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00)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00)화(100/171)
“어.”
“저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동일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커다랗게 뜨인 눈 수백 쌍이 활짝 열린 홀의 문을 응시했다. 느긋하게 도착한 마지막 관람객은 요 며칠간 수도를 떠들썩하게 달궜던 인버네스 공작이었다.
유려한 생김새와 달리 섬뜩함이 느껴지는 금빛 눈동자. 목 끝까지 채운 단추는 단정함보다는 목줄을 채운 야수를 눈앞에 둔 것처럼 느끼게 했다.
섬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홀을 한차례 훑은 그가 세벨리아를 향해 달콤하게 속삭였다.
“늦지 않았군요.”
“다행이네요.”
사람들은 그제야 사내가 누군가를 에스코트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디하트의 흉포한 기운에 놀란 이들은 조심스레 눈을 내렸고 숨을 삼켰다.
“저 얼굴은……!”
새들의 재잘거림처럼 작은 속삭임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얼굴을 가린 부채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그와 다정하게 팔짱을 낀 여인은 수도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한 차례 이상 얼굴을 올린 장본인이었다.
두 사람은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바다가 갈라지듯 사람들은 자연스레 그들에게 길을 터주었다.
이 시간 이후로 수도의 사교계를 불태울 화제의 주인공들을 맡게 된 불쌍한 직원 한 명이 떨림을 감추며 그들을 맞이했다.
“티, 티켓을… 아니, 자리를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얼어붙은 직원이 가까스로 제 역할을 마치자 디하트가 손수 품에서 티켓을 꺼내 그에게 보여 주었다. 직원은 티켓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재빨리 그들을 자리로 안내하려 했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아.”
그런데 갑자기 고개를 들어 홀을 둘러보았다. 금빛 눈동자가 저를 응시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에 담고 홀 입구까지 닿았다.
이내 입꼬리를 당겨 웃은 디하트가 세벨리아를 바라보며 느리게 입을 열었다. 그 순간, 직원은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었다.
“벨라, 어펜츠 씨께서는 아무래도 늦으시나 봅니다.”
“어머, 죄송해요. 숙부님이 종종 이렇게 깜빡하신다니까요. 부모님도 항상 그 점을 타박하셨는데.”
벨라가 탄성을 내지르며 뺨을 붉혔다. 그 모습이 꼭 순진한 아가씨 같았으나 목소리만은 떨림 없이 또렷했다. 그 덕에 홀 안의 모든 사람이 세벨리아의 말을 빠짐없이 들을 수 있었다.
“어펜츠 씨의 게으름을 벨라 양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죠. 그럼 어쩐다.”
디하트는 세벨리아의 말을 생각해 보는 척 흠, 하고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직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을 멍하니 지켜보던 직원이 움찔하며 어깨를 튕겼다.
“일단 우리라도 먼저 들어가 있도록 합시다. 그럼 박스석까지 안내를 부탁하지.”
“예, 예!”
“아, 칼 어펜츠라는 사람이 오면 내 일행이니 박스석으로 올려 보내 주고.”
“알겠습니다.”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두 사람은 걸음을 옮겼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오페라 공연의 막이 오른다며 직원들이 사람들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결국 사람들은 제 자리에 앉아서야 방금 전 자신들이 본 게 무엇인지 이야기할 수 있었다.
“웨든 후작이 잃어버린 딸과 똑같이 생기지 않았어요? 설마 인버네스 공작이 아내와 똑같이 생긴 여동생을 억지로……!”
“흥미로운 가설이네요. 그런데 듣자 하니 숙부라는 자와 함께 수도에 올라온 것 같던데, 그렇게 되면 웨든 후작의 잃어버린 딸이라는 추측은 효력이 없어지는 게 아닌가요?”
“혹시 모르죠. 입양한 아이인데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던가.”
사람들은 저마다 추측을 하며 공연의 막이 오르기를 기다렸다. 대부분 무료한 시간을 때울 수 있는 즐거운 화제에 흥미가 동한 기색이었다. 단 한 사람, 네이튼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같잖은 수작을 부리고 있군.”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 네이튼. 그 애가 이렇게 토라진 게 한두 번이야?”
넬리아가 태평하게 웃으며 부채를 흔들었다.
“언제나 그랬듯 어르고 달래 주면 다시 마음을 고쳐먹을 거야. 착한 애잖아. 우리의 하나뿐인 동생이기도 하고.”
“너는 너무 사람이 좋아.”
“장차 이 나라의 황후가 될 몸인데 당연하지.”
넬리아가 부채 뒤에서 소곤거렸다. 네이튼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가 한숨과 함께 표정을 풀었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그래봤자 세벨리아였다. 환영술사라는 능력을 갖추고도 도망치는 일밖에 하지 못하는 모자란 아이.
그런 애를 상대로 심각해 봤자 무얼 하겠는가.
‘중요한 건 그 애를 데리고 있는 인버네스 공작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지.’
그는 세벨리아가 제 아내라는 걸 알고서 곁에 두는 걸까?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렇게 해서 그가 얻는 이득이 뭐지? 네이튼은 머리가 아파 오는 걸 느꼈다.
그가 머리 아픈 추측을 이어 나가는 사이, 공연의 막이 올랐다.
* * *
“박스석이 이렇게 생긴 거였군요. 테이블에 뭔가 놓여 있네요. 꽃이랑 다과… 아, 이게 오페라 글라스인가?”
박스석을 둘러보며 세벨리아가 신기한 듯 종알거렸다. 감탄 어린 음성에 디하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대극장의 후원자가 아닌 그에게는 가족석이 주어지지 않았기에 일반 박스석을 예매할 수밖에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후원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는 거였는데.’
