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ministrator Kang Jin Lee RAW novel - Chapter (76)
관존 이강진 (76)
수습
곽노는 울음을 멈췄다.
울음을 멈추고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순식간에 정신이 맑아졌다.
‘내가 수습해야 해!’
곽노는 주변을 살폈다.
피로 물든 시체가 장악한 공간.
그것에 익숙하지 않았다면 그리 빠른 판단을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여전히 겁에 질려 입만 벙긋거리는 여자들과 아이들을 보며 곽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불행 중 다행이다. 저들은 죽이지 않았어!’
그가 생각하는 대로 풀어 나가기 위해서는 그들이 살았다는 사실이 아주 중요했다.
‘그런데 저 사람은 누구지? 강진이를 막은 걸 보면 고수일 텐데.’
곽노는 쓰러진 복면인을 보며 생각했다.
광동제일의 흑사회라 하지만 강진의 적수는 없었을 것이다. 있다면 그건 흑사회 조직이 아닌 무림 문파일 터.
“어르신!”
정 총관이 달려오자 곽노는 급히 말했다.
“일단 이곳을 정리하게. 시체는 깨끗이 닦아 한곳에 모으고, 피를 모두 없애.”
“어르신,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
“일단 그리하게. 강진의 앞날이 달린 일이야.”
정 총관은 강진을 돌볼 새도 없이 곽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움직였다.
정 총관이 사라지자 곽노는 아직도 멍해 있는 강진에게 다가갔다.
“강진아.”
“…….”
“이놈아! 뭘 잘했다고 그렇게 있어. 정신 안 차리냐!”
곽노의 호통에도 강진은 멍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이놈아, 그런 모습을 하려면 뭐하러 이런 짓을 했어. 현명하게 선택한다면서!”
강진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사부, 제가 잘못한 거지요? 나 괴물 맞는 거지요?”
곽노는 강진의 두 뺨에 손을 대어 자신을 향하게 하고는 말했다.
“아직 모르지.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지 이 사부가 알아야지.”
“그래야 했어요…… 그래야 했어요, 이놈들은…….”
강진은 시체를 보았다.
一. 나는 그들을 죽였다.
二. 하지만 난 괴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를 죽이려 했기 때문이다.
三. 남을 죽이려 했으면 자기도 죽을 각오를 해야지. 그게 세상 이치가 아닌가?
四. 그러니까 난 잘못한 것이 없다.
五. 맞아. 내가 잘못한 것은 없다.
본능적으로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강진에게 곽노의 일갈이 날아들었다.
“이 상황에서도 변명이냐? 네가 이 사람들을 죽였다. 그게 사실이야.”
“이놈들은 죽여야…….”
“죽이지만 말라고 하지 않았더냐? 이 사부가 분명 그렇게 부탁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넌 그리하겠다고 했다!”
“…….”
“그리고 죽여야 할 놈들이라면 모두 잡아서 포도청에서 법대로, 제대로, 그리 처리했어야지. 그리하겠다 해서 그리 열심이지 않았느냐!”
“그럼 역시 제가 잘못된 거로군요.”
곽노는 강진의 얼굴을 흔들더니 말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이 일부터 처리하고.”
곽노는 강진의 얼굴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난 믿는다. 이 사부는 너를 믿어!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이리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단지 믿는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순간 강진은 가슴 한편의 꽉 막힌 뭔가가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먼저 가 있거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포도청에 나가야 한다.”
“어쩌시려고요?”
“일단 사부 말 듣거라. 나중에 다 이야기해 줄 터이니.”
의아스러워하면서도 강진이 더 묻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자, 곽노는 크게 호흡을 토해 냈다.
“하아!”
그리고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좋지 못한 것들을 보았네. 누가 연장자이신가?”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자 곽노는 목소리를 조금 더 높이며 말했다.
“처리해야 할 거 아닌가? 자네들도 여기가 어딘지는 잘 알고 있지 않나? 흑사회라면서? 바깥양반들이 그리됐는데 자네들은 어찌 될 것 같나?”
여인들의 눈에 새로운 공포가 어렸다.
뒷골목은 약육강식이고 승자가 모든 걸 차지한다. 자신들도 어딘가로 팔려 가게 될지 모른다. 아니, 그 전에 일반 사람들에게 먼저 죽을지도 모른다.
