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ministrator Kang Jin Lee RAW novel - Chapter (13)
관존 이강진 (13)
“돈은 반드시 갚으마.”
무척 화가 난 듯 그동안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던 서문우람의 입이 결국 열렸다.
요 며칠 동안 은자 때문에 실랑이가 계속 벌어졌다. 학당에서 돈을 돌려주고, 강진은 서문우람네 집에 다시 돈을 던져 주는 일을 보름이나 했다.
“어제 어머니께서 갑자기 열이 나셔서 의원을 불러야 했는데…….”
서문우람이 뭐라고 더 말을 하려 했지만 강진이 그의 말을 잘랐다.
“더 이상 말 안 해도 돼. 그 돈은 네 거니까. 수업료라고 몇 번 말해야 알겠냐?”
“반드시 갚으마.”
“그래, 내가 졌다. 반드시 갚아라. 이자까지 두둑이 붙여서 갚으면 더 좋고.”
그제야 서문우람의 표정이 조금 풀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할 수 없는 놈.”
강진은 자신이 졌다는 생각에 한마디 했지만 서문우람은 어느새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네가 저번에 미아에게 선물했던 노리개, 고맙다. 미아가 요새 하루 종일 그것만 붙잡고 살더라.”
“남은 천 조각으로 만들어서 돈 한 푼도 안 들었다고 한 후에야 받았던 그 인형? 쌀이랑 고기 좀 사 가지고 간 건 문전박대해 놓고서 그 인형은 고마워?”
“그거랑 이거는 다른 거지.”
“도대체 뭐가 다른 거냐? 선물은 다 똑같은 거지.”
“달라.”
“그러니까 뭐가 다른 거냐고.”
“인형은 호의지만 쌀이랑 고기는 동정이지. 내 이기심이라고 해도 좋다. 동정은 싫다.”
“그래, 너 잘나셨다.”
강진은 한마디 쏘아 주고는 잠시 후 다시 서문우람에게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어머님은 괜찮으신 거냐?”
“의원 말로는 기력이 쇠한 게 원인이라고 하더라. 네가 준 돈 덕분에 이번에 좋은 약재도 썼으니까 금방 일어나실 거다.”
“집에 고려 인삼이라는 게 있는데 한 뿌리 가져다줄 테니 어머님께 드려라. 그게 기력 회복에는 좋다더라.”
서문우람이 뭐라고 말을 하려 할 때 강진이 다시 말을 이었다.
“친구 어머님이 아프셔서 몸을 보하시라고 드리는 거다. 동정이 아니라.”
“…….”
“우리 친구 맞는 거지?”
“그래. 부잣집 아들내미 강진이 내 친구가 맞다.”
“그 부잣집 아들내미는 빼 주지. 여하간 친구 하나 사귀는 게 이렇게 힘들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알은체도 하지 않는 건데 말이야.”
서문우람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진정한 친구는 하나도 많다는 이야기가 있는 거야.”
“친구면 친구지, 진정한 친구는 또 뭐냐? 하여간 말들을 어렵게도 해.”
“그만큼 사람 사귐이 쉬운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나저나 요새 눈은 왜 그리 휑한 거냐?”
강진은 자신의 눈을 만져 보며 물었다.
“내 눈이 어때서?”
“쏙 들어갔잖아. 멍도 좀 있는 것 같고. 네가 어디서 맞고 다닐 일은 없을 텐데 말이야.”
“아! 요새 좀 하고 있는 게 있어서 말이지.”
그렇지 않아도 요새 들어 눈이 뻑뻑한 걸 자신도 느끼고 있었다.
안력을 단련시킨다는 이유로 별의별 걸 다 하고 있는 중이니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옥수수 알을 뿌려서 몇 알인지 알아맞히는 놀이는 눈의 피로를 불러왔고, 날아오는 감자에 쓰여 있는 숫자 맞히기는 눈에 멍이 들게도 만들었다.
거기에 날아다니는 날벌레 잡기는 아예 죽을 지경이었다. 눈 한번 깜박이면 금세 사라지고, 한참을 집중해야 다시 보였기 때문에 눈의 피로가 심했다.
“아, 너도 같이 할래? 다른 건 몰라도 체력 증진에 도움이 될 것들이 많은데.”
“나는 동생들을 돌봐야지.”
“아, 맞다! 애들 때문에 안 되지.”
자신도 애면서 애들 때문이라는 말에 서문우람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강진은 그의 동생 서문정화와 동갑이었다.
“우리 집에 자주 와서 그 수련이라는 거에 차질이 생기는 거 아니냐? 그래서 밤늦게까지 해서 눈이 그리된 거고.”
“그럴지도. 하지만 너를 사귀라고 한 것도 사부가 한 말이니까 괜찮아.”
“무술 사부도 있는 거야?”
“무술 사부는 아니고, 그냥 사부야.”
강진은 곽노를 간단하게 정의하고는 말했다.
“너도 책만 보지 말고 체력 단련을 좀 해. 공부도 체력이라고 했는데.”
“그래야지. 저기 스승님 오신다.”
전인문이 방 안으로 들어오자 서문우람은 강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스승과 책에만 집중했다.
‘재미없는데.’
강진은 꾸역꾸역 전인문의 말을 머릿속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루했던 수업이 끝나자 강진은 서문우람을 끌고 장거리로 나갔다.
“뭘 사려고?”
“닭 몇 마리 사 가자.”
“닭은 왜?”
“왜긴 왜야? 너네 집에서 먹으려고 그러지.”
“그러지 않아도 돼.”
