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0)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0)화(10/171)
전날, 그렌이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세벨리아는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렌 인버네스…….”
씁쓸한 이름이었다. 플로라보다 짙은 붉은 머리칼과 녹색 눈동자를 가진 그렌. 그녀는 북부로 온 첫날 마치 어머니처럼 자신을 맞이해 주었다.
[적응하기 힘들 거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렴, 이곳도 다 사람 사는 곳이야.]북부인들의 냉담한 태도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을 같은 외지인 출신으로서 이해한다며 감싸 주었다.
[네 고통을 내가 왜 모를까.]그렇게 자신은 조금씩 그녀에게 마음을 열었다. 그리고 디하트와의 일이 터졌다. 아버지와 하인들은 그녀에게 죄를 덮어씌우고 발뺌했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그녀는 강물에 휩쓸린 아이처럼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조차 없었다. 그때, 그렌이 마치 성녀처럼 다가와 그녀를 나락에서 구원해 주기 위해 도움의 손길을 뻗었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었지.”
세벨리아가 쓴웃음을 지우지 못한 채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렌에 의한 두 번째 배신은 아버지에 의한 첫 번째 배신보다 더 크게 그녀의 영혼을 훼손했다.
[이것만 제대로 해낸다면 디하트가 다시 널 돌아볼 거란다. 게다가 그 아이는 동정심 깊은 사람을 좋아하거든.]그러나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대로 세벨리아는 절망에 사로잡혔다. 조각난 정신은 제대로 된 생각을 이어 나가지 못했다.
그냥… 모든 게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타인을 책망할 여유도, 기력도 없었으니까.
“하….”
그녀에게 온전한 신뢰를 내주었기에 그만큼 상처가 컸었다.
그 사건이 있고 나서 세벨리아는 한동안 방 밖으로 한 걸음도 떼지 못했다. 한참 뒤 데니사의 지극한 간호에 겨우 마음을 회복하고 그렌을 다시 만났을 때.
[어머, 세벨리아. 아가, 너 왜 이렇게 말랐니? 이렇게 볼품없어서야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 [저, 저는…….] [혹시 예전 일을 아직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건 아니겠지? 어쩜, 그렇게 사니까 이렇게 수척해지는 거 아니야.]아무렇지 않은 걸 넘어 자신을 타박하는 그녀의 태도에 어느샌가 그대로 혼절했다. 수척해진 정신과 몸이 한계 이상의 스트레스를 수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와 옛날을 떠올리니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떠나기 전에 다시 그 얼굴을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세벨리아는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 * *
마침내 그녀가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자신을 찾아왔다. 당당하고 고혹적인 태도가 마치 여신 같았다. 예전이었다면 그 앞에 주눅 들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어차피 난 떠날 사람인걸.’
숨 쉬고 움직이는 이 몸조차 땅 위에 남기고 사라질 존재였다. 그런 제게 그렌은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다. 확정된 미래에 대한 평안이 세벨리아에게 여유를 가져다주었다.
“이리 앉으세요.”
“…그럼 사양하지 않으마.”
자신의 태연자약함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걸까. 그렌은 껄끄러운 태도로 자리에 앉았다.
“귀신을 본 것 치고는 안색이 좋아 보이는구나.”
자리에 앉자마자 비꼬는 말이 던져졌다. 세벨리아는 찻잔을 들다 말고 고개를 들어 그렌을 응시했다.
“내 딸은 크게 놀라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데, 너는 아무렇지도 않다니.”
“…….”
“몸이 튼튼해서일까, 아니면 신경줄이 굵어서일까.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궁금하구나.”
짙은 적색 머리칼을 우아하게 틀어 올린 그렌이 그린 듯 웃으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사용인들도 하나같이 기절은 하지 않았다지.”
그녀의 붉은 입술이 고혹적인 곡선을 그렸다.
“이렇게 대비가 뚜렷하니, 더욱 궁금하구나. 안 그러니? 얘야.”
자신의 반응을 집요하게 살피는 녹색 눈을 보며 세벨리아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저 질문에는 정해진 답이 있다는 사실을.
‘예전에는 미처 몰랐는데.’