혈붕파는 그리 좋은 조직은 아니었다. 염왕채는 물론이고 인신매매와 약까지, 돈이 되는 거라면 가리지 않았기에 이를 가는 사람들이 많다.
“저희가 어찌해야 되는지요?”
여인들 중 가장 젊고 색기가 흐르는 여인 하나가 입을 열었다. 혈붕파의 우두머리였던 구수근의 애첩 소향이었다.
곽노가 그녀를 보며 말했다.
“자네들은 운이 참 좋네.”
“무슨 뜻이신지요?”
“말 그대로 운이 좋다는 뜻이네. 여기를 이렇게 만든 자들은 자네들의 예상처럼 다른 흑사회 조직이 아니니까.”
“…….”
아직 정리가 되지 않은 듯 여인들이 서로의 눈치만 살피자 곽노가 말을 이었다.
“관군이라네. 그리고 이곳까지 들어와 이 난리를 친 사람은 바로 그 관군을 이끌던 포도대장이고.”
“말도 안 돼!”
소향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광동제일의 혈붕파라 하더라도 멋대로 날뛰지 않았다. 그런 조직이었다면 애초에 광동제일의 조직이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소향은 혈붕파 수입의 삼 할이 관으로 흘러들어 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만큼 신경을 쓰는데 관군이 이리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진짜 관군이라고 하더라도, 구수근은 별호까지 가지고 있는 무림인이었다. 광동에서 구룡무관의 사람들이 아니라면 그를 어찌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그래서 구수근은 광동에서 구룡무관의 영역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고, 나아가 무림인들과 엮일 수 있는 모든 일을 피했다. 그래서 광동제일의 조직이 된 것인데 관군이라 하니 황당하기까지 했다.
곽노는 소향에게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주고는 말했다.
“아네. 하지만 자네도 들어 봤을지도 몰라. 신의현 포도대장은 불의를 절대 참지 못한다고.”
“그럼…….”
“맞아. 방금 전 자네들이 본 사람이 바로 신의현 포도대장이야. 그리고 이제는 알겠지만, 여기 사람들은 그저 손가락으로도 죽일 수 있는 무림인이기도 하지.”
소향은 물론이고 다른 여인들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하는 모습을 곽노는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미안하지만 겁을 좀 먹어 줘야겠네.’
곽노는 잠시 후 다시 말했다.
“하지만 그래서 다행이야. 그는 불의를 참지 못하지만, 불쌍한 사람도 그냥 보지는 못해. 자네들은 어떠한 죄도 짓지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어떻게 보면 저희도 피해자입니다. 강제로 끌려와 살게 되었으니까요.”
“바로 그거라네. 그래서 자네는 무사한 거라네. 겁먹지 않아도 돼.”
지옥에서 내려온 동아줄이다. 지푸라기라도 잡을 판에 튼튼해 보이는 그런 줄.
일행 중 가장 머리가 잘 돌아가는 소향은 그걸 깨달았다.
눈앞의 노인에게 뭔가 다른 목적이 있음도 알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단 살아야 했다.
“어르신, 모두 여자들과 아이들뿐입니다. 저희가 어찌해야 하는지 알려 주세요.”
소향이 곽노의 앞에서 연거푸 절을 하며 말하자, 눈치 빠른 몇몇 여인들도 급히 그에게 다가와 절을 하기 시작했다.
곽노는 그녀들을 일으키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말귀를 알아들어서 다행이네. 사실 이곳의 누군가가 신의현에 넘어와 아주 안 좋은 짓을 한 모양이야. 그것 때문에 녀석이 눈이 뒤집어져서 이렇게 난리를 친 것이고. 이게 사건의 시작이네.”
“…….”
“하지만 손 속이 좀 과했지……. 그냥 추포를 당하면 됐는데 그러지 않은 거지. 자네들도 알겠지? 이놈들이 그냥 얌전히 체포당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걸 말이네.”
“물론입니다. 그러지 않았을 겁니다.”
“똑똑한 사람이로구먼. 맞아, 그러지 않은 거야.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손 속이 너무 과했어. 그래도 법에 따라서 추포를 해 와서 법에 따라 처형했어야 했는데 말이지.”
소향은 조심스러운 눈으로 곽노의 입을 보았다. 그다음 말이 중요하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자네들이 입을 맞춰 줘야겠네.”
“말씀만 하십시오. 저희는 어르신이 하라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럼 좋지. 아주 좋아. 제대로만 처리하면 이곳의 원수들이 자네들을 건드리지 못하게 해 주지. 그것만이 아니라 모두 먹고살 길을 마련해 주겠네.”
