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06)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06)화(106/171)
새벽이 물러가고 아침이 밝아오기 시작하는 시간, 집무실은 싸늘한 정적에 뒤덮여 있었다. 자초지종을 모두 들은 클로드는 잠이 확 깬 얼굴로 텅 빈 벽난로를 노려보았다.
“일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튀었네.”
사일러스가 인버네스에 묶여 있지 않은 세벨리아를 원한 이유. 제 신분을 버리고 죽음을 가장한 세벨리아를 혼내지 않고 기꺼이 새로운 신분을 주면서까지 데려오고자 한 이유.
그건 바로 황권의 교체를 위해서였다.
“황제의 대역을 만들겠다니. 정말 간도 크지.”
클로드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하자 디하트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허무맹랑한 계획은 아니지.”
황궁 내부에 뜻을 같이하는 자가 있다면 부담이 크게 줄어든다. 그게 황제의 가족이자 아내인 일황비라면 더할 나위 없고.
“그래, 네 말이 맞다.”
아마 일황비는 황제의 대역을 세운 뒤 그의 아들을 황태자로 공표하려는 게 분명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정통성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 매력적이지 않을 수가 없지.
‘참 그들답군.’
차가운 웃음을 흘린 클로드가 세벨리아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가장 화급한 일로 넘어가 볼까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지. 깊은 침묵에 잠겨 있던 세벨리아가 시선을 느끼고 눈을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설명은 다 끝났나요?”
“그래요.”
디하트가 대신 답하며 세벨리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클로드가 우묵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응시하며 말했다.
“일단 정리해 보죠.”
“네.”
“벨라 양은 지금 후작 저택에 누워 있는 환영이 ‘진짜 세벨리아’라고 생각하게 하고 싶은 거죠? 그들이 자기 손으로 납치한 게 가짜가 아니라 당신이라고 끝까지 믿게 만들고 싶은 거예요.”
“맞아요. 굳이 이 상황에서 자기들이 뒤통수 맞았다는 사실을 알려 줄 필요는 없으니까요.”
세벨리아가 푸른 눈을 깜빡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환영의 가짜 여부를 판별할 무언가를 손에 넣기 전에 소동을 일으켰으면 해요. 가능하면 오늘 내로.”
“소동이라고요?”
클로드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세벨리아가 그 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후작 저택에 있는 환영이 진짜 세벨리아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만큼 심각한 소동이요.”
확신에 찬 모양새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오래 고민했던 게 틀림없다.
“그게 뭡니까?”
“아, 그게 말이죠.”
디하트가 묻자 세벨리아는 갑자기 머뭇거렸다. 그를 흘깃 보고 입술을 깨무는 게 흡사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켕기는 게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벨라?”
클로드는 의아한 심정이 되었다. 그러나 곧 세벨리아의 계획을 듣자 그녀가 왜 그런 반응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 * *
3구역 중심부에 위치한 웨든 후작 저택은 새벽부터 분주했다. 까다로운 취향의 윗분들을 모시기 위해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난 하인들은 저마다 일을 시작했다.
찰스 또한 그런 이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물동이와 걸레를 들고 오늘도 대문을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닦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쾅-!
대문이 반파되지만 않았어도, 그는 분명 오늘도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고 집사로부터 칭찬을 받았을 게 분명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집사님!”
외알 안경을 쓴 노집사가 구르듯 튀어나와 찰스의 옆에 섰다. 이윽고 참상을 눈에 담은 노집사는 뒷목을 짚었다. 한때 대단한 위용을 자랑했던 대문은 두 동강이 나며 포석을 덮쳤고, 그 위로 자욱한 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 이게!”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뒤로 넘어가는 집사의 등을 겨우 받친 찰스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경비대를 불러야 하나? 하지만 저택에서 너무 먼데. 아냐, 일단 하녀장님부터…….’
기사단 하나 없는 중앙 귀족은 이래서 문제였다. 찰스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집사를 바닥에 눕히려던 순간이었다.
자욱한 먼지 너머로 희끄무레한 인영이 보였다.
“……!”
찰스는 숨을 죽였다.
금빛 찬란한 안광을 지닌 사내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걸레짝이 된 대문을 발로 걷어차며 저택 안으로 발을 들였고, 찰스는 그의 손에 들린 검집을 보고 그대로 기절할 것만 같았다.
“허억.”
찌를 듯한 시선이 찰스에게 닿은 걸 보면 분명 숨 들이켜는 소리를 들은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찰스의 앞에 멈춰 선 사내가 스윽 손을 뻗었다. 찰스는 덜덜 떨며 자신의 운명을 기다렸다. 허나 상대가 집어 올린 건 집사의 멱살이었다.
“커, 헉!”
“정신이 들었나 보군.”
그대로 집사를 탈탈 털어 정신을 차리게 도와준 디하트가 성마른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자, 그래서 너희들이 납치한 내 은인의 조카는 어디 계시지?”
“케헥… 큭.”
멱살 잡힌 집사가 허공에서 흔들렸다. 디하트는 성난 얼굴로 재차 그를 추궁했다.
“그녀를 납치하고도 내가 가만히 넘길 줄 알았나!”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모함을……! 후작님께서는 그러실 분이 아니십니다!”
목이 졸려 끙끙거리는 소리밖에 못 하는 집사를 대신해 찰스가 외쳤다. 억울함 가득한 그의 눈을 알아본 디하트가 차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
시선이 마주친 순간 찰스는 알아차렸다.
저건, 미친놈이었다.
