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ministrator Kang Jin Lee RAW novel - Chapter (22)
관존 이강진 (22)
내공
“타앗!”
기합성과 함께 강진은 무명검법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아침에 이걸로 몸을 푸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려, 수련하지 않으면 왠지 몸이 찌뿌둥한 것이 기분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앙! 파앙!
기합성과 함께 힘차게 구르는 발에서 울려 나오는 진각 소리.
고수가 보았다면 명문 무가의 제자인가 할 정도로 강진의 몸짓에는 힘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강진을 보는 사람이 있었다.
* * *
“주인어른을 뵙습니다.”
한 달에 보름 이상을 집에서 머무르지만, 정 총관은 이제원의 집무실에 들어가자마자 황제를 대하는 것처럼 사지와 머리를 바닥에 조아렸다.
“자네인가?”
정 총관은 고개만 살짝 들어 이제원을 바라보았다.
정 총관의 눈에 의문만이 가득하자 이제원은 그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물었다.
“강진이에게 누가 무공을 가르쳤지?”
“소주인께서 무공을……?”
순간 정 총관은 대경실색하며 그야말로 온몸을 바닥에 엎드리는 것처럼 하고는 소리쳤다.
“소인은 아닙니다, 주인어르신!”
“이 집안에 자네 말고 무공을, 그것도 상승무학을 아는 이가 있던가?”
“소인이 알기로는 없습니다. 하지만 소인은 절대 아닙니다.”
정 총관이 몸을 떠는 것을 보며 이제원은 고민에 빠졌다.
혹시라도 무공을 접할까 두려워 무인은 단 한 사람도 집안에 들이지 않았다. 정 총관은 무인답지 않게 계산이 빠르고,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들여놓은 것뿐이었다.
물론 호위 무사를 들여놓긴 했지만 그건 남의 이목 때문이었다. 그 호위 무사들은 내공을 모르는 일반적인 무사들.
‘향아는 존재도 모르고 있을 테니 그도 아닐 테고. 그럼 누가?’
이제원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생각났지만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철저하게 뒷조사를 한 뒤였다. 그의 말은 조금의 거짓도 없었고, 지켜본 바로도 그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그럼 만들어 냈단 말인가?’
하지만 그것도 말이 안 되었다.
알고 있는 무공이라고 해 봐야 그저 열심히 하면 될 뿐인 찌르기와 베기뿐인 노인이었다. 그나마 진법을 변형시킨 보법만이 제대로 한다면 제법 쓸 만한 거였다.
그 순간 이제원은 그 쓸 만한 보법을 보완해 준 것이 기억났다.
‘보법을 기본으로 움직임을 만들어 냈다?’
그건 말이 되었다.
모든 무공의 중심은 하체다. 무공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하체가 튼튼하면 제법 힘을 실을 수 있게 된다.
‘무공 서적을 잔뜩 샀다고 그랬지?’
이제원은 그런 잡서들이 뭔 도움이 될까 싶었지만 사람 일은 또 모르는 법. 제법 괜찮은 기본 무서를 건지고, 강진의 머리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 역시 가지고 있는 무공의 절반은 만들어 낸 터. 강진이라고 못할 리 없었다.
곽노와 강진이 없는 틈을 타 이제원은 그들의 방을 살폈다. 그리고 무공 서적들을 발견하고는 살피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대부분 쓰레기였다. 단 하나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무명검법.
이제원은 그림만 잔뜩 있는 그 서적을 던져 버리려다 손을 멈췄다.
문득 그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무명검법이라는 이름처럼 생소한 자세들이었지만, 하체를 굳건히 하고 상체를 자유롭게 한다는 기본적인 틀에 충실한 것이었다.
이제원은 본격적으로 무명검법을 살피기 시작했다.
강진과 곽노가 그토록 애를 쓰며 만들어 냈던 동작들이, 이제원의 머릿속에서는 자연스럽고 더 강력한 동작들로 탈바꿈되고 있었다.
‘허허.’
다 살펴본 이제원은 속으로 헛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런 무공이 잡서적들과 같이 있었고 또 강진의 손에 들어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이런 무공이 왜 무림에 나오지 않았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이걸 그렇게 만들어 냈단 말이지?’
어설픈 냄새가 나는 강진의 동작들. 하지만 무리(武理)라고는 조금도 모르는 강진이 만들어 내기에는 불가능에 가까운 그것들.
이제원은 아주 오랜만에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안될 말.’
그리고 결정한 생각.
강진이가 무공을 배워서는 안 된다.
아들이다. 그녀가 남기고 간 하나뿐인 자신의 핏줄이었다. 절대 무공을 아는 삶을 살게 해서는 안 된다.
