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ministrator Kang Jin Lee RAW novel - Chapter (8)
관존 이강진 (8)
‘휴!’
전인문은 학생들 앞에서 망신당했다는 생각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강진의 옆에 앉아 있는 서문우람을 보았다.
야차처럼 일그러졌던 표정이 어느 정도 풀리더니 어느새 미소까지 지으며 물었다.
“우람이, 네가 이야기해 보렴.”
강진보다 주먹 하나 정도 더 커 보이는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불왈여지하여지하자, 오말여지하야이의. 어떻게 할지를 걱정조차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나도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 바로 그것이다.”
전인문은 흐뭇하게 웃어 보이다, 강진을 뚫어지게 보며 말을 이었다.
“스스로 어떻게 할지를 걱정조차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방법이 없지. 여기 있는 누구처럼 말이다.”
“하하하하!”
전인문의 말에 학당 안의 학생들이 크게 웃었다. 하지만 강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마주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걱정할 게 있어야 하는데 걱정할 게 없으니 전혀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고 말입니다.”
전인문은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쯧, 저렇게 스스로 걱정하지 않으니 나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살다 보면 생기지 않겠습니까? 이제 아홉 살인 제가 그걸 한번에 이해하는 게 더 이상한 법 아니겠습니까?”
강진의 대답에 전인문이 물었다.
“이해하지 못하니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이곳에 와서 공부를 하는 게 아니겠느냐?”
“스승님께서 학문이란 평생을 배워야 하는 것이니 절대 조급해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제자가 이해를 못 했다고 나무라시니, 어느 말씀을 따라야 할까요?”
강진의 물음에 전인문은 순간 말이 막혔다. 그러다 뭐라 말하려는 순간 강진이 재빠르게 말했다.
“물론 스승님의 뜻은 제자가 잘 알고 있으나, 사람의 성취도가 다 다른 법이니 사부께서는 조급해하지 마시고 제자를 느긋하게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뺨 때리고 얼른다고, 강진이 하는 모습이 딱 그 꼴이었지만 전인문은 아무 말 하지 못했다. 더 이상 말해 봤자 자신의 모양새만 우습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악몽 같은 수업이 끝나자 전인문은 아이들의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급히 자리를 떴다.
“에효,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지금도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데 말년에 이 무슨 망신이란 말이냐. 내 이리 박복한 사내였단 말인가.”
한숨을 푹푹 쉬며 거처로 가는 전인문을 누군가가 불렀다.
“노사.”
고개를 돌려 보니 말끔한 차림의 한 노인이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누구시오?”
“안녕하십니까? 저는 곽노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전인문이라 하오.”
“전 노사셨군요. 이리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무슨 일 때문에 나를 찾으셨소?”
곽노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자 녀석이 전 노사께 학문을 배운다기에 호기심이 생겨 이리 찾아뵈었습니다.”
“제자요?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강진이 제가 가르치는 녀석입니다.”
곽노의 대답에 전인문의 인상이 확 일그러졌다.
“강진이가 저 말고 곽 노사에게도 배운단 말입니까?”
곽노는 급히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노사라니요. 전 제 이름 석 자만 간신히 쓰는 일개 무부일 뿐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강진이는 저에게 몸을 단련하는 법을 배울 뿐입니다.”
그제야 어느 정도 표정이 풀린 전인문은 곽노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네. 사실 스승이라는 것도 거창하고, 이가장의 식객인데 공밥 먹기에는 좀 그렇고…… 이런저런 이유로 그리되었습니다.”
“그러시군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를 뻔했으나 곽노가 재빨리 침묵을 깼다.
“녀석이 아주 속을 썩이지 않습니까?”
“주의가 산만한 편이긴 합니다.”
전인문의 점잖은 대답에 곽노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녀석이 전 노사께는 꼼짝도 못하나 보군요. 저와 있을 때는 뺀질뺀질해서 아주 골치가 아픈데 말입니다.”
“그게…….”
“제가 노사께 배워야겠군요. 어떻게 녀석을 그리 꽉 잡으셨습니까?”