과거 코웃음을 치며 후원 신청 편지를 불태웠던 게 이제 와 후회가 되었다.
“이제 시작하나 봐요, 디하트. 얼른 자리에 앉아요.”
“……그래요.”
디하트는 작은 한숨을 삼키며 세벨리아의 곁에 앉았다. 연신 경탄을 내뱉는 그녀의 반응에 속이 상했다.
‘스무 해 넘게 수도에서 자랐으면서, 랑그 엘리사의 자랑인 대극장에 온 게 처음이라니.’
디하트는 새삼 그녀가 얼마나 황폐한 유년기를 보냈는지 깨닫고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세벨리아는 기다렸다는 듯 오페라의 황홀함에 빠져들었고, 디하트는 그런 그녀의 생기 어린 눈빛에 흠뻑 빠졌다.
1부가 끝나고 인터미션 시간이 되었다. 자그맣게 피어난 웅성거림이 조금씩 커져 갔다. 박스석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때때로 그들을 올려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칼 어펜츠가 박스석에 등장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펜츠 씨야 언제나 바쁜 분이시니까요.”
“워츠는 오페라가 영 취향이 아니라 밖에서 기다린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아쉽게 됐습니다.”
처음 보는 중년 남자와 악수를 하는 디하트의 모습이 모두의 눈에 보였다. 세벨리아는 그 광경을 지켜보다 디하트에게 무어라 속삭이고는 박스석을 나왔다. 그러자 무료한 얼굴로 복도에 서 있는 워츠가 보였다.
“워츠 씨.”
“벨라 양.”
워츠가 희미한 웃음과 함께 그녀를 맞았다. 복도에서 화담을 나누던 여타 귀족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박히는 게 느껴졌다.
“오페라는 즐거우셨습니까?”
“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박진감이 넘치던걸요. 워츠 씨도 보셨으면 좋았을 텐데.”
당장이라도 상대 배우를 죽여 버릴 듯 노려보며 엄청난 성량으로 노래를 부르던 프리마 돈나가 떠올랐다. 그렇게 엄청난 연기를 펼치면서도 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다니. 역시 수도가 자랑하는 오페라 가수다웠다.
“전 괜찮습니다. 그보다 인터미션이 끝나기 전에 얼른 다녀오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그럼 이따 오페라가 끝나고 뵈어요.”
세벨리아는 가볍게 인사를 남기고 투왈렛 룸으로 향했다. 그녀에게 말을 걸까 말까 고민하던 사람들의 미련 넘치는 시선이 등에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세벨리아는 여지를 주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곧 기다리던 상대를 마주했다.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발그레한 볼,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 사랑과 관심 속에서 자라 왔으며 그게 당연하다는 듯 천진난만한 태도로 사람들을 휘어잡는 사교계의 꽃 중 하나.
“당신과 꼭 만나고 싶었거든요.”
넬리아 웨든이 세벨리아를 보며 친근하게 웃었다.
* * *
2부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좌석으로 돌아가기엔 이미 늦었으리라. 세벨리아는 자리에 앉길 권하는 넬리아의 청을 거절했다.
“그래서 무슨 용건이죠, 넬리아 영애. 저희가 한가롭게 이야기할 만큼 친분이 있던 사이는 아니라고 보는데요.”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듯 딱딱한 태도에 넬리아가 입술을 내밀고서 부루퉁하게 말했다.
“오랜만에 만난 건데, 얘는. 예나 지금이나 쌀쌀맞은 건 여전하구나.”
“…….”
“눈에 힘 좀 풀어. 아버지가 항상 말씀하셨잖아. 그런 식으로 사람을 대하니까 다들 널 아니꼽게 보는 거라고.”
자연스럽게 시작된 타박은 언제나 그렇듯 세벨리아의 잘못으로 귀결되었다. 세벨리아는 아마 자신이 아무것도 안 하고 숨만 쉬어도 숨 쉬는 법이 잘못되었다며 구박을 받았을 거라 생각했다.
‘역시 괜히 만났나.’
아버지의 속셈을 알 수 있으려나 싶어 만났는데, 괜히 속만 뒤집혔다.
변함없는 언니의 태도에 진절머리가 난 세벨리아는 한숨을 삼켰다. 디하트의 말대로였다. 그들은 자신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저를 다른 분과 착각하신 모양이로군요.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세벨리아, 끝까지 이럴 거니?”
넬리아가 포옥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철없는 어린 동생을 보듯 세벨리아를 올려다보며 어르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왜 이렇게 어렵고 복잡한 길을 택한 건지 모르겠지만 아버지께서도 네 뜻을 따르기로 하셨어.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 줄 테니 그냥 돌아와. 한평생을 오냐오냐 자란 네가 평민의 삶에 적응이나 할 수 있을 것 같아?”
세벨리아는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한평생 동안 자신을 조롱하고 멸시하던 사람이 이제 와 그 삶도 그럭저럭 괜찮지 않았냐며 돌아오라 설득하고 있었다.
넬리아를 보고 들끓었던 감정이 한순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세벨리아가 낮은 목소리로 일갈했다.
“이 이상 말해 봤자 제 입만 더럽히는 거로군요. 돌아가겠어요.”
“하아, 끝까지 버틸 거라더니 정말이네. 아버지가 전하신 말이라도 듣고 가.”
세벨리아는 몸을 반쯤 튼 채로 넬리아를 응시했다. 서슬 퍼런 시선에 넬리아는 잠시 몸을 움찔했으나 곧 상대가 별 볼 일 없는 제 동생이라는 걸 자각하고 평소의 얼굴로 돌아왔다.
“돌아온다면 네가 그리도 궁금해했던 생모에 대해 알려 주시겠다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