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77
밑작업만 끝나면 현지 촬영보다 싸게 먹히고 날씨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더라도, 그 밑작업이라는 것이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니기에 그렇게까지 하는 감독은 적었다.
이미 그런 작업을 마친 스튜디오가 버젓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저희 스튜디오는 구축해 둔 기본 이미지가 많아요. 기술자도 많아서 다양한 연출도 가능하고. 혹시나 CG 때문에 고민하는 감독님 보면 저희 쪽으로 오시라 말 좀 해주세요. 배우님들 말은 들어도 관계자 말은 광고라 생각하고 안 믿으시더라고요.”
이런 식으로 한번 모아진 자료는 약간의 수정을 거쳐 다양한 분위기와 장소를 연출할 수 있다.
태화는 처음 접하는 방식에 흥미를 드러내며 스튜디오 직원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이배우, 촬영 전에 테스트 좀 하려 하는데 어울려 주겠어요?”
“물론이죠.”
처음 듣는 지식에 집중하는 사이, 어느새 다가온 감독이 그를 불렀다.
감독의 요청에 태화는 카메라 앞에 섰다.
주변이 온통 녹색이라 그런지 검은 촬영 장치들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눈이 흩날린다 생각하고 조금만 걸어주세요. 진호야! 거기 팬 좀 틀어 봐! 미풍으로!”
정면에서 돌아가는 거대한 선풍기를 무시한 채 태화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손바닥으로 느끼는 시늉을 보이기도 하고 머리 위에 있을 눈을 털기도 하며.
“흠. 눈발은 이쪽이 더 어울리는 거 같고, 눈의 높이는 이쯤으로 조정해 주세요. 네, 훨씬 좋네요.”
태우는 처리가 되지 않은 녹색 화면과 CG가 입혀진 화면을 번갈아 확인하고 일부 그래픽 수정을 요구했다.
“효신씨! 촬영 시작합니다!”
그렇게 배우의 키와 작중 분위기에 맞춰 조정이 끝나자 감독은 수고했다는 말을 남기고 효신을 불렀다.
구석에서 곤약 젤리 두 팩 째에 도전하던 그녀는 감독의 부름을 듣고 스크린 앞에 섰다.
곧이어 여러 각도의 카메라들이 둘을 에워쌌다.
“오십육에 하나에 하나!”
딱, 소리와 함께 촬영이 시작됐다.
* * *
“이렇게 새하얀 세상이 있을 줄은 몰랐어.”
혜련은 신기하다는 눈으로 사방을 둘러봤다.
봄이라면 꽃이 피었을 넓은 들판은 온통 눈으로 뒤덮여있었다. 나무들조차 멀찍이 떨어져 있는 장소에서 발자국을 남기는 이는 현수뿐이었다.
“오빠 먼저 걸어가 봐. 난 오빠 발자국을 밟을게.”
그녀는 자신은 자취를 남길 수 없으니 그가 남긴 자국 위에 서서 분위기라도 내보겠다고 말했다.
현수는 별 걸 다 한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얌전히 그녀의 말을 따랐다.
“영화에서 보니까 눈 위에 나비도 그리던데.”
“전부터 내가 바닥에 눕기를 바라는데······. 너 나비 자국에 낭만이라도 있어?”
“어, 있어. 엄청 있어.”
그러니 그려줘―. 라는 뒷 말은 눈빛으로 이어졌다.
그는 별 수 없다는 얼굴로 바닥에 누워 팔다리를 바동거렸다. 누가 봐도 떪은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이렇게 귀여운 연인이 부탁하는데 얼굴이 별로다.”
“그 귀여운 연인이 양복 입은 사람을 눈 위에 굴리고 있으니 그렇지.”
“흐음~? 그러세요?”
못된 생각을 하듯 눈을 가늘게 뜬 혜련은 곧 몸을 낮춰 현수에게 다가갔다.
상체를 올린 채 눈 위에 앉아있던 그는 다가오는 연인의 모습에 긴장한 얼굴로 몸을 뒤로 눕혔다.
닿을 듯 닿지 않을 듯한 거리를 유지하던 현수는 도망갈 길 없는 눈 바닥에 뒤통수를 댄 후에야 움직임을 멈췄다.
“······뭐야?”
유령이니 몸 위에 있더라도 무게감은 없다. 그녀가 쓰다듬는 손길도 사실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는 긴장한 눈으로 반쯤 숨을 멈춘 채 혜련을 응시했다.