“아뇨, 아뇨. 곽…….”
“그냥 편하게 부르십시오. 제가 노사보다 몇 살 아래인 것 같으니 말입니다.”
“초면에 그럴 수야…….”
“아닙니다. 저야 노사 같은 훌륭한 형님이 있다면 가문의 영광이지요. 편안하게 불러 주십시오.”
곽노가 사람 좋은 얼굴로 계속 권하자 전인문은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싶은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고 곽노는 생각했다.
‘꼬장꼬장하기는. 강진이랑은 절대 안 맞을 성격이로세. 그러니 어쩌나, 내가 해결해야지.’
하지만 곽노는 속생각과는 달리 전인문을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이다.
* * *
곽노가 꼬박 전인문을 찾은 지 보름.
전인문은 계속 찾아오는 곽노가 조금은 귀찮았지만, 꾸준히 존경의 눈빛으로 자신을 찾아오는 데다 그가 다른 촌부들과는 달리 세상 물정도 알고 성격 역시 진지한 것 같아 매정하게 대할 수 없었다.
“그럼 앞으로 곽 노제라 부르겠네.”
그리고 결국 곽노를 동생이라 부르자 곽노는 씩 웃으며 그에게 크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렇게 불러 주십시오, 형님.”
“그냥 노사라 부르게. 평생 들어 보지 못했던 호칭이라 어색하구먼.”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 노사.”
“그래. 척 보니 곽 노제가 강진이 녀석 때문에 골머리를 썩나 보구먼.”
“이를 말씀입니까? 녀석이 얼마나 주의가 산만한지, 뭐 하나 가르치려면 아주 머리가 지끈지끈합니다. 노사께서는 전혀 안 그러십니까?”
곽노에 대한 의심이 조금쯤은 풀렸는지 전인문도 속내를 조금 털어놓았다.
“나도 마찬가지라네. 총명한 데 비해 끈기가 너무 없어. 학업에는 아예 흥미가 없는 듯하이.”
“그렇죠? 그것만이라면 좋은데, 어찌나 그리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는지. 이가장의 식객이니 참고 있지, 마음 같아서는 그냥 확 쥐어박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자네도 그런가!’
전인문은 동병상련의 처지의 사람을 만나 너무 반가운 나머지 그만 마음속의 말을 그대로 내뱉을 뻔했다. 하지만 이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흠, 녀석이 매를 부르는 성격이긴 하지. 나도 마음공부 열심히 하고 있다네.”
“그나마 요새는 녀석을 어찌 요리해야 하는지 요령이 생겨, 군말 않고 배우고는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도 얼마 가지 않을 테니 다른 방법도 계속 연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강진이가 노제의 말을 잘 따른단 말인가?”
“잘 따른다기보다는, 녀석의 성격을 좀 이용하는 것이지요.”
“노제가 잘 가르치는구먼.”
전인문의 감탄에 곽노는 슬쩍 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어디 노사께 비할 만하겠습니까.”
“아니야, 아니야. 네 창피하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하겠네. 녀석 때문에 내 체면이 말이 아니야. 호통도 치고 매도 들어 봤지만 도저히 말을 들어 먹질 않아.”
“그럼 감히 제가 노사께 몇 말씀 드려도 될까요?”
전인문은 반색하며 말했다.
“어디 한번 해 보게. 내 귀담아듣겠네.”
“일단 녀석에게 뭐라고 하지 마십시오. 매를 들지도 말고, 뭐라고 하지도 마셔야 합니다.”
“계속해 보게.”
“고 녀석이, 쥐뿔도 없는 게 자존심만 아주 셉니다. 그리고 경쟁심도 강하지요. 노사께서는 그걸 건드려야 합니다.”
“어떻게 말인가?”
“그러니까 말입니다…….”
곽노는 마치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듯이 주변을 살펴보고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 * *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
전인문은 논어의 글귀를 소리 내어 읽고는 세 제자를 보았다.
강진은 전인문과 눈을 마주치자 생각했다.
