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ministrator Kang Jin Lee RAW novel - Chapter (62)
관존 이강진 (62)
“분수를 알자, 분수를.”
신의현으로 돌아가는 마차에서 곽노는 염불을 외듯이 똑같은 말만 계속 반복했다.
하지만 눈만 감으면 아름다운 여인들이 호호거리며 자신에게 술 따르던 모습이 떠올랐다.
“노망난 게지, 노망이 났어. 내 나이가 몇인데. 아니, 곧 혼인할 이 씨를 두고.”
사실 좋긴 좋았다.
생전 보지 못했던 미녀들을 광인루에서 다 구경했다.
전장에서 부르던 군가(軍歌)나 알았지, 언제 미녀들이 부르는 연가(戀歌)를 들어 보았겠는가?
하지만 처음 들어 보는 그 연가들은 절로 눈이 감길 정도로 듣기 좋았다.
먹는 것도 그랬다.
이가장의 음식도 좋았지만 광인루에서 나온 것들은 이름조차 모르는 것들이 수두룩했고, 술까지 좋으니 단 사흘 만에 살이 찐 것을 몸으로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곽노는 이 모든 게 며칠 동안 잘 꾼 꿈이라 마음먹기로 했다. 그런 곳에 맛들이면 행복하다고 여겼던 지금의 생활이 불만족스러워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곽노는 현명했기에 강진에게 이 씨 핑계를 대며 먼저 돌아와 버린 것이다.
‘잘난 제자 둔 덕에 경험해 봤으면 충분한 거지. 정 생각나면 환갑 때나 다시 한 번 부탁해 보고.’
잘한 결정이라 생각했지만 여전히 아쉬운 것도 사실이기에, 곽노는 계속 분수를 알자고 되뇌며 이가장으로 돌아왔다.
“어르신 돌아오셨습니까?”
마차가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정 총관이 마차 문을 열어 주며 맞이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장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장주께서?”
곽노는 깜짝 놀라 옷차림을 살피며 말했다.
“옷 갈아입고 가겠네. 장주께 잠시만 기다려 주십사 전해 주게.”
“네, 얼른 오십시오.”
정 총관이 사라지자 곽노는 급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으며 생각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곽노는 강진이와 광인루에 갔다는 사실이 괜히 마음에 걸려 급히 이제원의 방을 찾았다.
“이 장주, 계십니까?”
“들어오십시오.”
이제원의 목소리에 곽노가 방에 들어가니 손님은 자신 말고 한 명이 더 있었다.
“어르신.”
“아! 칠덕네도 와 있었구먼.”
칠덕네를 보며 곽노는 짚이는 게 있었다.
‘혼사 때문이로구나.’
곽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 앉자, 과연 이제원이 강진의 혼사 이야기를 꺼냈다.
“칠덕네와 곽 노사를 이리 모신 이유는 강진의 혼사 때문입니다. 혼인을 서둘렀으나 벌써 이 년 가까이 아무런 진척도 없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칠덕네가 급히 말했다.
“장주님, 쇤네가 근방은 물론이고 광동성에서 참한 색시들을 모두 찾아보았지만 도련님이 그때마다 한사코 싫다면서 만나 보지도 않으니 어려움이 많습니다.”
“내가 말했는데도 그리 싫다고 하던가?”
“장주님이 집에 계실 때는 억지로 만나는 시늉이라도 했지만 근래 들어 집을 계속 비우시니…….”
“내 탓이군.”
“그런 뜻으로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쇤네 혼자로는 도련님의 고집을 꺾기가 힘들다는 뜻으로…….”
칠덕네는 이제원의 눈치를 보다 갑자기 곽노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나마 도련님이 노사의 말은 듣는 척이라도 하니 노사께서 도와주시면 좋은데, 노사께서도 관심이 없으셔서 쇤네 혼자로는 힘듭니다.”
갑자기 화살이 자신에게 돌아오자 곽노가 말했다.
“내 많이 도와주지 않았는가? 칠덕네가 그리 말하면 내가 섭섭하지.”
“도련님을 억지로 잡아서라도 데리고 나오셔야죠. 그냥 말만 하지 않으십니까?”
“강진이가 어디 어린애인가? 거기다가 포도대장이네. 이 늙은이가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 누가 보면 강진이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곽노와 칠덕네가 책임을 서로 떠밀자 이제원이 짧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아! 그만하시지요. 강진의 나이가 약관이 넘었으니 혼인을 서둘러야 합니다. 지금은 그 이야기만 하도록 하지요. 곽 노사.”
“말씀하십시오.”
“듣자 하니 곽 노사와 강진이가 이번에 광인루에 갔다고 하던데…… 혹시 녀석이 그곳에 정인이라도 둔 겁니까?”
광인루라는 말에 칠덕네의 눈빛이 번뜩이더니 매섭게 곽노를 쏘아보았다.
곽노의 처가 될 이 씨를 바로 칠덕네가 소개시켜 준 데다 이제 조만간 혼인식을 올릴 터인데 기루에 갔다고 하니 매섭게 보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아! 그런 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여자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으니…….”
