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ministrator Kang Jin Lee RAW novel - Chapter (17)
관존 이강진 (17)
“놈, 오늘따라 수업받는 자세가 왜 그따위냐?”
전인문의 호통에 강진은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제자가 잠시 딴생각을 하였습니다.”
“공부란 때가 있고, 너에게는 그때가 바로 지금이다. 요새 잘하고 있으니 방심하지 말고 더 열심히 해야 할 것이다.”
“네, 스승님.”
강진이 예전같이 따지는 것 대신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책을 보자 전인문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계속 수업을 해 갔다.
하지만 그의 만족과는 반대로 강진은 책에 시선을 두고 다시 딴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지? 아! 이건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힘드네. 직접 움직여 봐야 하는데. 수업은 오늘따라 왜 이리 긴 거야?’
강진은 오늘따라 지루함을 심하게 느끼며 몸을 움직이고 싶은 걸 필사적으로 참았다.
“오늘은 이만하도록 하자.”
전인문이 책을 덮고 방을 나서자마자 강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전인문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바닥에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냐?”
갑작스러운 강진의 행동에 서문우람이 신기한 듯 그를 보며 물었다.
“사부가 숙제 내 준 게 있는데 잘 안 풀리네.”
“숙제?”
“응, 아무리 해 봐도 잘 안 돼. 이걸 벌써 보름이나 잡고 있다니까.”
“그 원을 그리는 게 숙제냐?”
강진은 고개를 젓더니 벽에 세워져 있던 빗자루를 들고 왔다. 그러고는 빗자루를 봉처럼 잡고는 원을 밟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꽤나 재미있는 모습이라 서문우람은 마루에 주저앉아 우두커니 지켜보았다.
“아! 여기서 어찌해야 하는 거야?”
강진이 엇갈린 다리를 똑바로 세우며 중얼거리는 모습에 서문우람이 물었다.
“그걸 휘두르면서 원을 밟고 가야 하는 거냐?”
“응. 찌르고 베고, 오른발, 왼발을 하나씩 쓰면서.”
“재미있네.”
서문우람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강진에게 다가왔다.
“내가 해 보자.”
“네가? 아서. 다쳐. 발도 꼬이고, 장난이 아니란 말이야.”
“넘어질 일은 없을 것 같다. 비켜 봐.”
서문우람이 나서자 강진은 옆으로 비켜서며 말했다.
“다치고 나서 원망하지 마.”
“하하,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서문우람은 자신 있게 원을 밟아 가기 시작했다.
강진은 금방이라도 서문우람이 다리가 꼬여 주저앉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는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 모습이 자신이 처음 원을 밟았던 때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여유 있어 보였다.
“자! 됐지?”
서문우람이 원의 끝에서 하는 말에 강진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뭐냐? 어떻게 한 거야?”
“원의 배치가 주역에 나오는 팔괘와 육십사괘를 기본으로 한 것 같아서. 원들을 봐. 큰 원들은 건(乾)·태(兌)·이(離)·진(震)·손(巽)·감(坎)·간(艮)·곤(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잖아. 거기다 중간은 순서대로 그려져 있고.”
“주역? 건태이진 뭐? 하여간, 점쟁이들이 쓰는 그거?”
“그게 맞긴 하지만 주역은 세상만사의 이치를 알려 주는 책이야. 옛날 성인들이 주역을 이용해 길흉화복을 점쳐 지침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도 있잖아.”
“그걸 공부하면 쉽게 할 수 있어?”
“어렵진 않을 거야.”
어렵다.
타고난 오성이 받쳐 주지 않으면 그 변화를 한눈에 파악하지 못한다. 쉬웠다면 주역을 배운 학사들 모두가 팔괘를 기본으로 하는 무공과 보법을 할 수 있을 터였다.
서문우람은 전인문이 그의 집안의 생활까지 책임져 줄 정도로 천재였기에 한눈에 꿰뚫어 본 것이다.
“그럼 이 빗자루를 들고 해 봐.”
“찌르고 벤다는 거지?”
“그래.”
서문우람은 빗자루를 받아 들고는 강진이 했던 것처럼 찌르고 베며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중간에서 멈추더니 강진을 불렀다.
“강진아.”
“왜?”
“이거 단순하게 찌르고 베며 나아가면 평생 가도 안 될 것 같은데?”
“그게 무슨 소리야?”
“발은 순리에 따라 움직이는데 손은 따로 놀고 있는 모양새잖아. 네 무술 사부님이 뭘 가르치시는지 모르지만, 여기 움직임에 맞게 손쓰는 법이 있을 것 같아.”
순간 강진은 머릿속이 환해짐을 느꼈다. 그러고는 급히 서문우람의 손을 잡으며 힘차게 흔들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너 천재구나.”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아냐, 아냐. 그 주역이라는 거, 학당 서관에 있지?”
“응.”
“나 먼저 간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강진을 보며 서문우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 *
“무슨 일이 있나? 포기할 녀석이 아닌데.”
벌써 이레나 수련을 빼먹고 방구석에 처박혀 주역이라는 책만 파고 있는 강진을 보며 곽노는 영문을 몰라 그의 방문 앞에서 왔다 갔다 했다.
덜컥.
그때 문이 열리며 강진이 밖으로 나왔다.
“사부!”
곽노는 자신을 부르는 강진을 보았다.
꽤나 수척해진 얼굴이지만, 이상하게 빛이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드디어 나왔냐?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냐? 그 책이 그렇게 재미있는 거냐?”