“오빠 얼굴 보는 중.”
그녀는 혹여 손가락이 통과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겉 표면을 쓸었다.
“유령한테 닿으면 한기가 느껴진다던데.”
혜련의 손가락이 천천히 그의 입가를 맴돈다.
손 끝의 감촉을 음미하듯.
장소를 지정하듯 말이다.
그리고 손가락 한 개가 간신히 통과할 정도의 공간을 두고, 그녀는 속삭이듯 물었다.
“추워?”
그 말에, 현수는 남겨뒀던 반쪽 숨까지 멈췄다.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살짝 입을 열어 말라 버린 입술을 혀로 적셨다.
숨결이 닿을 정도 였던 거리가 종이 한 장 차이로 좁혀졌을 때.
현수는 목울대를 울렸다.
“······응, 등이 추워.”
“·········뭐야! 내가 이렇게 분위기 내는데!”
분위기 깨는 말에 화가 난 그녀는 벌떡 일어나 현수를 노려봤지만 곧 입술을 삐죽이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무의식중에 혜련이 내민 손을 잡으려던 그는 허공을 휘젓는 손에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현수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잡아서 눈 바닥에 꽂으려 했는데 깜빡했네.”
“······진짜 못 됐어!”
같이 굳었던 그녀는 끝까지 농담을 잊지 않는 그를 보며 성 내듯 웃었다.
혜련의 눈시울은 조금 붉어져 있었다.
“컷! 일단 이배우는 그 자리에서 대기해 주세요! 효신씨는 이쪽으로 나오고요!”
컷과 함께 긴장을 푼 태화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듯 얌전히 기다렸다.
손을 스치거나 몸이 통과하는 장면은 효신이나 태화가 상대방 없이 혼자 찍은 장면을 섞어 완성한다.
에어친구마냥 없는 대상을 있다고 가정하고 촬영해야하는 장면이지만 둘 다 그런 부분에 대해선 프로였다.
“선배님 아까 명치 찍으셨어요······.”
머리카락에 붙은 가짜 눈을 털어낸 뒤 화면 밖으로 나가려던 효신이 그의 말에 동그랗게 눈을 떴다.
“어머, 미안. 내색을 안 해서 몰랐어. 괜찮아?”
“네. 그리고 무게가 좀······.”
“호호호호······. 이게.”
“아, 아.”
그녀는 과한 웃음소리를 내며 태화의 목 가운데 움푹 들어간 부분을 손가락 관절로 꾹꾹 눌렀다.
계속 촬영해야 하는 배우의 화장이나 머리를 망가트릴 수 없으니 보이지 않은 곳을 공격한 것이다.
“효신씨! 이쪽으로 나오세요!”
둘이 다정다감하고 시답지 않은 장난을 치는 사이 감독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현장을 울렸다.
끝
ⓒ 마늘소금
“효신 누님······.”
태화는 지친 얼굴로 소파에 걸터 누워 효신을 불렀다.
가 촬영을 시작한 지 벌써 3주 째.
어느 새 친해진 두 주연은 꽤 스스럼없는 누나 동생 사이가 됐다.
스케줄이 없는 날에 배우 몇몇과 함께 모여 가볍게 한 잔 걸칠 정도로 말이다.
“왜.”
“저 녹색 좀 그만 보고 싶어요······.”
반대편 소파에 누워있던 효신이 퉁명한 목소리로 답하자 그는 앓는 소리를 냈다.
후배의 징징거림에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녹색이 눈에 얼마나 좋은데, 눈의 피로에 아주······지만 나도 그래.”
잠시 설교하듯 말을 늘어놓던 효신이 프로틴 셰이크를 입에 문 채 힘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도 저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은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감독이 그린 스크린에 반했다.
감독인 태우의 입장에서야 배우들이 ‘보이지 않는 배경’에 의한 연기력 저하를 호소하지만 않는다면 그래픽만한 환경이 없었다.
제작비 부족으로 인해 넣을 수 없던 장면들도 추가할 수 있는데다 쉽게 가기 힘든 장소, 시간을 마음껏 배경으로 사용할 수 있으니까.
게다가 과학 기술을 이용하면 변덕스러운 날씨 문제나 안전 문제도 쉽게 해결 가능했다.
예를 들어 오리 보트를 타며 출렁거릴 수 있는 내부 장면도, CG 스튜디오에서 촬영하면 흔들림 없이 찍을 수 있었다. 배경은 흘러가도 실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니 당연했다.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필요한 롱샷 또한 보트 아래 레일이나 에어펌프를 까는 것으로 완벽하게 재현됐다.
