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ministrator Kang Jin Lee RAW novel - Chapter (144)
관존 이강진 (144)
양보
“행복아, 내가 네 애비다, 애비.”
딸의 이름은 행복(幸福)이라고 지었다.
좋은 뜻이지만 이름으로는 참으로 거시기한 감이 있었다. 그러나…….
“행복하라는 이름이 뭐가 이상해서요?”
곽노도, 미영이도, 하물며 이제원마저도 강진의 뜻을 꺾지 못했다.
강진은 그렇게 자신만 만족한 행복이라는 이름을 부르며, 누운 채로 행복이를 배 위에 올리고는 웃었다.
가슴이 간질간질하면서도 시원하다.
강진은 웃는다는 게 이리 좋은 건지 몰랐다.
행복이를 볼 때에만 이런 웃음이 나온다는 게 문제이긴 했으나, 매일 보면 되는 것이니 문제 될 게 없었다.
“잘 기억해, 내가 네 아빠라는 걸.”
계속 행복이에게 강요하듯이 중얼거리는 강진을 보며 미영이 말했다.
“지금 행복이는 당신을 보지 못해요. 그러니 그만 좀 하세요, 애 힘들게.”
“뭘 못 봐? 이렇게 웃는데.”
“당신 목소리에 반응하는 거예요. 조금 자라야 사물을 볼 수 있어요.”
“무슨 소리. 내 딸이면 다른 사람과는 달라. 천재라고.”
누가 보면 팔불출이라 할 만한 소리였지만, 다행히 미영도 팔불출의 하나였다.
“그런데…… 정말 섭섭하지 않으세요?”
“뭐가?”
“아들을 바라셨을 텐데…….”
강진은 냉랭하게 말했다.
“한 번만 더 그 말 하면 정말 화낼 거야. 내 새끼라는 게 중요하지, 그게 뭐가 중요한데.”
“알았어요.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요.”
“조심해.”
강진은 행복이를 품에 안고 중얼거리다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요?”
“내가 잘못한 게 있어서.”
“뭘요?”
“틀린 게 있어서. 뭐, 사과하지는 않아도 되지만 그래도 그게 나을 것 같아서.”
영문 모를 소리에 미영이 의아해하자, 강진은 행복이를 그녀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있어, 그런 게. 나 나갔다 올게.”
“언제 들어오세요?”
“저녁에 들어와.”
강진은 밖으로 나왔다.
“아, 그냥 다음에 이야기할까?”
강진은 머리를 긁적이다 걸음을 옮겼다. 별채에 머무르고 있는 고순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아저씨.”
고정이 먼저 강진을 보고는 달려왔다.
이제는 몰라볼 정도로 살이 오르고 혈색이 도는 고정이었다. 이생단의 효과도 좋았지만, 이가장에서 제공되는 음식과 보약 등이 고정을 그리 만들었다.
“주인 오셨습니까?”
고순도 강진에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 호칭, 이제 바꾼다.”
강진의 말에 고순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바꾸자고, 그 호칭. 그냥 이 공자나 이 공이 괜찮을 것 같군.”
“…….”
“내가 좀 실수한 것 같아서 그래.”
“뭘 말씀이십니까?”
“내가 저번에 당신의 이유가 모든 걸 용서할 수는 없다고 했지?”
“네. 그리 말씀하셨지요.”
“그 이유, 이유가 아니라 당연한 것 같아서. 아비가 딸을 살리는데 뭔 이유가 필요해? 그냥 하는 거지.”
강진은 계면쩍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몰랐다면 모를까, 알았으니까 당신은 이제 내 노예가 아니다.”
고순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 강진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걸 인정하는 순간 알기 쉬운 사람이 되었다.
“알겠습니다, 이 공자.”
“마음대로 하라고, 이제.”
“이 공자는 이제 저를 산 게 아니라 은혜를 베푸신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머무르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뭐, 여기서 머물러도 되긴 하지만…….”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뭐든 돕고 싶습니다. 무슨 일을 시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허드렛일을 시키셔도 됩니다.”
“당신에게 허드렛일을 시키면 멍청한 거지. 그 재주를 왜 그런 데 쓰게 해.”
강진은 잠시 생각했다.
‘무공이 강하고 고지식한 성격이다. 무엇보다 믿을 만한 사람이지.’
강진은 사람을 잘 믿는 성격은 아니지만, 고순은 정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기 전에는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당신 정도라면 쓸데가 많아. 나를 위해 일할 건가? 대가는 충분히 줄게.”
“필요 없습니다. 은혜를 갚는다고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정아가 이곳을 좋아합니다.”
