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ministrator Kang Jin Lee RAW novel - Chapter (58)
관존 이강진 (58)
포섭
“원하는 것은 그게 다냐?”
이제원의 물음에 복면인은 고개를 조용히 숙였다.
이제원은 그 모습에 잠시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
“알았다. 준비해 두마. 그런데 너마저 감당하지 못했다고?”
“아직 경험이 없으시니 죽이고자 마음먹는다면 하지 못할 것도 아니나, 시간이 지나 경험을 쌓으신다면 어떤 상황에서든 스스로를 보호하실 수는 있을 겁니다.”
“으음…….”
이제원은 짧게 신음하며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말했다.
“알았다.”
“어르신께서 부디 마음을 돌려 주시기 바랍니다.”
“생각해 보마. 그동안은 네가 수고해야겠구나.”
“얼마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복면인이 사라지자 이제원은 한숨을 내쉬며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낡고 세월의 때가 묻은 비단 한 폭이었고, 그 비단에는 여인이 그려져 있었다.
“그렇게 애를 썼는데도 어쩔 수 없나 보다. 란아, 네가 있었다면 많이 달라졌겠지만, 지금은 더 이상 방법이 없구나.”
왼손으로 비단 폭을 받치고 오른손으로는 조심스럽게 그림을 쓸어내리는 이제원의 눈빛이 흔들렸다.
“기왕 이렇게 된 거라면…… 확실한 것이 낫지 않을까? 감히 건드릴 생각도 못 하게 강하게 말이오. 그래도 걱정은 마오, 무인의 삶은 살지 않게 할 테니. 그럴 생각도 없어 보이고 말이오.”
이제원은 조심스레 비단을 다시 접어 품에 넣고는 정 총관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천급 약이 얼마나 있지?”
이제원의 물음에 정 총관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천급 약이라면 이제 다섯 명분 정도가 있습니다.”
“그것밖에 남지 않았나?”
“살령대를 만드는 데 많이 들어갔습니다. 재료는 계속 구하고 있으나 아무리 돈을 들여도 구하지 못하는 게 많아서, 재료 수급에 차질이 약간 있습니다.”
“돈을 써도 못 구하면 그보다 더한 돈을 써. 어떻게든 차질이 없게 만들어.”
“네.”
“그리고 남은 약 중에서 두 명분을 향아에게 주게.”
정 총관이 확인하듯이 물었다.
“향아에게 말입니까?”
“그래. 가능하면 빨리.”
정 총관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나가려 하자 이제원이 그 뒤에다 대고 말했다.
“한 명분은 강진에게 조금씩 먹이고.”
정 총관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하지만 이제원의 표정을 보고는 묻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돌리며 방을 나갔다.
* * *
‘남가장은 샅샅이 뒤졌을 테니 그 집 안에는 없고 시중에 풀린 것도 아니라면, 과연 어디 있는 걸까?’
방금 정 총관이 와서 시중에 칠색 보옥 반지가 없다는 걸 알려 주고 갔기에, 강진은 잠시 묻어 뒀던 장삼의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반지를 찾지 못하면 장삼은 꼼짝없이 범인으로 몰려 현으로 압송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유력한 용의자는 정말 장삼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건 자신이 직접 남가장의 식솔들을 불러 엄포를 놓아 확인한 바였다.
서수현이 장삼에게 무슨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다 잃어버리고 화가 나서 뒤집어씌운 것도 아니었다. 그러다 나중에 어디서 찾기라도 한다면 체면 때문에 그 반지를 낄 수도 없게 되니 말이다.
서로 거짓말할 이유가 없으니 강진으로서도 어떻게 해결할지 몰랐다.
‘그럼 제삼자가 있다는 건데…….’
한참 고민하고 있을 때 곽노가 다가왔다.
“뭔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냐? 퇴청했으면 좀 쉬어야지. 그러다 몸 상한다.”
“어디 갔다 오세요? 요새는 돌아와도 늘 안 보이시네요.”
“흐흐흐흐.”
대답 대신 웃음으로 때우려는 곽노를 보며 강진도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이 씨네 다녀오시나 보군요.”
“이 씨네가 뭐냐? 사모가 될 사람한테.”
“어, 그러면?”
“다음 달에 날 잡았다.”
곽노가 머쓱해하며 하는 말에 강진은 기뻐했다.
“축하드려요. 진작 했어야 했는데. 나이 들어 뭔 연애를 그리 오래 하세요?”
“나이가 든 만큼 진지해야지. 평생을 같이할 사람인데. 나이 차이가 있어 조금 걱정이 된다만.”
“인생은 육십부터라고 했는데 아직 멀었잖아요. 그리고 사부 쉰도 안 된 것 같아 보여요. 또 이 씨…… 아니, 사모께서도 마흔이니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요.”
“그러냐?”
곽노의 나이 쉰여섯.
그런데 쉰으로도 안 보인다는 말에 곽노는 기뻐했다.
“그럼요. 예전에는 나이보다 늙어 보이셨는데 요새는 그리 안 보이세요. 잘 드셔서 그런 건가?”