강진은 손에 들고 있던 주역을 방으로 홱 던져 버리며 물었다.
“사부, 나에게 뭔가 숨기는 거 있죠?”
“숨겨? 뭘 말이냐?”
“빨리 이실직고하세요. 숨기는 거 다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내가 뭘 숨기냐? 숨길 게 뭐 있다고? 너도 내 방을 보면 알잖냐? 원래 가지고 있던 옷들도 이미 새 옷으로 교체된 지 오래다.”
강진은 씩 웃으며 말했다.
“엉큼하시긴. 오래 가르치려고 일부러 저를 골탕 먹이신 거잖아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곽노였다.
“무술 가르쳐 줘요.”
“무슨 무술? 무술은 다 가르쳐 줬는데.”
“찌르고 베고 그런 거 말고요. 초식이 있는 무술 말이에요.”
곽노는 더더욱 미궁으로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런 거 없다.”
“정말 이렇게 나오실 거예요?”
“정말이래도. 봉 쓰는 법은 다 가르친 거다.”
“그럼 권법이나 검법인 거예요?”
“알아들을 수 있게 좀 말해라. 갑자기 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
곽노의 반문에 강진은 뚫어지게 그를 보았다. 그러고는 사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사부, 이 보법은 군대에서 배웠다고 하셨지요?”
“그래. 거기에 내 경험을 통해 약간 수정한 거지.”
이제원이 대폭 수정했다고는 말 못 하는 곽노였다.
“아! 그래서였나?”
“뭐가?”
“사부가 제대로 배우지 못한 거예요. 사부가 게으름을 피웠거나, 장군들이 직무 유기를 했거나.”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고?”
강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 보법에 맞는 무술이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사부는 그걸 모르시는 것 같네요.”
“여기에 맞는 무술이라…… 네 말대로 그런 게 있었을지도…….”
“아, 또 혼자 고생해야 되네. 사부도, 가르쳐 주려면 완벽한 걸 가르쳐 주셔야지 반쪽짜리를 가르쳐 주셔 가지고.”
“그게…… 그런 거냐?”
곽노는 말을 더듬거리며 생각했다.
‘도대체 이 장주가 뭘 그린 거야?’
큰소리를 땅땅 쳐 놨으니 이제 와 이제원이 도와줬다는 말도 못 하고, 곽노는 강진의 눈치만 볼 수밖에 없었다.
“에이, 어쩔 수 없지요. 우리가 여기에 맞는 봉술을 만들면 되는 거죠.”
“뭘…… 뭘 만들어?”
“봉술요. 이 보법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깝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어떻게 만들려고?”
“다리 움직임에 맞게 만들어야지요. 백전노병의 사부와 뭐든 척척 해내는 제가 봉 휘두르는 법 하나 못 만들겠어요? 꼭 봉법이 아니더라도 상관없고요.”
곽노는 손바닥을 치며 동의했다.
“그렇지! 하나 만들면 되지.”
“빨리 시작해요.”
“학당에는 안 가고? 벌써 이레나 빠져서 전 노사가 많이 화났을 거다.”
“아! 그러고 보니 그랬네……. 아, 또 얼마나 잔소리를 할까?”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겠냐? 일단 들을 잔소리 후딱 듣고 와서 같이 하자.”
“그럼 학당부터 다녀올게요.”
강진이 책 보따리를 들고 휑하니 사라지자 곽노는 머리가 지끈해져 옴을 느꼈다.
“내가 무슨 대종사라고 무술을 만들어. 그렇다고 못 만든다고 할 수도 없고. 거기에 무술 하나 만들려면 시간도 오래 걸릴 테니 내 목적에도 부합하고. 에휴!”
곽노는 크게 한숨을 쉬고는 자신의 방에 들어가 전낭을 챙겼다. 그러고는 곧바로 가장 번화가로 가 서점을 찾았다.
“하나 걸려야 할 텐데.”
곽노가 중얼거리며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뭔가 찾는 책이라도 있으신가요?”
서점 주인인 듯한 중년 사내가 잽싸게 다가오며 묻는 말에 곽노는 반문했다.
“여기 무술 서적도 있소?”
“당연히 있습지요. 삼재로 시작되는 검법, 권법, 도법, 창법은 물론이고, 신의현에서 제일가는 강권무관에서 지은 강권권법도 있고, 종류는 많습지요.”
“일단 모두 가지고 와 보시오.”
“모두요? 꽤 많은데……. 뭘 사시려는지 말씀해 주시면…….”
“장사하기 싫으신가? 손님이 가져다 달라면 일단 가져다주면 될 것을.”
곽노가 전낭을 들었다 놨다 하며 하는 말에 주인의 눈빛이 달라졌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서점 주인은 몇 차례 왔다 갔다 하더니 어느새 곽노 앞에 수백 권의 서책을 쌓아 놓았다.
“이게 다입니다, 어르신.”
“많기도 하구먼.”
“몇 권이나 사실 생각이신지?”
안 사거나 달랑 한두 권 사 간다면 당장 멱살잡이를 하며 덤벼들 것 같은 서점 주인의 눈빛을 곽노는 깔끔히 무시했다. 그러고는 책 한 권 한 권을 들어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이 간과한 점 하나를 생각했다.
‘뭔 넘의 무술 서적이 죄다 그림 하나 없이 글로만 쓰여 있어?’
곽노는 글을 읽지 못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