붉은 기가 감도는 눈매와 하얀 벼락이 내리치는 금빛 눈동자는 도저히 제정신이라고 봐줄 수 없었다. 마법이니 뭐니 하는 것들과 평생 거리를 두고 살아온 그라도 저게 ‘평범한 상태’가 아니라는 건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 이런 식으로 굴면 그쪽도 무사하지는 못할 겁니다…….”
와락 겁이 난 찰스가 두려움에 몸을 덜덜 떨며 말을 흘렸다. 디하트는 피식 찬웃음을 흘렸다.
“꼴에 후작을 섬긴다 이거지.”
“윽!”
디하트는 집사를 내동댕이치고 손을 털었다. 찰스가 바닥을 기어 집사에게로 향했다. 정신을 잃은 노집사를 겨우 추스른 순간이었다.
“공작님.”
먼지가 가라앉은 대문 너머로 검은 제복의 기사들이 보였다. 보란 듯이 인버네스의 문장을 가슴에 단 이들 사이로 일레이가 한 걸음 나왔다.
“이곳은 저희가 막겠습니다.”
씨익 웃은 일레이가 등을 돌려 뻥 뚫린 문 앞을 막아섰다. 동시에 기사들이 넓게 퍼져 후작 저택을 빙 둘러쌌다. 저택을 봉쇄하는 신속한 움직임에 찰스는 할 말을 잃었다. 이제 경비대를 부르러 갈 수도 없었다.
디하트는 그 모습을 흘끗 확인하고서 걸음을 옮겼다. 소동을 알아차린 이들이 저택 창문마다 붙어 있었다. 그리고 개중 가장 높은 곳에서 디하트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있었다.
이를 악물고 부들거리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는 건 네이튼이었다.
“아하.”
거기 있었군.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디하트는 기다렸다는 듯 손을 튕겼다.
꽈과광-!
웨든이 자랑하는 200년 된 나무에 벼락이 내리친 건 한순간의 일이었다.
* * *
네이튼은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이건 상식 밖의 일이었으며 도저히 평범한 선에서 용납 가능한 수준이 아니었다.
새까맣게 타 버린 나무를 노려보던 그는 그대로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악다문 잇새로 참지 못한 욕설이 튀어 나갔다.
“미친 새끼가 어느 안전이라고……!”
이곳은 벨크람의 꽃이자 황실이 자리 잡은 수도, 랑그 엘리사였다! 제가 어디 있는지도 자각 못 하고 감히 기사단을 이끌고 무력을 동원하다니. 북부의 공작이라는 놈은 이대로 목이 잘리고 싶은 건가?
그때, 낙엽처럼 나동그라지는 하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디하트가 세벨리아를 가둬 놓은 곳으로 향하는 것 또한.
“젠장!”
그래, 목을 베든 사지를 자르든 그건 일이 정리된 뒤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일단 저 미치광이를 잡아야 했다.
네이튼은 하필 이럴 때 자리를 비운 아버지를 원망하며 복도를 달렸다. 그가 세벨리아의 진위를 확인할 방법을 찾기 위해 떠났다는 생각은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때마침 저 멀리서 코너를 돌아 사라지는 디하트가 보였다.
‘안 돼!’
그가 세벨리아를 품에 안고 저택을 나서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는 없었다. 저 광인의 이름에 영웅 따위의 수식이 붙게 만들 수는 없단 말이다!
그러나 신은 네이튼의 편이 아니었다. 끼긱, 코너를 돈 네이튼의 눈에 만신창이가 된 복도의 모습이 보였다. 곧 너덜너덜해진 문 사이로 디하트가 나왔다. 품에는 세벨리아를 안은 채였다.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는 건가, 공작!”
피를 토하듯 내뱉은 외침에 디하트가 서늘하게 웃었다.
“참으로 뻔뻔한 납치범이로군. 찾아갈 수고를 덜어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완전히 돌아 버렸군. 그 애가 누구라고 생각하고 이런 해괴망측한 짓을 저지르는 거지? 그 애는 우리 가족이야. 당신 같은 제삼자가 끼어들 일이 아니란 말이야!”
네이튼이 창밖을 흘깃 보고선 세벨리아를 향해 성큼 다가섰다.
“내 동생을 내려놓게, 공작. 그 애는 치료가 필요한 아이야.”
네이튼의 용기의 근원이 무엇인지 일찌감치 알고 있는 디하트는 그저 우스웠다. 그는 저택 밖에서 경비대를 상대로 수세에 몰리는 척하고 있는 기사단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단호하게 내뱉었다.
“아니, 그녀는 그대의 동생 따위가 아니야. 어떻게 감히 그녀가 자네 같은 역겨운 족속과 한 가족이라는 말을 내뱉을 수가 있나?”
“뭐……!”
“그리도 동생을 챙기고 싶었다면 이미 죽은 동생이라도 잘 챙겼어야지.”
눈앞에서 퍼부어진 모욕에 네이튼은 새빨개진 눈으로 숨을 헉헉댔다. 이성의 끈이 툭 하고 끊어지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는 점차 가까워지는 경비대의 함성과 더불어 치솟아 오르는 분노에 칼을 들었다.
“이건 그대가 자초한 거야, 공작!”
그리하여 그가 마침내 디하트를 향해 검을 내지르는 순간, 저택의 모든 창문이 터져 나갔다.
“아아악!”
화려하던 금발이 새카맣게 타고, 온몸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났다. 죽지는 않았으나 오히려 죽는 게 나은 꼴이 된 네이튼이 바닥을 굴렀다.
“죽여, 죽여 버릴 거야……!”
식식대는 소리를 무시하며 디하트는 그대로 창문을 타 넘었다. 그리고 네이튼과 비슷한 꼴로 바닥을 나뒹구는 경비대들을 지르밟으며 저택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