“보약이 효과가 좋은가 보다.”
“정 총관에게 말해 놓을 테니 꾸준히 챙겨 드세요.”
“그러면 좋고. 그런데 말이다.”
“네.”
곽노는 주변을 살피더니 품에서 작은 비단 주머니에 싼 보따리를 꺼내었다. 그러고는 강진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번에 선물로 산 건데…… 내가 이런 걸 볼 줄 몰라서. 일단 제일 비싼 걸로 샀는데 말이다.”
강진이 받아 들어 비단을 걷어 내니 거기에는 명주 반지 하나가 들어 있었다.
명주에 흠집이 없고 색깔이 진한 것이 상품이었지만, 크기는 좀 작았다.
“크기만 빼면 상품이네요. 얼마 주고 사셨는데요?”
“금 두 냥…….”
“이야! 우리 사부, 큰마음 먹으셨네. 하지만 저에게 이야기하시면 제가 준비해 드려도 됐는데.”
“선물은 마음인데…… 그래도 내 마누라 손에 낄 반지는 내가 마련해야지.”
쑥스러워하는 곽노를 보며 강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모에게 잘 어울릴 거예요. 사부가 반지를 준비하셨으니 저는 다른 장신구를 구해서 선물해 드릴게요. 좋아하실 거예요.”
곽노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됐다. 옷은 무명옷인데 값비싼 장신구 주렁주렁 다는 것도 보기가 흉하다. 뭐든지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하는 거다.”
“이 반지에 어울리는 걸 준비하면 되죠. 또 거기에 어울리는 옷도 준비하고…….”
순간 강진의 머릿속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잠깐만……. 사부, 장신구는 확실히 착용하는 사람에게 어울려야겠죠?”
“그렇지.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는 말도 있지 않으냐? 모든 물건에는 주인이 있다는 말도 있고.”
“그럼 아주아주 값비싼 반지가 있으면 거기에 어울리는 사람도 따로 있겠죠?”
“그렇겠지. 무슨 일이냐, 갑자기?”
“아니에요. 역시 사부가 최고예요. 사부랑 이야기하면 무슨 일이든 척척 풀리는 것 같아요.”
영문을 몰라 두 눈을 깜빡거리는 곽노를 뒤로하고, 강진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포도청을 향해 달렸다.
며칠 골머리를 앓게 하던 장삼 문제의 해결책이 보이는 것 같았다.
“거기 누구…… 충!”
포도청의 정문을 지키던 포졸 하나가 강진을 알아보고 급히 자세를 바로 했다.
강진이 포졸에게 물었다.
“오늘 당직 포두 누구지?”
“정 포두입니다.”
“지금 당장 내 방으로 오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강진은 집무실로 들어가 신의현의 호구조사서를 찾았다. 기록을 훑는 중 정 포두가 안으로 들어왔다.
“대장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정 포두, 우리 현에 좀 사는 집, 그러니까 돈 걱정할 필요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지?”
“돈 걱정할 필요 없는 집이라면 상수에서도 별로 없습니다. 한 오십여 가구?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십니까?”
“장삼이 건 때문에. 내가 알아봤는데, 매물로는 나오지 않았어. 그럼 누가 몰래 개인 소장을 했다는 건데, 그만한 물건을 가지려면 보통 재력으로는 안 되잖아.”
포도청 짬밥을 가장 많이 먹은 정 포두는 강진의 의도를 금방 알아차렸다.
“그러면 일반 가문은 아닐 겁니다. 다른 쪽을 알아봐야 합니다.”
“그건 무슨 뜻이지?”
“신의현에서 남씨 일가의 위세는 큽니다. 그네들끼리는 이미 서 부인이 반지를 잃어버렸다는 걸 다 알고 있을 텐데 그걸 가지고 있는 간 큰 사람은 없을 겁니다. 들키면 서 부인이 가만있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그럼?”
“그게…….”
정 포두가 갑자기 우물쭈물하자 강진이 물었다.
“왜, 걸리는 게 있어?”
정 포두는 강진을 보고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말했다.
“대장님이야 걱정하실 게 없지만 소관은 눈치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나 말고 다른 사람 눈치를 왜 봐?”
“대장님, 지금 말씀드리는 건 대장님만 알고 계셨으면 합니다.”
“나 몰라? 언제 내 아랫사람에게 해 되는 일 하는 거 봤어? 걱정하지 마.”
정 포두는 조심스레 대답했다.
“소관이 며칠 고민해 봤는데, 장삼 말고 용의자가 하나 더 있긴 합니다.”
“누구?”
“그게…… 남 대인입니다.”
“남 대인? 그가 왜? 자기 집 물건을 주인이 훔친다는 게 말이 돼?”
정 포두가 강진을 보며 말했다.
“그래서 용의선상에서 제외했는데…… 오늘 대장님의 말씀을 들으니 생각나는 게 있어서 말입니다.”
“답답하네. 시원하게 말해 봐.”
