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ministrator Kang Jin Lee RAW novel - Chapter (28)
관존 이강진 (28)
학당은 소란스러웠다.
회시를 치르기 위해 광동 본성으로 가는 날이었다.
명안학당에도 다섯 명의 응시자가 있었다.
그 다섯 명은 몇 달 전부터 학당에서 숙식을 하며 전인문의 집중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사실 회시는 어떠한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수십만 자의 글자를 암기하고 그걸 써내야 하는 시험.
며칠을 시험장에서 숙식을 하기에 특별한 가르침이 필요 없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전인문은 모의 형식으로 그걸 똑같이 재현하고 있었다.
한번 모의 과거를 치를 때마다 다섯 명의 응시자는 얼굴이 휑해질 정도로 체력을 빼앗겼지만, 덕분에 모두 시험 준비를 완벽하게 끝낼 수 있었다.
“회시는 두 번째 단계일 뿐이지만 어쩌면 마지막 단계인 전시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다. 이건 자신과의 싸움인 만큼 집중력을 잃어서는 아니 된다.”
마지막으로 전인문은 다섯 명을 모아 두고 당부를 했다. 모두 완벽하게 준비를 끝냈지만 스승의 마음은 여전히 불안한 것이다.
“이 사부도 시험관으로 참여하지만 내 제자라고 해서 특혜를 줄 생각은 전혀 없다는 것도 명심하고.”
“네, 스승님.”
다섯 명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하자 전인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배웅했다.
그 다섯 명 중에는 이강진과 서문우람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 이걸 꼭 봐야 하나? 단순하게 외우는 건데. 그냥 바로 전시를 보고 싶은데…….”
회시 때문에 강진 역시 한 달간을 꼼짝없이 전인문과 보내야 했고, 지루함에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직 해내지 못한 수련이 마음에 걸려 영 꺼림칙했다.
옛날 같았다면 안 한다고 줄행랑을 쳤겠지만, 서문우람에 대한 승부욕과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학업에 집중했던 강진이다. 덕분에 전인문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오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수재로 주목을 받고 있었기에, 이제는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한 달 전에 아버지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격려하던 것 때문에 감히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부까지. 자기도 몇 글자 모르면서.’
거기에 곽노까지 합세하자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아, 내가 미쳤지. 그런 걸 왜 외워서. 이게 다 이놈 때문이야.’
강진은 지금도 쉴 새 없이 경전을 중얼거리고 있는 서문우람을 원망 어린 표정으로 보았다.
사실 강진은 이번에 회시를 치를 생각이 없었고 전인문 또한 내보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강진이 서문우람이 글을 읽고 있을 때 수련을 하면서 같이 외워 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성현들의 말들은, 왜 그런 생각을 해야 하는지 또 그게 자신에게 무슨 도움이 될지 이해하는 것이 힘들었지, 외우는 것 자체는 강진에게는 무척이나 쉬웠다.
문제는 그걸 전인문이 딱 봐 버렸다는 것.
검을 휘두르면서 반 시진도 안 되어서 책 한 권을 통째로 외워 내는 강진을 보고 전인문은 다른 것도 시켜 봤고, 그의 의도를 몰랐던 강진이 그대로 말해 버리자 바로 회시 응시생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결국 한 달이나 잡혀서 꼼짝없이 다른 경전들을 외울 수밖에 없었던 강진은 몸이 쑤셔 안달이 나 있었다.
매일같이 달리고 창과 검을 휘두르던 강진에게 몸을 움직이지 못한다는 건 실로 끔찍한 일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이 좁쌀을 키웠으니 다행인 건가?’
꼼짝없이 자리에만 앉아 있다 보니 호흡에 집중할 수 있었고, 덕분에 단전에 있던 좁쌀이 콩알만 한 크기로 커져 있었다.
‘잘하면 다른 쪽으로도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처음에 정수리까지 올렸던 좁쌀은 이제 단전과 목 아래까지 움직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 위와 아래로 더 내려가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무가라면 그것이 임맥과 독맥의 양맥이라는 것을 알고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겠지만 곽노가 그런 지식을 알 리 없었고, 당연히 강진 역시 몰랐다.
막연히 거시기 아랫부분과 입술 부분이 가끔씩 찌릿한 느낌을 받았고, 거기까지 움직이려나 하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학당 정문 앞에서 잠시 기다리니 마차 세 대가 도착했다.
이제원이 해 준 것으로, 두 대는 다섯 명의 응시자가, 다른 한 대는 전인문이 타고 갈 마차였다.
“강진아!”
마차에서 곽노가 내리자 강진은 뛸 듯이 반기며 말했다.
“사부도 가시는 거예요?”
“너 같은 골칫덩어리를 혼자 보낼 수가 있겠냐? 이 사부가 따라가기로 했지.”
곽노가 웃으며 하는 말에 강진도 마주 웃으며 말했다.