“그런데 갑자기 그곳엔 왜?”
“강진이 녀석 말로는 공무 중이라고 하던데…… 제 보기에는 그냥 경험 삼아 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포도청 누군가가 남자라면 한번 가 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 것일지도 모르고……. 아시다시피 강진이가 호기심은 무척 많은 아이이니 만큼…….”
이제원은 잠시 곽노를 지켜보다 말했다.
“노사가 저보다 강진이를 더 잘 아니 솔직히 말씀해 보십시오. 강진이가 왜 혼인을 치르지 않으려는지 말입니다.”
“그게…….”
곽노는 곤란한 듯이 말끝을 흐렸다.
확실히 강진은 혼인을 기피하고 있었고, 곽노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곽노가 슬쩍 칠덕네를 보자 이제원이 말했다.
“칠덕네는 잠시 나가 있게. 노사와 이야기할 것이 있으니.”
“네, 장주님.”
칠덕네가 방 밖으로 나가자 이제원이 물었다.
“말씀해 보시지요. 이유를 알고 계시지요?”
“그게 말입니다…… 두려워하고 있더군요.”
“뭘 두려워한단 말입니까?”
“하아! 예전에 왜 혼인을 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장가 안 가요.”
“왜? 그 좋은 걸. 이 사부가 너 정도의 배경과 능력만 있었다면 가도 벌써 갔을 거다.”
“장가를 가면 거시기를 할 거고, 그럼 아이가 태어나잖아요.”
“그건 당연한 거지.”
“그런데 그 아이가 저 같으면 어떡해요?”
강진의 대답에 곽노는 순간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그게 무슨 뜻이냐?”
“알고 계시잖아요, 무슨 뜻인지.”
“야! 그래도…….”
“사부도 할 말 없으시죠?”
곽노는 정신을 수습하고는 말했다.
“할 말 많다. 그게 뭐가 문제냐? 아니, 네 아이가 꼭 너 같으리란 법이라도 있냐?”
“아니라는 법 있어요?”
“…….”
“아들은 아버지를 닮는 법이에요. 아마 높은 확률로 저 같은 아이가 태어날 거예요.”
“그럼 가르치면 되는 거지. 너도 배우지 않았느냐?”
강진은 갑자기 곽노를 뚫어지게 보며 말했다.
“사부는 그게 얼마나 힘든 건지 모르시니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많이 힘드냐?”
“무지하게 힘들어요. 매일매일이 전쟁이에요. 왜 제가 포도청 일에 매달리는지 아세요? 순간순간 떠오르는 괴물 같은 생각을 피하기 위해서예요.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실처럼 팽팽하게 싸운다고요. 매일매일! 말이에요.”
“나한테 이야기하지 그랬냐…… 그럼 좀 낫잖냐?”
“낫죠. 그래서 항상 사부에게 감사해요. 그리고 항상 제가 운이 좋다고 생각해요. 사부를 만났으니까. 하지만 내 아이는요? 그렇게 운이 좋을까요?”
“네가 가르치면 되잖냐!”
“제가 제 아이를 사부처럼 가르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곽노는 할 말을 잃었다.
“사부가 예전에 저한테 두려움을 가르친다고 무덤에도 보내고 밀실에서도 자게 했죠? 하지만 저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두려움이라는 게 뭔지 몰랐죠. 하지만 아버님이 혼인을 서두르고 저도 막연히 장가를 가겠구나 하는 순간 깨달았어요. 두려움이라는 게 뭔지 말이에요.”
곽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뭔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할 말이 없었다.
한참 후에야 간신히 곽노가 물었다.
“그럼 평생을 그리 혼자 살 생각이냐?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어.”
“알아요. 하지만 재촉하지 마세요. 저도 사람이고 남자인데 장가 안 가고 싶겠어요? 하지만 이렇게는 아니에요. 기다려야죠.”
“뭘 말이냐?”
“여자를요. 아, 정말 이 여자라면 내 모든 것을 보이고 한평생 같이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여자를요.”
곽노는 은근슬쩍 이제원을 보았다. 그의 표정은 자신이 뒤통수를 망치로 맞았을 때와 똑같았다.
곽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해 봤지만 녀석을 이길 방법이 생각이 안 나니 어떡하겠습니까? 일단 기다렸다가 기회를 봐서 밀어붙여야지요. 혼인이 어디 사랑만으로 하는 겁니까? 정이란 건 매일 살 비비고 살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녀석은 아이를 걱정한다지만, 오히려 아이가 태어나면 확 바뀔지도 모르지요. 녀석이 그런 쪽으로는 남들보다 더 따지니까요.”
한참 후에야 이제원이 입을 열었다.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해야지요. 녀석의 말대로 하면 저는 사손도 못 보고 죽을 텐데요.”
“이야기해 보십시오, 생각해 두신 게 있는 것 같은데.”
곽노가 걱정스레 말했다.