단순히 장소를 바꾸는 것만으로 카메라가 물에 빠질 위험, 보트 전복과 같은 안전사고, 배우가 움직이는 것에 신경 쓴 나머지 집중력이 분산되는 문제 등, 현지 촬영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간섭이 대폭 줄어든다.
감독으로선 매력적이다 못해 빠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그렇다보니 죽어나는 건 배우들이었다.
“······영국의 모 배우가 촬영 도중 운 이유를 알 거 같아요.”
‘이건 내가 배우가 되려 했던 이유가 아니야(This is not why I became an actor)’
CG촬영 도중 눈물을 흘린 한 영국 배우가 남긴 말이다.
설정 상 종족의 신장 문제로 인해, 그는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홀로 연기를 펼쳐야 했다.
그는 바로 옆의 공간에서 떠들고 있는 다른 배우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녹색의 공간에서 서서 보이지 않는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대화하는 장면을 촬영했다.
영화 촬영 내내 그런 환경을 유지하던 그는 결국 가벼운 우울증 증상을 겪었고 눈물과 함께 CG로 인한 고독을 토로했다.
“······그래도 우린 사이즈가 같아서 같이 찍잖아. 녹색 쫄쫄이를 뒤집어쓰지 않아도 되고 종족이 괴상해서 얼굴에 수면 검사선 같은 걸 덕지덕지 붙이지 않아도 되고. 호사네 호사야.”
효신은 그를 달래 듯 무슨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목소리엔 영혼이 빠져있었다.
그녀 또한 이번 촬영 환경이 상당히 혹독한 편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우리나라 감독들이 CG의 힘을 외면해서 다행이야······.’
조금만 힘들면 바로 그래픽을 붙이는 미국과 달리 한국의 영화계와 드라마 시장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착시나 분장, 소품 등을 이용해 장면을 꾸몄다.
가끔 해외에서 그러한 한국발 영화를 보고 ‘한국 좀비 분장에 감탄했다’, ‘영상이 화려하다’ 등의 말을 남기는데, 그 말의 실제 의미는 ‘90년대 후반이나 하던 분장을 지금까지 쓰는데 그 고전미에 감탄했다’, ‘작은 스케일을 크게 보이려고 참 수고했다’였다.
감독들은 인정하지 않고 표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불편한 진실.
물론 그런 촬영 업계의 사정 따위 배우인 효신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러 장소를 탐방하듯 돌아다니고 바쁜 생활 속에서 계절감을 느낄 수 있도록 현지 음식을 사먹는 행위가 상당히 만족스러웠으니까.
오히려 서울은커녕 스튜디오도 벗어나지 못하는 이런 환경이 너무 끔찍했다.
“태화야 내가 좋은 소식 하나 알려 줄까?”
시체처럼 늘어져있던 그녀는 갑자기 킬킬거리며 태화에게 말을 걸었다.
좀 미친 사람 같다 생각하면서도 그는 온 몸으로 ‘이유를 물어봐!’라 외치는 효신을 외면하지 않았다.
“······뭔데요?”
“나 모레부터 일주일간 화보 촬영하러 몰디브 간다.”
“······부럽네요. 잘 놀다 오세요.”
‘탈출한다는 자랑이었네.’
태화는 늘어져 있는 팔을 힘겹게 들어 휘적거렸다.
풍선 인형처럼 성의 없이 흔들리는 팔을 보고 그녀는 못마땅하단 눈빛을 보냈다.
“멍청아, 나 몰디브 간다고.”
“네, 네. 다녀오세요. 그런데 후배한테 멍청이는 너무 심한 거 같네요.”
“멍청하게 구니까 그렇지. 녹색만 봐서 머릿속에 익은 시금치가 가득 찬 거 같은데, 난 주연이고 네 상대역이야. 나 없으면 촬영도 없어.”
“······어?”
그제야 뜻을 이해한 태화가 소파에 눕고 처음으로 생기 어린 눈을 한 채 그녀를 바라봤다.
마치 찬양이라도 하라는 것처럼, 그녀는 씩 웃으며 턱을 치켜 올렸다.
“너도 일주일간 휴가라고.”
“오오······!”
“고맙지? 고맙지? 나도 어제 안 거 알아? 이건 뭐 이동으로 인한 로스는 줄어들었는데 더 바빠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