“올라가서 또 술이나 잔뜩 마실 거면서.”
“이미 잔뜩 마셨다. 어여 타라.”
강진은 서문우람과 마차에 올라타며 물었다.
“다 외우지 않았어? 뭘 그리 쉴 새 없이 중얼거리냐?”
경전을 외우는 것을 멈추지도 않고 그저 웃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서문우람의 모습에, 강진은 다시 투덜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타그닥타그닥.
마차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하자 강진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광동성의 성도 광주는 신의현에서 며칠 걸리는 거리.
신의현을 벗어나는 건 처음인지라 강진은 바깥을 살펴보며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성도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특별한 볼거리라고는 없었다.
학우들은 쉴 새 없이 책을 보았고 마부들은 묵묵히 말을 몰 뿐인지라 강진은 심심해지기 시작했다. 믿었던 곽노마저 술에 취해 곯아떨어져 있었다.
“에이, 뭐하러 이리 있어. 연습이나 하자.”
강진은 달리는 마차에서 껑충 뛰어내리더니 자객 걸음으로 마차 뒤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서문우람이 놀라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지만, 강진이 괜찮다는 손짓을 하자 다시 책에 집중했다.
“역시 오랜만에 달리니 힘들어. 이래서 하루도 쉬면 안 되는 건데.”
달린 지 반 시진 만에 숨이 가빠 오는 것을 느꼈지만, 이내 자신이 달리는 뒤에서 먼지가 일어나지 않음을 깨달으면 다시 힘을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느새 일행은 광주에 도착했다.
“성도라고 해도 별다를 거 없네. 사람 많고 집이 큰 것 빼고는.”
강진은 시큰둥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정신없이 주변을 돌아보기 바빴다.
“무사히 도착하셨군요. 이제 제가 모시겠습니다.”
마차가 평안객잔이라는 이름의 큰 객잔에서 멈춰 서고 일행이 내리자, 한 사내가 나서서 그들을 맞이하였다.
“오시는 길은 편안하셨습니까?”
평안객잔은 이가장에서 운영하는 곳이었고, 사내는 이 객잔을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지루해 죽는 줄 알았지. 여기야, 우리가 쉴 곳이?”
강진의 물음에 사내가 대답했다.
“네. 과거는 사흘 후에 열리니 이곳에서 쉬시면서 마지막 정리를 하시라는 장주님의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도련님과 친구분들이 머무를 때에는 손님을 받지 않기로 했으니 조용하게 과거 준비를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알았어. 모두 들어가지.”
이강진이 따라왔으니 모두가 편안한 곳에서 머무를 줄은 알았지만 객잔 하나를 통째로 전세를 낼 줄은 몰랐던지라 다른 사람들은 떨떠름한 마음으로 객잔으로 들어갔다.
객잔은 밖에서 본 것보다 더 컸다.
본건물 말고도 뒤쪽으로 후원이 하나 있었는데, 인공 호수에 갖가지 나무들과 꽃나무들이 가득했다. 겨울인지라 꽃은 피지 않았지만 왠지 쓸쓸한 느낌을 주는 것이 나름 운치가 있었다.
저마다 방에 들어가 짐을 풀자 강진은 곧바로 서문우람을 찾았다.
“우람아, 가자.”
짐을 풀자마자 탁자에 책을 폈던 서문우람이었다.
“어디를?”
“여기까지 왔는데 구경도 좀 해 봐야 할 거 아냐. 별다른 건 없겠지만 그래도 사람은 많더라.”
“책 봐야지. 네 부친이 손해를 감수하고 객잔을 내주셨는데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냐?”
“이미 다 외운 거 또 외우면 헷갈리기만 해. 쉬는 것도 중요한 공부라고.”
강진의 떼에 서문우람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쉬더라도 안에서 쉬어야지. 그래야 피로도 빨리 풀리고.”
“꼼생이 같으니라고. 됐어. 사부랑 가면 돼.”
강진이 문을 홱 닫고는 곽노를 찾았다.
“마차 안에서도 술 냄새를 진동시키더니 이곳에서도 그러시네. 사부, 빨리 일어나요.”
날 만났다는 듯이 술을 퍼마신 곽노는 해롱해롱한 표정으로 눈을 떴다.
“이놈아, 잠 좀 자자. 얼마나 피곤한지 아냐?”
“마차에서 그리 주무시고도 모자라요? 빨리 일어나요. 나가 봐야죠.”
“나가서 뭐하려고? 있을 건 여기에 다 있는데.”
“한 달이나 학당에 잡혀 있다가 요 며칠은 마차 안에만 있어서 답답해 죽는 줄 알았다고요.”
“실컷 달렸잖아.”
“사부!”
강진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곽노는 두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가자, 가!”
곽노는 어쩔 수 없이 강진을 따라나섰다.
* * *
강진의 강권에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섰지만 막상 길을 따라 걸으면서 더 좋아하는 건 곽노였다.