“남 대인이 겉으로는 점잖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소문이 안 좋습니다. 계집종과 즐기다가 임신을 하니 밖에다 팔아 버렸다는 이야기도 있고, 홍등가에서는 큰손으로 유명하답니다.”
“남공진에게 그런 소문이 있어?”
“네. 보통 남 대인 정도 되면 첩도 여럿 거느리는 게 일반적인데 서 부인 때문에 감히 생각도 못 하니 몰래 밖에서 해결하는 모양입니다.”
강진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럼 정 포두의 말은, 그 반지는 지금…….”
“네, 아마 기녀, 그것도 남공진이 서 부인의 반지를 훔쳐 줄 정도로 유명한 기녀의 손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돈을 밝히긴 했지만, 그것만 빼면 아주 훌륭한 수사관인 정 포두였다. 거기에 그의 가설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럼 당장 기루를 수색해야겠군.”
강진의 말에 정 포두가 급히 말했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런 일을 하면 원성이 자자할 겁니다. 거기에서 밥 빌어먹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니까요.”
“그럼 일단 남공진에게 사람을 붙이면?”
“포도청에서 미행한다는 사실을 알면 서 부인이 가만히 있을까요? 체면을 목숨처럼 여기는 사람들인데……. 그렇게 되면 포도청이 정말 시끄러울 겁니다.”
강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 총관이 서수현에게 반지를 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이미 그녀와 부딪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대인이 되고 싶지만 가문에 피해를 줘서는 안 되지.’
이기적이었지만 현명하기도 했다.
애초에 자신의 힘은 포도대장이라는 것보다 이가장의 후계자라는 배경이 더 크게 작용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배경이 흔들리면 엄청난 손해다.
‘그럼…….’
부딪치더라도 확실한 물증이 있어야 했다. 아니, 남공진의 호색질을 알면 이 일에서 빠질 확률도 있었다.
“무슨 소린지 알았어. 정 포두도 그럼 일단 입 다물고 있어. 생각 좀 해 볼 테니.”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절대 외부로 알릴 생각이 없었고, 오히려 강진의 그 말이 너무 고마운 정 포두였다.
* * *
철권(鐵拳) 송두이.
철권이라는 거창한 별호를 가지고 있는 송두이는 신의현 뒷골목에서 주먹 좀 쓰는 왈패였다.
사실 철권이라는 별호도 스스로 붙이고 자신을 알릴 때 꼭 붙여 말하는 바람에, 신의현 왈패들 사이에서나 알고 있는 별호였다.
그래도 나름 무관에서 제대로 무공을 익혀서 신의현 왈패들 중에서는 다섯 손가락 내에 드는 실력자였다.
그는 철권파라는 조직을 만들었지만 조직원의 숫자는 고작 스물이 채 안 돼, 신의현 제일의 대방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작은 조직이었다.
그나마도 신임 포도대장이 임관한 후 사업장을 하나둘씩 잃어, 있던 조직원들마저도 하나 둘 집으로 내려가 이제 남은 조직원의 숫자는 열하나뿐이었다.
‘에효! 크지도 않은 밥그릇에 숟가락 꽂는 넘은 왜 이리 많냐.’
포졸들의 서슬 퍼런 협박 때문에 노점과 작은 객잔에서 걷을 수 있는 보호비도 반 토막이 났다. 그래도 버틸 수는 있지만 다른 조직들이 그마저도 노리고 있는 형편.
이대로 반년만 더 가면 철권파는 그대로 와해될 판이었지만, 송두이로서는 이 상황을 타파할 만한 뾰족한 수가 없었다.
덜컥.
그때 조직의 본부인 작은 방앗간의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얼마나 수금됐어?”
보호비를 걷으러 갔던 수하가 들어온 줄 알고 송두이가 고개를 돌려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빠바바박!
순간 눈에서 별이 보이고 방앗간 천장이 노랗게 물드는 것 같았다.
‘기습이다!’
그래도 흑사회에서 잔뼈가 굵은 송두이였다.
그는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도 바닥으로 몸을 날려 굴렀다. 다행히 칼을 맞은 건 아니니 살길이 열리길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구른 보람도 없이, 송두이는 뒷덜미를 잡혀 허공에 붕 떴다.
“살려 주십시오!”
체면이고 뭐고 곧바로 애원하는 송두이였다.
“왈패라면 깡이라도 있어야지, 이게 뭐냐? 정 포두, 이놈 정말 쓸 만한 거 맞아?”
들리는 말에 송두이가 조심스레 눈을 뜨니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자신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포두 나리, 요새 정말 착하게 살고 있습니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작년까지 착실하게 상납을 해 온 정 포두가 자기를 잡으러 왔구나 싶자 송두이의 눈에서 절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정 포두는 다급히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하고는 강진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쓸 만한 녀석입니다. 왈패이긴 하지만 노약자에게는 절대 손을 대지 않고 의리도 있어, 그쪽 세계에서는 제법 평판도 좋고요.”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송두이를 번쩍 들어 올렸던 손을 풀어 주며 강진이 말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