“좋은 환경이니까. 뭐든 정아가 하고 싶어 하는 걸 하게 해 주라고. 정 총관에게는 이야기해 둘 테니까.”
“감사합니다, 이 공자.”
고순과의 관계를 정한 강진은 말했다.
“그럼 한 달에 금 두 냥 줄게.”
“공자, 방금 전에 이야기했듯이…….”
“그리 생각 없이 대답하지 마. 언제 어떻게 될 줄 알고 준다는 걸 안 받아? 당신이 그러니까 정아가 고생한 거야.”
핀잔주듯이 던지는 말이었지만 고순에게는 조금의 악감정도 생기지 않았다.
“네, 알겠습니다.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좋아하지도 말고. 당신 능력에 금 두 냥은 전혀 비싼 게 아닐지도 모르지만, 나는 주고받는 게 정확해. 정아가 여기서 쓰는 비용, 저번에 당신 부녀를 살린 비용 등도 다 포함시킨 거니까 금 두 냥은 공정한 거야.”
“네. 불만 없습니다.”
“이제 생길 거야. 앞으로 당신은 매우 바쁠 거거든. 덕분에 난 행복이를 더 볼 시간이 생기고.”
고순이 다시 미소를 짓는 찰나 향아가 나타나며 말했다.
“그리 간단하게 허락하지 마세요, 고 대협. 이 공자님이 얼마나 이기적인데. 분명 고 대협이 손해 볼 겁니다.”
“뭐야, 그 말은?”
강진이 노려보며 하는 말에도 향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고받는 게 확실하지만, 더 주는 성격은 아니시잖아요. 그러니까 분명 고 대협이 손해를 보겠지요.”
“그걸 왜 네가 상관해? 사천에서 돌아온 후로 태도가 아주 불손해. 너도 내 고용인이라는 거 잊었어?”
“안 하면 그만이죠. 벌어 둔 돈도 많은데.”
향아의 말에 강진은 두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만두려고?”
“그만두길 바라세요?”
“아니. 계속 있어 주면 좋지.”
“그럼 있을게요. 저보다 강한 사람의 호위 무사라는 직업은 아주 편하다고요.”
“그래, 계속 있어.”
강진은 고개를 끄덕이다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정말 내 첩으로 들어올 생각 없어? 나보다 나이가 많긴 하지만 아직은 봐줄 만하다고.”
“공자님!”
순간 향아가 소리를 꽥 질렀다.
“누구 혼삿길 막힐 소리 하지 마세요!”
“어, 너 혼인해? 누구랑?”
“공자님!”
강진은 다시 꽥 소리를 지르는 향아를 보며 의아해했다. 이런 말을 한두 번 한 것도 아닌데 오늘은 이상하게 과민 반응을 하는 것 같았다.
“고 대협, 오해하지 마세요. 옆에 계시다 보면 고 대협도 공자가 가끔씩 헛소리를 하는 걸 듣게 되실 거예요.”
“헛소리 아닌데……. 향아 너라면 내 첩으로 들일 수도 있어. 정말인데.”
“이 공자!”
향아의 뾰족한 목소리가 다시 이가장에 울려 퍼졌다.
* * *
“두 달 후면 완공됩니다.”
정 총관의 보고에 이제원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십 년을 넘게 기다린 일이었다. 이제 그 일이 두 달 후면 시작되는 것이다.
정 총관은 그런 이제원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추밀원과 신교에 알릴까요?”
“시간이 길면 딴생각이 많아지지. 작업이 끝난 후에 알려도 늦지 않아.”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소주에게는 어떻게 하실 생각인지…….”
“하아!”
이제원은 다시 한 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지 않았으면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남들에게 존경받아 가며, 그렇게 자신의 삶을 살기를 바랐다. 이제 아비까지 되었으니 더더욱 그러길 바랐다.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겠지. 내가 알아서 하지.”
정 총관이 예를 올리고 나가자 이제원은 잠시 생각을 가다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안채로 걸음을 옮겼다.
“나다. 안에 있느냐?”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문이 열리고, 미영이 행복을 안고 나왔다.
“왜 네가 나오느냐? 시녀들은?”
“볕이 좋아서 잠시 나가서 쉬라고 했습니다.”
“쯧쯧, 그렇다고 네가 직접 나오는 건 좋지 않다. 시녀들을 더 고용해도 좋으니 혼자 있지 말거라.”
“네, 아버님.”
“우리 행복이는 잘 있느냐?”
이제원이 고개를 빼 들고 묻는 말에 미영은 급히 행복이를 그에게 건넸다.
“너무 얌전해서 겁이 날 정도입니다. 조금은 보채기라도 하면 좋겠는데.”