그렌의 어두컴컴한 녹빛 눈을 들여다보며 세벨리아는 디하트와 틀어지기 전에도 몇 번 비슷한 질문을 받았던 걸 떠올렸다.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그렌의 녹빛 눈은 단 한 가지 답만을 말하고 있었다.
‘다 네가 천한 사생아 출신이라 그렇단다. 아직도 그걸 모르겠니?’
아.
세벨리아는 그 순간 몰랐던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단순히 자기 권력을 위해서 날 함정에 빠지게 한 것이 아니었어.’
내가 사생아라는 것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구나. 탁한 초록색 눈에 담겨진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며 세벨리아는 느린 숨을 뱉었다.
‘차라리 잘됐네.’
그래,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게 당신이 바라보는 나라면.
‘뜻대로 해 드려야지.’
어차피 더 이상 당신에게 바랄 것도 없으니까.
“제가 사생아라 그런가 보지요.”
세벨리아는 태연히 대답하고는 찻잔을 마저 들어 올려 자연스레 한 모금 마셨다.
“그런 점에서는 다행이네요. 플로라 양과는 달리 아무리 거친 일이 닥쳐도 기절하지는 않을 테니.”
제 비천한 출신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치고는 너무나도 부드럽고 안온한 목소리였다. 수치심도, 부끄러움도 한 점 없는 깨끗하고 선선한 태도. 그에 마주 앉은 그렌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너…….”
그렌은 태연한 척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녀의 입술은 미세하게 떨렸다.
세벨리아의 말은 뒤집어 보면 이러했다. 거친 일이 닥쳐도 플로라처럼 기절하지 않는 사생아라 다행이다. 단 한 번도 사생아 따위와 비교되어 본 적 없는 그렌은 속에서 불이 일었다.
“세벨리아, 네가 이렇게 꼬인 심성인 줄 몰랐구나. 어떻게 널 걱정하는 사람 앞에서 그런 식으로…….”
“참 감사해요, 작은어머님.”
점점 커지는 목소리를 단숨에 잘라먹으며 세벨리아가 산뜻하게 인정했다.
“…뭐?”
“능력 없고 배운 것 없는 절 대신해 가문을 관리해 주신 걸 제가 왜 모르겠어요.”
이쯤 되면 그렌도 지금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게 뭐 하자는 짓거리지?’
그녀는 부채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당황스러움을 내리눌렀다. 겉으로 보기에 상황은 더없이 제게 유리했다. 세벨리아는 먼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권위를 인정했다.
하지만…….
“가문을 배신한 주제에 감히 살아 있는 저 대신 저택 관리도 도맡아 하신 것도 이해해요. 앞으로도 잘해 주실 거라 믿고 있어요.”
어째서인지 이건 그녀가 자신을 인정하고 일을 맡긴 것 같은 모양새이지 않은가. 그러나 그렌이 제 안의 혼란을 정리하기도 전에, 세벨리아가 먼저 선수를 쳤다.
“그래서 오늘은 어쩐 일로 이 별 볼 일 없는 곳에 발걸음을 하셨나요.”
어느새 상황의 주도권은 저쪽으로 넘어가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그렌은 눈에 힘을 주며 의기충천했다.
‘한 번은 당했지만 두 번은 아니야.’
처음 접하는 그녀의 태도가 낯설어 당황했을 뿐. 세벨리아는 처음부터 그녀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렌은 우아하게 턱을 치켜들며 명령하듯 말했다.
“별채로 가 있으렴.”
그렌이 그녀를 찾아온 목적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녀를 본 저택에서 멀찍이 떨어진 별채로 쫓아내 버리는 것.
‘그러면 자연히 사용인들도 저 사생아의 영향력에서 멀어지지.’
그렌은 제가 생각해 낸 완벽한 계획에 미소 지으며 부채를 손바닥으로 탁탁 내리쳤다. 그리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세벨리아를 향해 고압적으로 내뱉었다.
“유령 때문에 네가 미쳐 버리기라도 하면 얼마나 곤란한지 알기나 하니? 네가 정말 디하트를 생각한다면…….”