강진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야. 나도 좀 살자. 저녁마다 감자로 끼니를 때우려니 수련 시간마다 배고파서 정신을 못 차리잖아. 거기다 너희 집 감자를 내가 계속 축내는데 가끔씩 이렇게 사기라도 해야 염치가 있는 거지.”
“안 굶어 죽는다.”
“아따, 내가 먹을 식량이니 넌 상관하지 마.”
“그래도…….”
“이 고집불통. 나를 위해서라니까.”
결국 서문우람이 고집을 꺾었다.
“그럼 오늘만이다. 그리고 미안하면 네가 먹을 감자는 직접 가져오든가.”
“그래그래.”
강진은 푸줏간에 들러 닭 두 마리와 돼지고기 몇 근을 샀다. 그것만 가지고 가자니 또 허전해서 서문우람의 잔소리를 무시하고 쌀도 몇 근 같이 샀다.
“잔소리는 그만. 나만 먹으면 되잖아, 나만.”
날 잡았다고 강진은 아예 애들 먹일 간식거리까지 사고는 콧노래를 불러 가며 서문우람의 집으로 향했다.
‘내가 왜 이리 기분이 좋은 거지?’
이깟 닭이나 쌀은 매일 먹는 거고 장거리에서 파는 싸구려 간식거리는 입에 잘 맞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기분이 무척 좋았다.
‘이게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인 건가? 그런데 무슨 이유 때문인 거지?’
강진은 그렇게 고민했지만 대답을 찾지 못했다.
‘에이, 기분 좋으면 좋은 거지. 뭘 이유를 찾아.’
심각히 고민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시장을 벗어나 산길에 접어들 때쯤이었다.
“어이, 도령.”
얼굴에 싸구려 보자기를 두른 사내 하나가 길을 막아섰다.
“누구십니까?”
서문우람의 물음에도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강진만 보며 말했다.
“도령이 꽤나 돈이 있는 것 같아서 그러는데, 이 아저씨에게 조금만 빌려 줄 수 있을까?”
“아저씨, 나 알아요?”
강진의 반문에 사내는 음흉한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모르지. 중요한 건 네가 돈이 있다는 걸 이 아저씨가 알고 있다는 거지.”
“아니죠. 중요한 건 내가 아저씨를 모르고, 모르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 주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다는 사실이죠.”
“이렇게 웃으며 말하니 도령이 이 아저씨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떳떳하지 못해 얼굴에 보자기나 두른 사람을 무서워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사내는 미간을 찡그리며 호통을 쳤다.
“이놈이! 좋은 말로 할 때 얼른 돈주머니를 내놓고 꺼져라. 그럼 다치지는 않을 테니까.”
강진은 씩 웃으며 옆구리에 찬 돈주머니를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직접 가져가 보시든가요.”
강진이 너무나 위풍당당하게 말하자 사내는 급히 주변을 살폈다. 부잣집 아들 같으니 혹시 호위 무사라도 옆에서 지키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하지만 주변에 자신과 두 아이들만 있는 걸 알자 이내 호통을 치며 성큼성큼 강진에게 다가왔다.
“이놈, 맞아 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강진은 잽싸게 뒤로 물러났다.
사내가 급히 쫓았지만 요리조리 잘도 피하면서 도대체 잡힐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차 잡히려는 듯한 순간에는 마치 다람쥐처럼 나무 위로 올라가기까지 했다.
이런 달리기라면 성인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강진이었다.
‘사부가 가르쳐 준 게 이럴 때도 쓸모가 있네.’
강진이 뿌듯해할 때, 사내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서문우람을 잡았다.
“당장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으면 이 녀석을 죽도록 패 주겠다.”
사내의 협박에도 강진은 내려오지 않았다.
인질을 잡았다고 돈주머니를 주면 자신이 지는 거였고, 지는 건 정말 싫었다.
빠악!
강진이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자 사내가 그 큰 주먹으로 서문우람의 안면을 갈겼다.
그 충격에 서문우람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듯이 쓰러지자, 사내는 다시 한 번 위협하는 표정을 지으며 강진에게 윽박질렀다.
“이래도 안 내려올 테냐?”
강진은 입에서 피를 흘리는 서문우람을 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내려가지는 않았다.
빠악! 빠악!
다시 한 번 사내의 주먹이 서문우람을 타격했고, 강진의 눈은 붉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그만!”
결국 강진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나무에 내려와서 돈주머니를 사내에게 던졌다.
“그거 가지고 꺼져.”
사내는 웃는 눈으로 주머니를 주워 허공에 던져 보이며 말했다.
“진작 그럴 것이지. 그러면 이놈이 이렇게 맞을 일은 없었을 거 아니냐.”
“…….”
강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사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사내는 온 목적을 이룬 데다 강진이 자신을 바라보는 표정이 찝찝해 곧바로 자리를 떴다.
“으…….”
강진은 바닥에 쓰러진 서문우람을 일으키며 물었다.
“괜찮아?”
“괜찮아.”
척 봐도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입에서 얼마나 피를 흘리는지, 바닥에 흘린 피에 이빨이 보이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돈은 어떡하냐? 얼마나 들어 있었어?”
“돈이 문제냐? 네가 맞고 내가 졌는데.”
서문우람은 뭐라 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나 먼저 간다.”
“어디를?”
“집에. 이건 네가 들고 가서 꼭 먹이고.”
강진은 서문우람에게 쌀과 고기를 건네주고는 그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달리기 시작했다.
‘안 질 수도 있었는데 녀석 때문에 졌어. 친구는 정말 하나도 많은 거야.’
강진은 억울함과 분함에 온몸이 떨리는 것 같았다.
‘진작 줄걸…….’
그리고 후회감이 밀려들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