‘또 뭐라 하겠구나. 뭐라 답변할까?’
하지만 강진의 생각과는 달리 전인문은 그를 슥 보고는 고개를 돌려 왼쪽에 있는 서문우람을 보며 물었다.
“우람아, 이 글귀가 뜻하는 것이 무엇인고?”
전인문의 물음에 서문우람이 대답했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는 뜻입니다.”
착!
전인문은 옳다구나 하는 표정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쳐 보이며 서문우람을 칭찬했다.
“그렇지. 예습을 아주 잘해 왔구나.”
“아닙니다, 스승님.”
서문우람이 겸손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자 전인문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논어의 다른 글귀를 찾아 읽었다.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전인문이 다시 세 제자를 보았고 강진은 다시 대답을 준비하려고 할 때, 전인문은 강진의 오른쪽을 보며 물었다.
“이번에는 제문이가 대답해 볼까?”
전인문의 물음에 강진과 서문우람보다 두어 살 더 먹은 듯한 소년이 몇 번 글귀를 중얼거려 보고는 대답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쁠 거라는 말씀 같습니다.”
“맞다. 잘했구나.”
전인문이 다시 한 번 흐뭇하게 웃으며 다시 논어의 한 글귀를 말했다.
“유붕자원방래불역열호(有朋自遠方來不亦說乎).”
전인문의 시선이 다시 쏠렸고, 강진이 이번에야말로 자신에게 물어볼 거라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삐죽.
옆으로 돌아가는 전인문의 시선에 강진은 순간 벌떡 일어설 뻔했다.
분명히 보았던 것이다.
전인문이 자신을 무시했다면 좋아라 하고 넘어갔겠지만, 그는 자신을 무시한 것이 아니었다.
그 짧은 입꼬리의 흔들림.
그건 분명 비웃음이었고, 마치 네까짓 것이 이 뜻을 알겠느냐는 무언의 표시였다.
“스승님!”
강진은 참지 못하고 전인문을 불렀다.
“왜 그러느냐?”
다시 자신을 돌아보는 전인문의 표정을 보며 강진은 순간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전인문의 표정은 마치 자신을 너무나 사랑해서 어쩔 줄 모르던 할아버지와 똑같았다.
‘뭐지?’
순간 강진은 멍해졌다.
“왜 그러느냐?”
전인문이 다시 한 번 묻자 강진은 혼란에서 깨어나며 말했다.
“그게, 왜 저에게는 묻지 않으시는 건가요?”
강진의 질문에 전인문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반문했다.
“물으면 대답할 수 있겠느냐?”
“그건 아닙니다.”
“그래. 나도 그걸 알기에 묻지 않는 것이다. 네 능력 밖의 일인데 굳이 물을 필요가 있겠느냐?”
“능력 밖의 일이기에 배우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그런데 네 옆의 두 사람도 같이 배우는데 두 사람은 알고 너는 알지 못하니, 네 능력 밖의 일이지 않으냐?”
“하지만…….”
“다 알고 있단다. 내 네 능력도 모르고 그동안 너무 다그친 게 미안해지는구나. 앞으로는 네 능력 밖의 일은 묻지 않으마.”
전인문은 강진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다시 논어를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문우람과 제문에게는 간단하게 뜻풀이를 해 주고, 강진에게는 아주 친절하게 글자 하나하나를 풀어 가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마치 세 살 먹은 아이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듯이 아주 자세하고, 쉽게 가르치려고 애를 쓰는 것 같은 표정을 하면서 말이다.
그 모습에 강진의 양옆에 있던 친구들은 웃음을 꾹 눌렀다.
강진은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동안 글공부를 등한시해 정말 모르고 있으니 그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렇게 강진의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입힌 수업이 끝났다.
전인문과 두 학우가 사라진 뒤에도 강진은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그저 몸을 부르르 떨고 있을 뿐이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던 전인문은 십 년 묵은 체증이 한 방에 뚫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노제에게 술이라도 대접해야겠군. 이리 속이 시원할 줄이야.’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