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98
“오, 초밥이다.”
아영은 고급자기 그릇에 담긴 색색의 초밥을 보며 감탄했다.
붉은 색 하얀 색 초밥들이, 일개 직장인인 그녀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고급스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먹고 싶어 하는 것 같기에 사왔어.”
즐거워하는 그녀를 보며 해조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우이긴 해도 구미호가 되기 위해 도만 닦던 그는 부패하기 쉬운 고기들을 거의 먹어보지 못했고 아영의 전생인 혜령과 있을 때도 그녀의 신분 때문에 육식을 지양했다.
따라서 봉인당하기 전 해조가 가장 맛있게 먹었던 식사는 벼락을 맞아 타 죽은 짐승의 시체였다.
그런 그였기에 날 생선을 좋아하는 현대인들을 이해하진 못했으나 가끔 초밥 같은 게 먹고 싶다 징징 거리는 그녀를 보고 해조는 인터넷으로 가장 유명한 집을 찾아 초밥을 ‘가져왔다.’
“네가 돈이 어디 있어서?”
“음, 그게 중요해? ······내 얼굴보다?”
“네 얼굴엔 이제 적응했거든?”
의심스럽다는 아영의 시선에 웃음으로 넘어가보려 했던 그는 생각보다 단단한 가드를 보고 방향을 틀었다.
시선을 내린 해조는 파르르 눈꺼풀을 떨며 물기 어린 눈을 잠시 유지한 뒤 애처로운 표정을 한 채 그녀를 바라봤다.
“요새 너무 차가워. 난 조금 더 친해지고 싶다는 의미일 뿐인데.”
속셈 따윈 하나 없었는데 의심부터 한다는 듯, 그는 상처 받은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아영은 ‘어떻게 사온 거냐’ 물은 건데 그는 ‘왜 사온 거냐’라는 말에 답한다.
처음부터 논지를 흐리기는 대답이었는데도 해조는 참 당당했다.
색기란 것은 예로부터 그런 이성적인 사고를 엉망으로 만들기에 참 좋은 수단이었으니까.
“······그냥 기뻐해주면 안 돼?”
해조는 가볍게 그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 온기를 나눴다.
“······어.”
“컷! 자, 다시 갑니다.”
원래라면 한숨을 쉬며 ‘그래, 초밥이 무슨 죄가 있겠어. 먹자 먹어’라 말해야할 상아는 그대로 잘 익은 토마토가 됐다.
움직임을 잊었다는 의미다.
이젠 익숙한 일인지라 제작진은 그러려니 하며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갔다.
‘이만하면 오래 버텼지······.’
그들도 촬영이 중반을 넘어선 태화의 연기에 대해 잘 알게 됐다. 몇몇은 목소리만으로 사람을 흐물흐물 녹게 만드는 인물 앞에서 저 정도로 버티는 신상아를 다시 보기까지 했다.
소란스러워진 세트장과 유리된 채 상아는 그대로 주저앉아 무릎에 머리를 파묻었다.
“내 연기는 쓰레기야······.”
항상 자신감 넘쳤던 상아였으나 계속 NG를 만들어내는 본인을 보며 의기소침하게 되는 건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엔 특전 영상으로 NG모음도 낼 거라던데 그렇게 되면 만인이 이런 흑역사를 알게 되리라.
거기까지 생각하자 그녀는 자신의 연기력이 더더욱 슬퍼졌다.
“상아씨.”
“뭐예요?”
쪼그려 앉아있던 상아는 슬쩍 눈을 치켜 쓰며 태화를 바라봤다.
카메라만 꺼지면 순진한 얼굴로 돌아가는 태화가 좀 짜증났다.
“부끄러움은 자신의 몫이래요, 힘내요.”
“지금 나 놀려요!?”
태화는 단지 자신도 그런 일이 생겼으니 위로 차원해서 한 말이었지만 상아에겐 놀리는 것으로 밖엔 들리지 않았다.
그는 의외로, 안 친한 이에게 건네는 위로가 서툴렀다.
끝
ⓒ 마늘소금
-안녕하세요! FM 93.5 MHz. 점심과 함께 즐기는 라디오, 박영희와 만나는 시간의 박영희입니다! 오늘도 어마어마한 게스트들이 오셨는데요······.
오늘을 위해 스마트폰에 쓸데없는 라디오 앱까지 깔은 김예림은 두근거리는 표정으로 발랄한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라디오와 같은 구식 미디어는 대중에게 외면 받은 지 오래다.
차에서조차 DMB가 나오고 전국 어디서나 데이터를 쓸 수 있게 된 21세기에, 할 일이 없다하여 라디오를 듣는 이들은 거의 없으니까.
그 시간에 인터넷을 하고 소셜 미디어에 사진을 올리는 걸 더 생산적이라 생각하는 게 요즘 아이들이었다.
그런 요즘 아이 중 하나인 예림이 답답하고 밋밋한 라디오를 듣기 위해 무려 앱까지 깔게 된 건 정말 기다리던 사람이 이 코너에 나오기 때문이었다.