“기분이 나쁘실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도 장주와 진작 상의하지 못했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기분이 나쁠 거였다면 애초에 노사를 제 집에 들이지도 않았을 테니.”
틀린 말이 아니었지만 곽노는 여전히 조심스럽게 말했다.
“조건을 만들고 찾아야지요. 그리고 찾으면 장주가 강제로 혼인시키시고. 녀석, 아직 장주의 말이라면 꼼짝 못하니 너무 늦어서도 안 되겠지요.”
이제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곽노가 계속해 말했다.
“녀석의 처가 될 사람은 일단 똑똑해야 합니다. 강진보다 똑똑한 여자를 찾긴 힘들겠지만, 그래도 남들보다는 훨씬 똑똑해야 합니다.”
“공감합니다.”
“두 번째로는, 집안이 어려운 여자라면 좋겠지요. 처 될 아이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일단은 무조건 강진을 감싸 안아 줘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하니까요. 물론 장주나 내가 여러 가지로 신경은 써야겠지요. 아까 말했다시피, 최소한 정이 생길 때까지는 말입니다.”
이제원은 작게 말했다.
“많이 생각하셨군요.”
“장주의 하나뿐인 아들이지만, 저에게도 강진은 아들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십 년입니다, 녀석에게 정 붙인 세월이 말입니다.”
“그렇지요…….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고맙지요. 애초에 아무것도 없던 저를 믿어 주시고 이렇게 대우를 해 주셨으니.”
이제원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다른 조건은 없습니까?”
“예뻐야겠지요. 예쁜 여자 싫어하는 남자는 없을 테니. 농담 아닙니다. 강진이 녀석, 은근히 그런 쪽으로 밝힙니다. 자기와 어울리려면 당연히 예뻐야 한다고 몇 번 이야기했으니까요. 이 모든 조건을 갖춘 여인이 많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찾아야겠지요. 하나밖에 없다면 그 하나를 찾아야 할 테고. 알겠습니다. 그만 나가 보셔도 됩니다.”
곽노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이제원의 방을 나섰다. 하지만 밖에는 또 다른 걱정거리가 있었다.
“기루에 다녀오셨다고요?”
무서운 눈을 하며 추궁하는 칠덕네를 보고 곽노는 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칠덕네, 그게,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은데…….”
“오해라니요? 마부 상 씨에게 지금 확인까지 하고 왔는데! 다 늙어서…… 아니, 그보다 곧 혼인할 여자까지 있는데 기루에 다녀오셨단 말이지요?”
“오해야, 오해. 강진이 녀석이 갑자기 와서 나를 끌고 가다시피 데려갔단 말이야.”
“도련님이 뭐가 아쉽다고 노사를 데리고 기루에 갑니까?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 됩니까?”
“말이 안 되지. 하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쩌겠나. 게다가, 보게, 나 먼저 돌아왔어. 강진이 녀석이 더 있다 가라는 걸 뿌리치고 나왔단 말일세.”
“우리 도련님은 그런 곳은 모르는 착한 사람이었는데. 애초에 기루에 가자고 꼬드긴 게 노사 아니에요?”
“아니야. 아, 정말 억울하게 왜 그러는가? 정말 강진이가 날 억지로 끌고 간 거라니까!”
“그게 말이 되냐고요? 도련님이 뭣 때문에요!”
“그게…….”
곽노는 잠시 말을 더듬다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공무였다네, 공무! 나는 강진이의 공무를 도와주러 간 거야!”
“지나가던 지렁이도 웃다가 배 터질 소리를 하시네요. 두고 보세요, 내 이 씨에게 다 이야기할 테니.”
“칠덕네!”
곽노는 횅하니 가 버리는 칠덕네를 허겁지겁 쫓아가야 했다.
* * *
진작 생각해야 했다.
자식이 그러한 두려움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을 진작 했어야 했다.
자신도 그러했고, 강진처럼 그런 여인이 나타나기만을 바랐다. 그리고 만났다.
그래서 강진을 낳았고, 남들처럼 그렇게 행복하게 살 거라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당신이 그렇게 가는 바람에 그 두려움을 온몸으로 부딪치는구려.’
이제원의 몸에서 갑자기 바람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바람은 무척 사나워 지나치는 모든 것을 조각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소란스럽지는 않았다.
마치 불에 타오르는 종이처럼 그대로 가루가 될 뿐이었다.
“주인어른!”
어느 순간이 되자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정 총관이 소리치며 들어왔다. 그러나 그 사나운 기세에 손을 올려 얼굴을 보호해야 했다.
“주인어른!”
정 총관이 다시 한 번 소리치자 바람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는 방 안에는 이제원만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주인어른?”
“됐다. 치워라.”
정 총관은 자신을 지나쳐 나가는 이제원을 불렀다.
“주인어른, 어디를…….”
하지만 이제원은 대답하지 않고 사라질 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어째 곽 영감하고 이야기만 하면 이 사달이 나는지?’
정 총관은 애꿎은 곽노를 원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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