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7
“그리고 박가람에 대해 물으신 거라면······. 상당히 계산적인 인물이라 생각합니다.”
특이한 대답에 피디는 지겹다는 눈빛을 보냈고 작가가 입술을 비틀었다.
“그거 알아요? 신인들이 잘하는 실수가 있어요. 역할을 좀 독특하게 해석한 척하면 사람들이 놀랄 거라는 착각.”
대놓고 빈정거리는 말을 듣고도 태화는 여유로운 미소를 뗬다.
이 정도 반론은 이미 예상했었으니까.
“전 작가님을 믿기에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나를요?”
의아해하는 나영을 확인하고 그는 테이블을 쭉 훑어 옆에 있는 카메라 스텝까지 응시한 뒤 다시 작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디션을 보는 사람답지 않게 긴장이라곤 하나 없는 태도였다.
“네. 인물 설정을 중시하는 작가님이 ‘가족들의 반대를 무시한 채 꿈을 좇는다’, ‘얄미울 정도로 현실적이고 맞는 말만 한다’, ‘좋아하는 여주인공에게 고백도 못한 채 호구짓을 한다’와 같이 충돌되는 설정을 괜히 넣었을 거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내로남불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최나영 작가는 그런 성격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오죽하면 인터뷰에서 ‘자기만 예외라 생각하는 인물이 똑같이 당해서 우는 게 좋더라고요’라고 말했을까.
‘그러니 현실적인 말만 하는 박가람이 꿈을 선택한 것도 대본에 없는 이유가 있겠지.’
나영은 주변 인물들에게 약간의 모순을 주고 그걸 드라마가 늘어질 수 있는 부분에서 조금씩 풀어 가는 방식을 사용했다.
그녀가 그린 인물들이 하나같이 매력적이라 평가받는 것엔 그런 이유가 있었다.
그가 작가의 입맛에 맞는 말을 몇 가지 더 언급하자 그녀는 묘한 미소를 보냈다.
“······잘도 생각했네요. 고작 4개밖에 없는 신에서 그걸 느끼기 힘들었을 텐데. 꽤 마음에 들어.”
긍정적인 반응에 태화는 첫 번째 고비를 넘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가 넘을 산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됐고, 2-3 연기해 보세요.”
옆에서 시큰둥한 얼굴을 하고 있던 피디가 그에게 연기를 요구했다.
2-3.
술자리에서 사라진 바다가 외박까지 하고 돌아오자 가람이 화내는 신(scene).
그대로 무시한 채 가 버리는 여주인공을 보며 멍청하게 ‘쟤 왜 저래?’를 말하는 걸로 마무리되는, 임펙트라곤 하나 없는 장면이었다.
‘보통은 1-5나 4-18을 시킬 텐데.’
튜토리얼의 미션으로 진행됐던 부분들이 4번의 등장 중 가람의 성격을 잘 반영하는 동시에 연기력도 확인하기 좋았다.
태화는 창식을 응시했다.
일부러 소홀히 할 수 있는 장면을 시킨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보기엔 남자의 적의가 걸렸다.
‘······눈에 띄지 말라고 악 쓰는 거 같아서 재밌네.’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안타깝게도 창식의 의도는 실패할 것이다.
색안경을 낀 채 보는 이들은 언제나 있었고, 태화는 항상 그들의 시선을 강제로 잡아 왔으니까.
***
‘잘한다······.’
구경하던 유라는 태화의 연기를 보고 넋을 잃었다.
귀에 쏙쏙 박히는 걱정 섞인 질책과 가만히 서 있는데도 화났다는 게 여실히 느껴지는 태도가 마냥 자연스러웠다.
‘저런 사람을 그대로 넘기고 지나가다니 바다도 참 대단하네.’
자신이 연기해야 하는 역할이면서 유라는 딴 사람 말하듯 태연히 그런 생각을 했다.
옆에 앉아 있던 나영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나름 마음에 드는 참가자니 1-5도 시켜 봐야겠다며 별렀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미 그는 자신의 연기력을 충분히 보여 주고 있었으니까.