배우 이태화.
작년 봄 혜성처럼 나타나 의 조연으로 이름을 알리고 로 로맨스의 참맛을 일깨웠으며 현재 를 촬영함으로써 기대치를 높이고 있는 인물.
이 남자의 활약은 단순히 ‘연기 좀 하는구나’로 넘기기엔 너무나 아쉬웠다.
각각의 배역마다 그 특색을 지키며 배우 본인이 생각나지 않도록 만드는 연기력, 역할에 따라 다양하게 변하는 외모와 분위기, 거기에 일상에서 발견되지 않는 신비로움까지.
이렇게 완벽한 배우는 과거에도 앞으로도 없을 거니까!
······라고 예림은 굳게 믿었다.
‘금사빠에 사랑의 유통기간도 짧은 내가 무려 6개월 넘게 팬질하고 있는데 당연하지!’
물론 그 사이에 공백이 상당히 길었지만 처음 그의 팬이 되기를 결심한 게 6, 7월의 어느 날이었으니 본인은 진성 코어팬이 맞다고, 그녀는 스스로를 세뇌했다.
사실, 예림이 그를 다시 떠올리고 팬질에 열을 올리게 된 건 어느 날 인터넷에서 다운로드 받은 다용도 음성 앱이 원인이었다.
마레드라는 이태화의 팬카페에서 나온 ‘어느 음성’을 한 아마추어 앱 제작자가 한데 모아 폰의 다른 기능들과 호환이 될 수 있게 만들어 배포했다.
모닝콜을 찾고 있던 예림은 평이 너무 좋은 그 앱을 다운 받아 설치했고, 리뷰에서 말하고 있는 ‘야한 목소리’에 귀를 노출시켰다.
그리고 그날 밤. 그녀는 누구에게 말 못할 괴로움으로 침대 위를 뒹굴 거리다 다시 한번 그 남자의 팬이 돼버렸다.
‘진짜 오토메 메신저 작업 한 번 해주면 대박일 텐데.’
요즘 여성향으로 나오는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앱은 실시간 채팅, 전화, 문자 지원을 기본으로 깔고 들어갔다.
이태화가 성우로 참여한다면 예림은 알바를 뛰어서라도 현질할 용의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태화입니다.
-신상아예요.
-와, 역시 배우분들은 포스가 남다르시네요!
영희의 감탄을 들으며 예림은 흐뭇해했다.
입에 발린 말이라는 걸 알아도 자신의 배우를 칭찬하는 것을 들으면 즐거워지는 건 팬의 서글픈 본능이었다.
“너 점심 후딱 먹더니 뭐해?”
한창 라디오 속 잔잔하고 듣기 좋은 미성에 귀를 기울이던 예림은 친구가 왔음에도 손을 한번 휘휘 젓는 것으로 성의 없이 인사를 마무리했다.
“아, 영희 라디오 듣는 구나? 흠······. 오늘 게스트가 온 걸 보니 홍보가 필요한 누군가일 것이고, 네가 요새 빠져있는 인물 중 새로운 무언가를 발표할 이는 하나밖에 없고 그렇다면 저 목소리의 주인공은 곧 방영할 의 이태화렸다?”
“미친.”
한창 명탐정 홈스에 빠져 탐정 흉내를 내고 있는 부끄러운 친구에게 그녀는 온건한 반응을 보였다.
외면하지 않은 것만으로 예림은 친구의 도리를 다했다.
“미친이라니 저거 이태화 아니야?”
“맞아.”
“역시 난 천재였어!”
“······.”
시끄러운 친구를 향해 그녀는 애잔한 시선을 보냈다.
친구 이수연은 무사히 중학생을 걸쳐 고등학생이 되었으나 안타까운 병에 걸렸다.
그것도 시간밖에 치료약이 없다는 병에.
예림이 미친 것은 옮는 법이니 되도록 무시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며 라디오에 집중하자, 수연은 머쓱한 얼굴로 다가와 맞은편 나무 의자에 앉았다.
그러한 과장된 행동은 호응이 없으면 더더욱 부끄러운 법이었으니까.
“근데 영희 라디오라니, 확실히 이태화가 뜨긴 떴네.”
“고작 라디오가지고 무슨.”
“여기 나오고 싶어도 못 나오는 애들 많아. 이름도 웃긴데 입담도 상당하다보니 의외로 팬이 많거든. 그래서인지 경쟁도 치열해서 여기 나와 홍보하려면 엔간한 인기로는 턱도 없어.”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수연을 바라봤다.
라디오에 하나도 관심 없는 주제에 한껏 띄우는 모습이 수상했다.
“여기 엑스타라도 나왔었어?”
“어? 어떻게 알았어?”
‘네가 그러면 그렇지.’
역시 진성 빠순이인 친구가 괜히 라디오를 들었을 리 없었다.