“감사합니다, 어르신.”
“이곳의 포도청에서 사건을 조사하러 나오면 자네들은 이렇게 말해야 되네. 정체를 알 수 없는 복면인들이 이곳을 습격했다고. 자네들은 비밀 장소에 피해 있다가 나와 보니 이렇게 되어 있었다고 말이네.”
“어르신, 그렇게만 하면 됩니까?”
“그렇게만 하면 되네. 이곳에 적들이 많을 테니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지 않겠는가?”
“매일 칼부림이 일어나는 곳이니 조금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곽노는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순간 정색을 하며 말했다.
“자네들 중 한 명이라도 이상한 말을 하면 자네들의 안전을 보장해 줄 수가 없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좋아. 그럼 노부는 자네들이 그렇게 해 줄 거라 알고 있겠네.”
소향이 급히 물었다.
“어르신, 그럼 지금 저희는…….”
“걱정하지 말게. 곧 관아에서 몰려나올 테니 조사를 받을 때까지만 참게. 관의 조사가 끝나면 누군가 와서 자네들을 보호해 주고 먹고살 길을 줄 걸세.”
“하지만…… 무슨 약속이라도…….”
곽노는 소향을 보며 겁을 줘야 할 필요를 느꼈다.
말귀를 알아듣는 건 좋지만, 나중에라도 이걸 빌미 삼아 강진의 앞길을 망칠지도 모른다.
곽노는 옛날 전장에서만 보여 왔던 그런 표정을 하며 말했다.
“그럼 그냥 죽게. 자네들이 이곳에서 다 죽어도 아무도 의심할 사람이 없을 테니. 흑사회에서 서로의 조직을 습격해 사람을 죽였는데 그 이상 뭐를 조사하는가? 그리 사람을 믿지 못한다면 노부로서도 더 할 말이 없지. 부디 잘 살아남아 보시게.”
곽노가 홱 몸을 돌리자 소향이 기겁을 하고 그의 다리를 움켜잡으며 소리쳤다.
“어르신,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년이 멍청해서 그만 실언을 하고 말았습니다. 제발 살길을 열어 주세요.”
곽노는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쯧, 이제는 내가 못 믿겠네. 자네들이나 아이들이 불쌍해서 살길을 열어 주려고 했던 것인데.”
짝, 짝.
소향은 자신의 입술을 소리 내어 치며 말했다.
“이년이 잘못했습니다. 이년의 이 입이 잘못했습니다, 어르신. 그러니 제발 살려 주십시오.”
“에효.”
그제야 곽노는 다시 몸을 돌리고 소향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말했다.
“그러니 말을 하기 전에는 잘 생각하게. 노부가 뭔 이익이 있다고 자네들을 위해 힘을 쓸지를 말이네.”
“네네. 이년, 이제부터 어르신을 평생 은인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내 이미 자네들을 돕겠다고 마음먹었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아까 내가 한 말대로만 하게. 좀 미심쩍긴 하겠지만, 자네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면 관아에서도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네. 맞습니다, 어르신.”
“그럼 노부는 그리 알고 있겠네. 아이들 입단속시키는 것도 잊지 말고.”
“네, 어르신.”
곽노는 다시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조금만 참게. 십여 일 정도 지나면 예전 생활보다 훨씬 나아질 테니.”
곽노는 연신 절을 하는 여인들을 뒤로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동이 터 오고 있었다.
“하아, 일단 이걸로 마무리될 테고……. 이 녀석에게는 뭐라 말을 해야 하나…….”
곽노에게는 싸늘한 아침 공기가 꼭 자신의 마음의 온도 같았다.
* * *
광동 흑사회에서 지각변동이라고 표현할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광동 최고의 돈줄인 광주의 주인이 사라진 것이다.
고만고만한 조직들이 서로 광동을 먹겠다고 설치고 다녔고, 그 탓에 광주 포도청은 바빠졌다.
덕분에 혈붕파 몰살에 대한 조사는 급히 마무리되어 갔다.
사실 특별히 조사할 것도 없었다.
생존자들은 하나같이 다른 조직으로 보이는 복면인들이 몰려와 습격을 했다고 했고, 흑사회 조직들이 서로 죽이겠다고 싸우는 것이 어제오늘 일도 아니었니까.
혈붕파 몰살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