‘이 정도 실력이 알려지기는커녕 아직 소속사도 없다고?’
운이 없던 것인지 맡은 역할들 탓인지는 모른다.
중요한 건 그녀가 반쯤 포기하고 있었던 ‘박가람’이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재 왜 저래?”
마지막 표정 연기까지 확인한 그녀는 마음을 굳히고 유라에게 눈길을 줬다.
과연 유라가 저 연기에 잡아먹히지 않은 채 바다가 될 수 있을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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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흥연기
연기를 마친 태화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세 사람을 바라봤다.
PD의 ‘이게 아닌데’란 얼굴이 조금은 고소했다.
“정말 잘하네요. 대사가 독백 수준이라 수정해야 할지 고민했는데 그럴 필요 없겠어.”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유라 씨와 합을 맞춰 봐야죠.”
간신히 표정을 정리한 창식이 입을 열자 옆에서 대기 중이던 이가 태화에게 종이를 몇 장 건넸다.
심사석을 보던 태화는 시선을 돌려 대본을 응시했다.
순간적으로 굳었던 작가의 얼굴이 마음에 걸렸다.
‘본인이 쓴 글이 아닌 건가?’
그는 잠시 떠오른 생각을 부정했다. 자존심 강한 여자니 눈앞에서 그런 모습을 지켜만 보진 않으리라.
의문을 가진 채 3장짜리 대본을 훑었다.
그리고 그녀가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깨달았다.
완성도가 고작 2밖에 되지 않는 글.
4화까지의 인물 설정을 무색하게 만드는 내용이 전개되고 있었다.
“10화 예정 대본입니다. 외우는 데 10분 드리죠. 힘들면 보고 해도 괜찮습니다.”
관대한 척 말하는 창식을 보며 나영은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을 참았다.
이미 가람 역으로 결정했다고는 하나 형평성을 생각하면 똑같이 진행하는 것이 맞다.
그녀가 화나는 부분은 진행이 아닌 대본 그 자체였다.
‘저런 쓰다 만 글을······.’
오디션이 있기 바로 전날, 피디는 나영에게 10화쯤에 들어갈 내용을 미리 써 달라고 요구했다.
가람이 갈등하는 바다에게 조언하며 등 떠미는 장면이었다.
그는 이왕 공개 오디션까지 보게 되었는데 가람의 주요 장면도 함께 확인하는 것이 맞다 주장했다.
캐스팅 과정부터 여러 번 고집 부렸으면서 이 정도도 못 해주냐는 눈빛과 함께 말이다.
-최 작가님이라면 그 정도는 금세 쓰지 않으십니까?
평소라면 신인 PD가 아닌 잘 아는 PD가 부탁해도 단칼에 거절했으리라.
그러나 오디션 전부터 까다롭게 이것저것 요구한 것을 본인이 아는 지라, 나영은 가벼운 도발을 넘기지 못한 채 호기롭게 ‘당연하지’를 외쳤다.
물론 몇 시간 만에 괜찮은 대본이 나올 리 없었으며 결국 쪽대본 같은 글을 피디와 오늘 연기할 유라에게 보냈다. 전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한번 쓰고 버리는 거라 생각하며 수정은 고려하지도 않았다.
‘그 연기를 내가 계속 봐야 하는 걸 떠올렸다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앞서 다섯 명의 후보자가 대본을 보거나 외워 유라와 합을 맞출 때마다 저것은 자신의 가람과 바다가 아니라 생각됐다.
이미 가람으로 점찍은 배우가 이런 엉망인 대본대로 연기할 거라 생각하자 새삼 자신을 부추긴 창식이 원망스러웠다.
한 명의 심사 위원이 다른 심사 위원을 욕하고 있을 때, 축복을 이용해 연습을 마친 태화가 말없이 대본의 앞 장을 응시했다.
‘못 해 먹겠네라니······.’