생각난 김에 오빠들 노래나 더 들어야겠다며 스마트폰을 올리는 친구를 보고 예림은 눈을 반짝인 뒤 재빨리 그녀의 폰을 낚아 채 손가락을 놀렸다.
“야! 뭐하는 짓이야!”
“그냥 문자하나 날린 것뿐이야. 내 폰은 한창 열일중이라 못 건드리잖아.”
실수로라도 녹음 중에 이상한 소리가 섞이면 안 되니 당연한 선택이었다며 예림은 뻔뻔하게 굴었다.
그런 태도에 수연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아, 그거 돈 따로 나간단 말이야!”
“그깟 백원 주면 되잖아!”
“요새 300원으로 늘었거든!”
투닥거리는 그녀들 사이를 밝은 목소리가 제지했다.
-그럼 온 문자를 한번 읽어볼까요? 아하하, 4829님이 ‘방학인데 학교 나와서 완전 힘들어요. 태화 오빠가 해조 톤으로 ‘공부 열심히 해’라고 말해주면 좋겠어요’라 보내주셨네요. 어머, 요즘엔 방학이 방학답지 않다고 하더니 정말 방학에도 열심히네요. 이태화씨 어떠세요?
-저희 때도 방학 중 수업이 있었는데 자율을 빙자한 타율이였죠. 그런 4829님을 위해······. 흠흠.
익숙한 번호가 호명되자 드잡이 질을 하고 있던 친구 수연이 눈을 깜빡이며 예림의 폰을 응시했다.
처음엔 친구의 전화번호 뒷자리라는 걸 일지 하지 못했던 예림도 익숙한 문장이 들려오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의 폰을 바라봤다.
잠시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들리고, 곧 고요했던 휴대전화에서 맑으면서도 묘하게 쌉쌀하고 달콤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부 열심히 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니 조금 안타깝네.
목소리라는 건 태어나면서 가지게 된 성대의 모양이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만 호흡법, 긴장한 정도, 구강의 형태 등에 의해서도 변화한다.
태화는 그러한 발성을 상당히 자유롭게 조절하는 배우였고 목소리에 감정을 실을 줄 아는 배우였다.
“······헐?”
불시에 귀를 폭행당한 수연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눈으로 예림의 폰을 응시했다. 지금 분명 말도 안 되는 무언가를 들은 것 같았는데, 단순히 환청을 들은 것 같기도 한 기묘한 기분이었다.
“너 이것도 들어봐.”
영업의 기회가 찾아오자 예림은 틈을 놓치지 않고 수연의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자고로 팬이라면 영업 떡밥을 하나는 스마트폰에 다른 하나는 mp3에 담고 다니며 멀티 포교를 할 줄 알아야 했다.
얼떨결에 음성파일을 듣게 된 수연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연애도 하고 키스도 해본 그녀지만 그렇다고 어른들 사이에나 있을 농밀한 열애를 겪어본 건 아니었다.
그런데 같은 줄만 알았던 친구가, 먼저 그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너! 너! 신성한 학교에서 뭘 듣고 다니는 거야!!”
“뭐가? 내용 엄청 평범해. ‘잘 잤니?’, ‘오늘 하루도 힘내’, ‘수고했어’ 이런 게 다잖아.”
“······진짜네?”
다시 한번, 이번엔 문자에만 애써 집중하며 들은 수연은 예상 밖의 내용에 눈을 깜빡거렸다.
정말 일상적으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들. 그런데 말하는 인물이 달라지자 상당히 야하게 들렸다.
목소리와 내용의 괴리에 혼란스러워하는 친구에게 다정히 어깨를 두르며 예림은 그녀의 폰을 조작해 UTV를 켰다.
바야흐로 포교의 시간이었다.
* * *
1092: 사고 날 뻔 했잖아요.
4927: 이런 거 할 땐 미리 경고 좀 하자.
1241: 목소리가 제 정신 아니네.
5248: 와 오빠! 제 이름은 소윤이에요! 좀 불러주세요! ㅠㅠㅠㅠ!
“하하하······. 정말 미안해요, 여러분. 저도 지금 상당히 후회하고 있어요.”
한 쪽 귀를 부여잡은 영희는 순식간에 갱신되는 채팅창을 확인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신상아가 기겁하며 손가락으로 엑스를 그릴 때는 ‘코피 흘렸다는 소문처럼 참 기가 약한가보네’하고 속으로 실소했지만 실제는 반대였다.
태화의 목소리엔 묘한 힘이 있었다. 듣는 이들의 몸을 욱신거리게 만드는 힘 말이다.
‘이거 무시무시하네······.’
사람을 홀리는 목소리란 태화에게 어울리는 말이리라.
신화에 나오는 세이렌의 노래처럼 그의 목소리는 타인의 귀에 달짝하게 달라붙어 귀걸이마냥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 목소리 방송 불가 처분해야하는 거 아니냐고.’
의 제작진은 미친 게 분명했다. 이런 목소리는, 이리도 해로운 목소리로 절대 방송에 내보내면 안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