싱그러움을 자랑했다.
비록 지박령이 된 탓에 병실에서 벗어날 순 없었지만.
“······아가씨는 죽어서도 병실을 못 떠나시네요.”
“내 말이! 내가 여기 항상 있던 것도 아니고 겨울에만 박혀있던 건데 좀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니 죽은 것도 억울한데 왜 유령이 돼서까지 병실이냐고!”
침대에 배를 깔고 누운 혜련은 성질을 부리며 침대를 팡팡 쳤다. 물론 행동만 과격했을 뿐, 침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오늘 하루 종일 우울했는데 오빠 덕에 살 거 같아요.”
한참 날뛰던 그녀는 곧 축 늘어진 채 얼굴을 묻고 웅얼거렸다.
누구도 그녀를 보지 못하며 말을 걸어도 반응하지 않는다.
어떠한 행동을 해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고작 하루에 불과했지만 혜련은 생전보다 못한 현실에 절망하고 있었다.
차라리 끔찍한 고통 속에 다시 내던져지길 바랄 정도로 말이다.
“병실에서 오래 지낸 것도 아닌데······.”
입원한 시간보다 밖에 있는 시간이 길었는데 왜 이렇게 된 거냐고, 그녀는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오현수씨 역시 여기 계셨네요. 실례지만 외부인들은 나가셔야 할 시간이라······.”
혜련을 안타까운 눈으로 응시하던 태화는 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항상 혜련을 도와주던 간호사가 ‘역시나’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아뇨, 아뇨! 이해해요. 특히 혜련씨는 저희도 한두 해 봐온 게 아니니까······. 그래도 어쩌겠어요. 산 사람은 살아야죠.”
씁쓸한 눈으로 바닥을 보던 간호사는 1층에 혜련의 짐이 있다는 말을 남긴 채 자리를 비켜줬다.
“······차라리 아가씨가 저한테 붙었으면 좋을 텐데요.”
“에이! 그게 무슨 소리예요! 오빤 앞날 창창한데 내가 붙으면 완전 민폐지!”
태화가 닫힌 병실 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혜련은 기겁하며 손을 내저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주변에 짜증을 부리지 않던, 남의 마음을 아낄 줄 알던 그녀다운 반응이었다.
그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똑바로 혜련을 응시했다.
원래는 그대로 문을 바라본 채 ‘평생 보필한 사람으로서 당연한 겁니다’란 사감 섞이지 않은 대사를 쳐야한다.
이미 죽은 그녀에게 더 부담을 지우기 싫어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따르는 언행.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대신 태화는 만져지지 않는 혜련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하루뿐이라도 연인사이였잖습니까, 우리.”
“어······.”
“아니었어?”
멍하니 눈만 깜박이던 그녀는 갑자기 튀어나온 그의 반말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침몰했다.
잘 익은 사과마냥 빨개진 것이, 원래의 대본에선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갑자기 그렇게 말하는 거 좀 치사하지 않아요? 내가 반말하라고 했을 땐 계속 무시하더니!”
“별로.”
“으, 핸드폰만 들 수 있으면 동영상으로 남기는 건데!”
분통을 터뜨리던 그녀는 곧 힘을 잃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기운을 빼봤자 이 작은 병실이 그녀가 이제부터 있어야할 세계였으니까.
“······정말, 오빠한테 붙을 수 있었다면 좋을 텐데.”
혜련은 시무룩한 얼굴로 몸을 웅크렸다.
참 안쓰러운 모습이었으나 그것을 본 태화는 주먹을 쥐었다.
한 번 더 밀어내야할 그녀가 순순히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 작은 변화에서 그는 새로운 길을 보았다.
“혜련아.”
“응?”
“그래서 말인데······.”
태화는 혜련이 하루 동안 홀로 찾아야 할 부분을 대사로 읊으며 상황을 빠르게 진행시켰다.
그녀와의 사후 관계가 고용주, 피고용주 사이에서 연인으로 바뀌었으니 그에 맞게 행동한 것이다.
다시 나타난 간호사가 그를 재촉했을 때, 태화는 혜련과 함께 병실을 나올 수 있었다.
* * *
태화는 혜련을 데리고 그녀가 생전 가지 못했던 곳들을 구경했다.
원래라면 즐거워하는 여주인공과 병풍 같은 모습으로 끌려 다니는 남주인공의 이야기가 되어야했지만, 연인이란 관계가 부활한 지금,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대사는 비슷한데 말이지.’
태화가 한 것은 많지 않았다.
존댓말이었던 말투를 반말로 하며 여주인공의 이름을 부르고, 멍하니 보고만 있어야 할 장면에서 한 번 더 그녀의 눈을 마주한 게 전부.
그것만으로도 여주인공 홀로 톡톡 튀던 장면이 연인들 간의 여행으로 바뀌었다.
유령과 인간의 로맨스였지만 관객들 입장에선 그저 달달하고 웃음 짓게 되는 데이트.
이것이 극 안임을 알고 있는 태화마저 혜련에게 휘말려 웃게 되는 일이 종종 생겼다.
그러나 종족이 다른 만큼 헤어짐은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다.
살아 있는 인간이 평생 이렇게 살 수는 없었으니까.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현수의 어머니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고 설상가상으로 혜련의 몸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오빠 나 며칠 안 남은 거 같아.”
당황하는 태화에게 그녀는 폭탄 발언을 터뜨렸다.
“뭐?”
“길어야 일주일? 사실 미련이라고 해도 오빠 하나였으니까······. 이 정도면 잘 논 거지. 고마워 오빠.”
인상을 쓴 채 배시시 웃는 혜련을 그는 멍한 눈으로 응시했다.