반평생 이상을 북방에서 보냈고, 오면서 나름 유람이라는 것을 하긴 했지만 돈 걱정 하느라 물가 비싼 유명 관광지는 꿈도 못 꾸고 그냥 관도를 따라 걷기만 하던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머무를 곳이 있고, 수중에 돈도 있고, 또 없어도 강진이 있었기에 느긋하게 주변을 살필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따, 사람이 많네.”
“군대도 사람은 많잖아요. 뭘 그리 신기해하세요?”
“군인이 사람이냐? 군인은 사람이 아니야. 민간인이 사람이지.”
“뭔 소리래요?”
“그런 게 있다. 군인만 알 수 있는 거.”
별로 궁금하지 않았기에 강진은 따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장거리에 널린 군것질거리를 사서 먹고, 약장수니 차력사니 하는 사람들의 재주도 구경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 잡놈이!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 할 거 아냐?”
“아이고, 한 번만 봐주십시오. 다음 달에는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시장 한편에서 호통 소리와 비명 어린 울음소리가 들리자 강진은 고개를 돌렸다.
척 봐도 나 이 바닥 왈패요 하는 냄새를 풍기는 사내의 다리를 마른 사내가 붙잡고 있었다.
“이거 안 놔!”
우락부락한 사내가 손을 휘둘러 한 대 치자, 마른 사내가 머리를 감싸 쥐며 바닥을 뒹굴었다.
우락부락한 사내가 말했다.
“당연히 다음 달에는 갚아야지. 그래도 이번 달 이자는 줘야지, 안 그래?”
“다음 달에 꼭 같이 갚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이번 달은 좀 봐주십시오.”
“봐준다니까, 이자만 주면. 어디 보자, 첫 번째 담보물이 네놈 딸년이구나.”
“아이고, 나리! 제발…….”
마른 사내가 다시 우락부락 사내의 다리를 잡는 모습을 보고 곽노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쯧쯧, 염왕채를 썼구나.”
“염왕채요?”
“고리로 돈 빌려 주는 놈들이다. 돈을 회수할 때는 인정사정을 보지 않아 염왕의 돈이라고 해서 염왕채다.”
“돈을 빌렸으면 갚는 건 당연하잖아요.”
“네 말이 맞다만, 갚지 못할 이자를 요구하니까 욕을 먹는 거지.”
곽노의 말에 강진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사람들이 고리라는 걸 모르고 빌리나요?”
“알지. 하지만 당장 급하니 빌리는 거지. 사람이 원래 그렇다.”
“원래 그런 게 아니라 멍청한 거죠. 알면서 왜 빌려요?”
곽노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강진의 말대로 알면 빌리지 말아야 하는 것이 염왕채고, 빌린 당사자들도 그걸 알고 있다.
하지만 살다 보면 알면서도 지옥 구덩이에 들어가게 될 때가 있는 법이다. 곽노는 강진에게 그걸 어찌 설명해 주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곽노의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네 친구 녀석도 고집불통이지만 네 돈을 받았잖냐.”
“그야 어머니가 당장 약을 쓰지 않으면 죽으니까요.”
“바로 그거다. 그렇게,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거다.”
그제야 강진도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다 말했다.
“하지만 전 이자가 없어요. 차용증도 없으니 돈 안 갚아도 되고요.”
“그럼 저 사람은 너 같은 친구가 없는 게 불운이로구나.”
곽노의 말에 강진은 사채업자에게 둘러싸여 맞고 있는 마른 사내를 보았다.
“그러게요. 운이 없네요.”
그러고는 흥미를 잃은 듯 곧바로 사람들이 모여 구경하고 있는 사당패 쪽으로 곽노를 끌고 가려 했다.
‘이런 일은 아직 무리인가? 아니, 뭐 이런 것에까지 불쌍한 마음을 품게 할 필요는 없겠지.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니…….’
곽노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마른 사내를 한번 보고는, 강진이 잡아끄는 대로 몸을 움직이려 했다.
순간…….
퍽!
뭐에 맞았는지 살 치는 소리가 크게 들리며 마른 사내가 입에서 핏덩어리를 토해 내며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리고 그 핏덩어리는 허공을 날아 어디론가 향했다.
휘이이잉!
공교롭게도 순간 불어온 돌풍이 핏덩어리를 안고 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악!
그리고 그 핏덩어리는 강진의 뒷덜미를 덮쳤다.
끈적한 기운에 강진은 자신의 옷깃을 만졌고, 피는 강진의 손에 달라붙었다.
‘아이쿠!’
그리고 곽노는 일 났음을 깨달았다.
저 옷은 이제원이 과거에 나가는 아들을 위해 특별히 선물한 것이었고, 아버지에게 처음 받아 본 선물이라 강진이 지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 타인의 일이 아닌, 강진 자신의 일이 된 것이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