이 모든 변화를 만들어 낸 곽노를 쫓아내야 했다.
‘하지만…….’
이 모든 변화의 시작이 곽노였지만, 그 변화가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강진이 다른 아이들과 비슷해지고 있었다. 친구도 생겼다고 들었다. 그게 겉모습뿐이라고 하더라도, 이제원은 너무 기뻤다.
곽노를 내보내면 그런 변화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건 내 실수야. 그냥 엉터리 무공을 가르치게 뒀어야 했는데, 아들이 배운다는 생각에 무심코 바꿔 버린 거야.’
자신에게는 없다고 생각했던 부정(父情)이건만, 그도 인간이었던 것이다.
‘쓸데없는 걸 가르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이제원의 손에서 무공 서적이 마치 타는 것처럼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어느새 재가 되어 흩날렸다.
‘내공이 없으니 괜찮을 거야. 어느 정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수준이라면 나쁘지도 않을 테고.’
이제원은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다.
강진의 방을 나오던 이제원의 걸음이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보고에 의하면 곽노가 강진에게 내공을 가르친다고 했다.
이제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방법으로는 절대 단전을 만들어 낼 수 없으며, 그야말로 하늘에 뜬 구름 잡는 것보다 말도 안 되는 방법이었다. 이야기책에서나 가능할 그런 방법.
‘설마…….’
이제원은 다시 고개를 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 * *
“밥이다.”
서문우람이 상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오자 아이들은 신 나 하며 저마다의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두 손을 쥐고 밥상이 내려앉기를 기다렸다.
특별한 건 없었다. 항상 그렇듯이 커다란 그릇에 찐 감자와 소금을 조금 뿌린 소채.
강진은 그 상차림을 보며 생각했다.
‘내가 왜 이렇게 이곳에 놀러 오는 걸까?’
신기한 일이었다.
서문우람을 배웠다.
아니, 사람들이 왜 그를 좋아하는지 그 이유를 어렴풋이 깨달았고, 따라서 더 이상 그를 찾을 이유가 없는데도 계속 그의 집에 찾아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심심하지는 않으니까. 매일같이 하는 훈련도 지겹고.’
강진은 그렇게 스스로 변명했지만, 서문우람의 집에서 하는 일도 재미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동생들을 위해 나무를 하고, 밭의 돌을 갈아 주고, 더럽게 먼 곳까지 가서 물을 길어 오고, 일이 끝나면 이가 득실거리는 방에 앉아 이렇게 입맛에도 맞지 않는 감자와 소금 간을 한 채소 따위를 먹을 뿐이었다.
그 시간에 집에 있었다면 책 한 줄 더 읽고, 수련을 조금 더 할 수 있었으며,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고기반찬에 흰쌀밥을 먹을 수 있는데도 말이다.
“오빠도 먹어요.”
미아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감자 하나를 잡아 강진에게 넘겼다.
“손 씻었어? 봐 봐, 감자에 때가 덕지덕지 묻었잖아. 가서 손부터 씻고 와. 물 길어다 놨으니까. 다른 녀석들도 어디 보자. 이것들이, 얼른 나가서 손 씻고 와.”
그냥 받아도 될 것을, 깔끔하게 손부터 씻고 오라고 잔소리를 퍼붓는 강진이었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나가 손을 씻고 오더니 자신의 자리에 착착 앉았다. 그리고 감자를 한 움큼 베어 물어 오물거리는 걸 보자니 강진은 왠지 모를 기쁨이 느껴졌다.
그러고는 원망의 눈길로 서문우람을 보았다.
‘저 고집불통.’
매 끼니 고기 한 점씩 입에 물려 주고 싶었지만 서문우람의 눈치 때문에 그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결국 이레에 한 번씩 닭 두 마리 사 오는 걸로 결정한 상태였다.
“어! 오으빠, 이야아기 드르으셔써요?”
그때 정화가 볼에 감자를 가득 넣고 웅얼거리는 소리에 서문우람이 한마디 했다.
“말은 다 씹어 삼키고 해라. 무슨 소린지 모르잖니.”
정화는 열심히 입을 놀려 입안에 있던 감자를 삼키고, 목이 막힌 듯 물을 마시고는 말했다.
“오빠, 할 이야기가 있어요.”
“무슨 이야기?”
“이 근처로 마적 떼가 몰려왔대요.”
“마적 떼?”
서문우람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긴 해도 관아가 그리 멀지 않은 터라 좀도둑들은 많아도 마적 떼 같은 대규모 도적들은 오지 못하는 곳이었다.
“네. 옆 동네에도 얼마 전에 강도가 들었대요.”
“강도가 든 것이냐, 마을이 습격을 당한 것이냐?”
“강도가 들었다는데요.”