‘······과연 잘 될까?’
충격으로 굳은 겉모습과 달리 태화는 복잡한 머리를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가족이 아프면 주변 사람들은 비록 뒤에서 울지언정 억지로 밝은 모습을 보이며 아픈 당사자가 신경 쓰지 않도록 배려한다.
의 주인공 오현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미련을 뒤로 접은 채 곧 사라질 혜련에게 좋은 모습만 보이려고 노력했다.
그녀가 더 미련을 가지지 않도록, 그녀가 해결할 수 없는 헤어짐에 슬퍼하지 않도록.
하지만 한번 달콤한 과실을 맛 본 사람은 이기적으로 변하는 법이었다.
“······네가 사라지면 난 어떡해?”
“······.”
태화는 절망 섞인 얼굴로 한 방울의 눈물을 흘렸다.
추해지지 않도록 딱 한 방울, 한 번의 미련을 보였다.
“·········미안.”
“아냐, 오빠.”
원래 없던 대사이고 장면인 만큼 그는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고개를 숙였다.
과거 바다처럼 답지 않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추방시킬까?
아니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대사를 따를까?
그렇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녀의 행동을 기다리던 태화의 몸에 약간 투명해진 팔이 감겼다.
“오빠, 한국의 49재는 혼백이 심판을 받는 시간이라 하지만 사실 산 사람이 마음을 추스르기 위함이래.”
혜련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그를 달랬다.
그와 함께 했기 때문에 즐거웠던 것들, 죽은 뒤 겪었던 추억들을 하나하나 되새기며 태화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전에 간호사가 한 말이 있잖아,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난 오빠가 이 추억들을 추억으로 간직한 채 한 걸음 더 나갔으면 좋겠어.”
“미안해······.”
“난 오빠한테 미안하단 말보다 고맙다는 말이 듣고 싶어. 우리 남은 날들을 후회 없이 보내자.”
혜련은 만질 수 없는 그의 볼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닦아주는 시늉을 했다.
“그게 날 위한 위령(慰靈)이야.”
마주한 눈을 보고 그녀는 곱게 웃었다.
이후에도 태화와 혜련의 행동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순간순간 최선을 다했으니까.
마지막 장면에 도착하자 태화는 이대로 끝이구나 하는 약간의 섭섭함을 담아 눈 사이에서 꽃봉오리를 응시하는 혜련을 바라봤다.
이제 그녀가 ‘안녕’이라는 말을 뱉고 사라지면, 얼굴을 가린 채 ‘안녕’이라 하면 된다.
그렇게 마지막 대사를 준비하고 있던 그 순간.
멍하니 가지를 바라보던 혜련이 작은 미소와 함께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빠 정말 사랑했어.”
그녀는 끝까지 나무 근처에 있는 대신 태화에게 다가와 그의 볼에 입을 맞췄다.
“그러니 행복해야해.”
따스한 눈으로 쳐다보던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안개처럼 사라졌다.
달라진 대사에 우두커니 서있던 그는 뒤 늦게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응······.”
그 대사를 끝으로 그가 서 있던 눈밭은 하얀 제단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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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폭렙이다
에서 가람의 역은 좋게 말하면 서브 남주, 나쁘게 말하면 주연들 사이를 돋보이게 만드는 감초에 불과했다.
1화에서 남녀 주인공의 하룻밤이 훅 치고 들어가는데다 제목부터 대놓고 주연들을 밀어주니 뒤집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보니 드라마에서 종종 벌어지는 여주인공 스틸, 주연 뒤집기는 당연히 불가능했고 태화는 자신이 돋보일 수 있는 부분만 확실히 챙겨가며 인기와 지명도를 쌓았다.
남주인공, 강태양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최선을 다해 맞부딪히는 모습을 통해 박가람은 안타까운 비운의 캐릭터로 남을 수 있었다.
일종의 언더독 효과(underdog effect 약자가 성공하기를 바라는 심리나, 그를 응원하는 현상)로 최종화 직전엔 ‘제목만 아니었다면 가람이 남주되어도 좋았을 텐데, 강-바다 커플 응원합니다’, ‘아무리 개심했다고 해도 저런 사패 남주보다 가람이 귀엽지 않나’ 같은 반응도 얻었다.
물론 소수에 불과했고 대다수는 차도남의 왕도같은 태양의 매력에 빠져들었지만 말이다.
그랬던 드라마와 달리 의 오현수는 남자 주인공이었다.
그것도 주변인이 들러리에 가까운 단 둘만의 이야기 속 주연.
그런 만큼 작은 행동, 말투 하나로 작품의 방향을 바꾸는 게 가능했다.
실제 주연 자리에 오른 다음 감독의 의도를 무시한 채 자신이 만든 캐릭터대로 연기해 원래 구상했던 영화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는 배우들도 있었다.
그 순간부터 감독과 척을 지는 것이니 웬만한 이름값 없이 엄두도 못 낼 행동이었다.
태화가 한 행동 또한 그들과 다르면서 비슷했다.
각본이 그렸던 주인공에 대본보다 더 충실하면서, 그 충실함을 바탕으로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바꿨으니까.
여느 때보다 확실하게 ‘오현수’를 파악한 그는 이 방향이 올바르다고 믿었다.
‘뭐, 감독을 설득하는 건 별개라도.’
주연이라도 신인에 불과한 태화가 입지 단단한 배우들처럼 감독을 향해 감 내놔라 배 내놔라 할 수는 없는 건 당연하다. 어쩌면 이런 만족스런 길을 겪고도 촬영은 원본대로 갈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편이 영화를 위해 더 좋지 않을까 아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