보통 난이도로 시뮬레이션을 돌리던 그는 호기심에 어려움 난이도에 진입했다. 그리고 대사를 들은 바다가 갑자기 일어나 나가 버리는 황당한 경험을 하게 됐다.
어려움 난이도가 막혔다는 알림은 덤이었다.
‘이대론 안 돼.’
극본 속 인물까지 거부하는 것을 보고 태화는 확신을 가졌다.
이 대본으로는 가람의 복잡한 마음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게다가 여주인공인 바다도 우유부단한 모습으로 그려질 것이 뻔했다.
그는 심사석을 바라봤다.
도박을, 해야 했다.
“······혹시 애드리브로 진행해도 괜찮겠습니까?”
오디션 내내 못마땅해하는 PD와 자신의 작품에 자부심이 강한 작가 그리고 함께 연기를 해야 할 배우 앞에 태화는 주사위를 던졌다.
불쾌감을 표할 거라 생각했던 창식이 묘한 웃음을 한 채 태화를 응시했다.
지금까지의 아니꼬움이 거짓말이었다는 듯 그의 눈빛엔 즐거움이 섞여 있었다.
“애드리브라, 재밌겠군요. 뭐, 뛰어난 연기력을 가진 유라 씨라면 기꺼이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아······. 네. 전 괜찮아요.”
유라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간신히 웃고 있을 때 표정을 굳힌 나영이 태화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건 내 대본이 별로라는 의미? 좀, 건방지다고 생각 안 해요?”
나영도 이 대본은 아니라 생각했지만 그것을 직접적으로 지적당하자 자존심이 상했다.
고작 연기력 좀 있다고 작가의 영역에 침범하려 하는 게 건방졌다.
“전 작가님이 만드신 인물과 세계가 좋습니다.”
그런 그녀를 보며 태화는 먼저 작품을 칭찬했다.
적개심을 가질 것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기에 막힘없는 말들이 이어졌다.
‘과민하게 나오는 건 스스로도 이 대본의 부족함을 느껴서겠지.’
자신 있었다면 오히려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식으로 나왔으리라.
미래의 한 프로에서 그녀는 ‘대본에 즉흥 연기를 해 보겠다며 도전한 배우들은 많았지만 결국 원래 대사로 돌아오는 그들을 보며 즐거웠다’라고 고백했으니까.
“······그렇기에 조금 바꿔 보고자 생각했습니다. 지금 보니 가람에 대한 제 애정이 과했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태화는 미래에서 들었던 내용들을 떠올리며 작품에 대해 말하고 마지막으로 사과를 건넸다.
잠시 펜을 까닥이던 작가가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곤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많이 연구한 티가 나네요. ······좋아요.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당신이 만들어 온 ‘가람’을 확인해 드리죠.”
어느새 화를 푼 나영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태화를 응시했다.
그녀의 작품관을 무섭도록 닮은 배우.
이 사람이면 누구보다 완벽하게 가람을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연기가 아니라 그 사람 자체가 될 거 같은······. 이런 기분은 또 처음이네.’
태화가 미래에서 그녀의 인터뷰를 봤다 생각하지 못한 채 나영은 자신과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그를 호감 어린 눈으로 살폈다.
“장면은 ‘태양 때문에 슬퍼하는 바다를 위로하고 기운을 차린 바다가 마음을 다지며 태양을 만나러 사라진다’까지.”
“네.”
“유라 씨.”
“······잘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나온 유라의 얼굴엔 처음 그를 보았을 때 보였던 놀람과 반가움 대신 떨떠름함과 긴장이 드러나 있었다.
미리 예고하고 진행하는 애드리브.
그것은 상대 배우를 자신이 이끌고 갈 수 있단 자신감이 없으면 함부로 뱉기 힘든 말이었으니까.
‘아냐. 좋게 생각하자.’
물론 정반대로 그녀가 어떤 대사를 쳐도 잘 받아 줄 거란 믿음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위하면서도 유라는 가라앉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인기에 편승해서 주역을 따내는 아이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