“그럼 마적 떼가 아니라 도둑이 들었다고 해야지. 마적 떼는 이곳까지 오지 못해.”
서문우람의 설명에 정화가 아니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말을 타고 있었대요. 거기다가 숫자도 열 명이나 되고요.”
“말을 탄 열 명의 도둑들이라. 마적 떼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크게 틀린 말은 아니구나.”
“그래서 촌장님이 사람들을 모아서 번을 서자고 하는데, 우리 집에서도 한 명은 번을 서야 한다는데요.”
곤란한 일이었다.
가족 중에 번을 설 만한 사람은 서문우람밖에 없었고, 하루 두 시진을 자고 학당에 다니는데 번까지 서야 한다면 학당에 나오지 못할 터였다.
“쓸데없는 일을 하네.”
옆에서 강진이 끼어들며 말했다.
“번을 서서 뭐하려고. 여기서 관아까지는 두 시진도 더 걸리고, 탈거라고는 고작 소나 당나귀밖에 없으면서 말 탄 놈들을 어찌 당하려고.”
“그래도 사람이 많잖아요.”
정화의 말에 강진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평생 농사만 짓고 사람 한번 제대로 때려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이 그 흉악한 놈들을? 아서라, 모조리 죽기 싫으면.”
“그럼 어떡해요? 그냥 강도를 당해요?”
정화가 왠지 억울하다는 듯이 하는 말에 강진은 생각하다 말했다.
“차라리 돈을 거둬서 낭인 무사들을 사는 게 낫지. 그네들은 사람은 죽여 봤을 테니.”
“그렇지 않아도 촌장님이 이미 이야기했어요. 돈을 거둬서 낭인 무사들을 사는 방법도 있다고. 하지만 낭인 무사들을 고용하려면 사흘에 은 한 냥은 줘야 한다는데요.”
팔 인 기준으로 농가의 일 년 수입이 은 열 냥을 넘지 못하는 걸 생각하면 은자 한 냥은 무리이기도 했다.
“그런데 여긴 훔쳐 갈 것도 없잖아. 그냥 안 한다고 해도 되지 않아? 번은 여기까지 오지 않으면 될 일이고.”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마을 일에 협조를 하지 않으면…….”
“아!”
강진은 자신이 한 말의 문제를 알았다. 지금 상에 올라와 있는 감자나 야채 따위가 모두 마을 사람들이 준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물론 아이들이 밭일을 도와준다고 하지만 어린아이들이 도움이 되면 얼마나 되겠는가?
마을 사람들도 사정이 어려우니 대놓고 도와줄 수도 없고, 티 나지 않게 보태는 것이 분명할 터.
그런데 마을 일에 협조하지 않으면 다음부터 이런 도움은 얻기 힘들 것이 분명했다.
“거기다 놈들이 돈만 약탈한다는 보장도 없고…….”
거기다 서문우람이 동생들을 보며 하는 이야기에 강진은 곧바로 다른 방법을 내놨다.
“그럼 우린 번을 서는 대신 돈을 낸다고 해.”
“강진아.”
옆에서 서문우람이 놀라 하는 말에, 강진은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럼 네가 번을 설 거야? 회시(會試)*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무리 너라도 회시는 그리 쉽지 않아.”
[*회시(會試) : 송 시대 삼 단계의 과거제도 중 이 단계.]“그렇지만…….”
“관리가 되어서 갚으면 될 일을 너무 꽉 막히게 생각하는구나. 스스로 너의 시간을 어디에 투자해야 효율적일지 생각해 봐. 비실비실한 네가 번을 서는 게 나을지, 아니면 도움을 받고 급제한 후에 내가 쓴 돈을 변제할지를 말이야.”
“…….”
서문우람이 아무 말 못 하자 강진은 씩 웃으며 말했다.
“내 이자는 비싸. 고리까지는 아니지만 말이지.”
“그래. 그럼 부탁 좀 하자.”
강진은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품에서 은자 세 냥을 꺼내며 말했다.
“이거면 충분할 거야. 혹여라도 모자라면 이야기하고.”
“아니다. 충분해. 그리고 이 돈은 반드시 갚으마.”
“안 갚는다고 해도 받을 테니 걱정하지 마.”
문제 하나를 해결하자 모두 먹는 데 집중했고,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후로는 금세 날이 어두워졌다.
“그럼 이만 간다.”
강진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서문우람이 말했다.
“너무 늦었는데. 괜찮겠어?”
“괜찮아. 하루 이틀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마적 떼도 다닌다는데…….”
“여기서 당하나 갈 때 당하나 다를 게 있어? 걱정 그만하고 내일 보자.”
강진은 배웅하려는 서문우람과 아이들을 앉혀 놓고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