이제원은 행복이를 안은 채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무려면 어떠냐? 자기가 좋으니까 그런 거겠지.”
“네. 차 준비하겠습니다, 아버님.”
“아니다. 잠시 행복이만 보고 나갈 것이다. 강진이는?”
“요새 무슨 일을 하는지 매우 바쁜 것 같습니다. 저녁에 돌아오면 전신이 땀에 젖어 있는데…… 몸이 상하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미영의 대답에 이제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강진이 무공 수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었다.
“어디 있느냐?”
“포도청 일을 마무리하면 항상 산 공터에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제원은 행복이를 미영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기적인 놈이다. 자기 한 몸은 잘 챙기니 너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네, 아버님.”
“그리고 정화와의 혼사 때문에 네가 섭섭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미영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제가 어찌…….”
“네가 비록 첩실이라 하나 엄연히 이 집안의 맏며느리. 그만한 여유를 보였으면 좋겠구나.”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몸조리 잘하고 있거라.”
이제원은 미영에게 미소를 보이고는 안채에서 나왔다. 그러고는 주변을 둘러보다 신법을 전개해 뒷산으로 달려갔다.
조금 올라가니 강진이 무공을 수련하는 모습이 보였다.
‘허! 저 경지까지 왔나?’
강진이 무공 수련을 하는 것을 직접 본 건 처음인 이제원이었다. 정 총관에게 그리고 향아에게 강진의 무공이 절정 이상이라는 보고를 받은 적이 있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물론 실전에서는 저 능력을 얼마나 활용할 수 있을지 몰랐지만, 지금 보이는 모습의 팔 할 정도만 활용할 수 있어도 대적할 수 있는 무인은 많지 않을 것 같았다.
‘덕량이 말대로 했어야 하는가?’
이제원은 예전 강진이 무공을 익히지 못하게 하기 위해 불렀던 의형제 손덕량을 떠올렸다.
그때 손덕량은 배움을 막지 말고 차라리 제대로 가르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자신의 고집에 일음지로 강진의 진도를 몇 년이나 늦췄음에도 불구하고 저 나이에 저런 경지라는 건, 강진의 능력을 아는 이제원으로서도 믿기 힘들 정도였다.
순간 강진의 움직임이 멈췄다.
‘설마?’
이제원이 움찔하는 순간 강진의 고개가 돌아갔다.
‘설마 이 거리에 있는 나까지 눈치챘단 말인가?’
그 의심이 맞은 듯, 강진이 자신에게 날아오고 있었다.
“아버님.”
어느새 눈앞에 있는 강진을 보며 이제원은 당황함을 숨기고 말했다.
“수련 중이었느냐?”
“네. 요새 뭔가 좀 보이는 것 같아서요.”
‘뭔가 보인다라…… 그 경지에도 그리 쉽게 말할 수 있다면, 아직 끝을 보지 못했다는 것인가?’
이제원은 속으로 다시 한 번 놀라며 말했다.
“무리는 하지 말거라. 무인의 최대의 적은 자만과 조급함이다.”
“네. 그런데 아버지.”
“왜 그러느냐?”
“아버지도 고수셨네요. 간단한 호신술만 배웠다고 하셨잖아요.”
“감히 이 아비를 떠보는 것이냐?”
이제원의 엄한 말투에 강진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왜 그러셨는지 아버님이 말씀해 주시길 기다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
“그놈들 누구였습니까?”
“알 필요 없다.”
“제가 알 필요가 없으면 누가 알아야 합니까? 정 총관도 알고 있는 사실을 왜 제가 알면 안 되는 겁니까?”
“그건 너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강진이 소리 지르듯이 말했다.
“제 어머님을 죽인 놈들입니다!”
“그래서 너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버지!”
“그들은 나의 것이다. 네가 내 자식이라 하더라도 내 것을 뺏어 갈 수 없다. 네 어미…… 란아의 복수는 온전히 나의 몫이다. 그래서 너는 알 필요가 없다!”
“아버지!”
“이해하란 말은 않겠다. 하지만 인정해야 한다. 이 오랜 기다림의 고통은 나만이 가질 수 있는 권리이며 의무라는 것을.”
강진은 처음으로 이제원에게 대들었다.
“만약에 아버지가 실패하신다면요?”
“뭐라고?”
“만약에 아버님이 실패하셨을 경우를 물었습니다.”
“그럴 경우는 없다.”
단호한 이제원의 말에 강진은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는 거 아니었습니까?”
“감히 내게……. 오만해졌구나.”
“겸손해진 겁니다.”
이제원은 콧방귀를 날리며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 겸손함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알려 주마.”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