“그렇게 할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세벨리아는 어느새 준비해 놓았던 짐가방을 찾아 들었다.
“지금 당장 옮겨도 될까요.”
“뭐?”
동그랗게 떠진 녹빛 눈을 마주 보며 세벨리아가 말했다.
“참, 제 시중을 들 사람으로는 데니사 한 명이면 충분해요. 그리고, 괜찮으시다면 수면제를 좀 가져갈 수 있을까요?”
“너 도대체…….”
“벨리타의 유령이 자꾸 절 괴롭혀서 밤에 잠이 잘 안 오거든요.”
사색이 된 그렌을 앞에 두고, 세벨리아는 일 년 만에 그녀를 마주 보며 웃을 수 있었다.
* * *
라쉬의 거처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숙부로서의 일면을 뽐내기 시작했다.
“어떻게 라이언 한 명만 데리고 빠져나올 수 있느냐.”
질책을 시작했다는 말이었다.
그는 거실을 가로지르며 디하트를 혼냈는데, 그게 마치 말 안 듣는 아들을 혼내는 아버지 같은 모양새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그렇게 겁도 없이……!”
“숙부님.”
그러나 디하트는 아버지의 책망에 눈물 흘리는 어린애가 아니었다. 그는 무릎을 꿇는 대신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고, 겁에 질려 두 손을 모으는 대신 진열장에 놓인 와인들을 살폈다.
“그쯤 하셔도 충분합니다.”
“도대체 뭐가 말이냐.”
라쉬가 격앙된 음성으로 외쳤다. 디하트는 진열장을 열고 제법 값나가 보이는 와인 하나를 꺼내 들었다.
“저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는 데에는 충분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
“그런데 숙부님이야말로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십니까. 분명 중앙으로 가신다 들은 것 같은데요.”
디하트가 힘으로 마개를 잡아 뽑으며 그를 응시했다.
펑-!
가슴을 꿰뚫는 시원한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라쉬의 입매는 미묘하게 굳어 있었다.
“그럴 만한 일이 있었다. 어른들의 사정이란 거지.”
“아하.”
“네가 신경 쓸 만큼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뜨겁게 달궈졌던 목소리는 금세 가라앉았다. 라쉬는 더 이상 말을 잇고 싶지 않은 분위기였다.
‘어떻게 할까.’
디하트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부모 대신 키워 준 숙부를 응시했다.
“흠…….”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디하트는 잔을 가져와 와인을 따랐다. 제법 향이 깊었다. 디하트는 창문에 비쳐 보이는 라쉬의 불안한 모습을 보며 술을 한 모금 머금었다.
‘뭘 숨기고 있는 거지.’
금빛 눈이 예리하게 번뜩였다.
* * *
한편, 세벨리아는 본 저택에 뒤떨어지지 않는 별채의 모습에 감탄을 내뱉었다.
“진작 여기에 머무르시지 그랬어요.”
그건 데니사도 마찬가지였다. 혹여나 세벨리아가 갑자기 죽어 버리면 어쩌나, 걱정만 하던 데니사는 자신을 데리러 왔다는 하인의 부름에 한달음에 저택으로 달려왔다.
“이렇게 좋은 별채가 있는데 왜 그런 좁아터진 방에서…… 어휴.”
데니사의 한숨에 세벨리아가 흐린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음, 그건 어쩔 수 없지. 내가 선택한 거니까.”
데니사가 속 터지는 소리를 한다며 가슴을 두드렸다.
“그리고 그땐 별채에 손님이 머물고 있기도 했고.”
가방에 넣어 둔 지참금을 꺼내며 세벨리아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래 그녀가 쓰던 방은 디하트의 방과 붙어 있었다.
그 말인즉슨, 그의 방을 오가는 수많은 북부인의 눈총을 계속 받아야 했다는 말이다.
“거기에 계속 있었다간 정말로 미쳐서 목을 매달았을 거야.”
“아가씨……!”
“됐으니 이리 와서 보석들 좀 골라 줘. 빨리 현금화할 수 있는 게 필요한데. 나는 보는 눈이 없네.”
세벨리아의 어리광에 데니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늘어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