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08)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08)화(108/171)
다음날 오전, 황실에는 웨든 후작이 쓴 탄원서가 도착했다. 휘황찬란한 수식어구와 구구절절 늘어놓은 감수성 짙은 문구들을 치워 내면 요지는 간단했다.
[벨라 어펜츠는 내 딸 코넬리아 웨든이 분명하니 그녀를 데려갈 수 있도록 지원해 주십시오.]“그게 안 된다면 적어도 극악무도한 인버네스 공작에게서 그녀를 떼어 내 보호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장신의 남자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말을 끝맺었다. 의자에 걸터앉아 고심하는 것 같던 이황자가 시선을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정오의 햇살이 그의 눈을 찌를 듯 기세를 떨치고 있었다. 붉은 눈을 갸름하게 접은 이황자, 샤테이안은 푸스스 웃었다. 청원서가 도착한 지 한 시간도 안 되어 퍼지는 소문이라.
“폐하께서 직접 나서실 의향이 없으신 거로군.”
“무리도 아니지요, 오늘 아침만 해도 피를 한 동이나 흘리셨다고 합니다.”
“이런, 정말 가실 날이 얼마 남지 않으신 건가. 갈수록 엄살이 심해지시는군.”
샤테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장신의 남자, 루드밀은 작은 한숨을 삼켰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요.”
“흠.”
샤테이안이 턱을 괴며 눈을 내리떴다. 광택이 흐르는 진주처럼 매끈하게 빛나는 플래티넘 블론드 사이로 붉은 눈동자가 느리게 깜빡였다.
“글쎄, 남의 집 가정사에 손을 뻗을 만큼 내가 그리 한가로운 인물이 아니라서 말이야. 게다가 웨든 후작이라면 나보다 더 열성적으로 끼어들고 싶어 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텐데? 예를 들면 내 형님이라던가.”
모양 좋은 입술의 끝이 살짝 말려 올라갔다. 심술궂은 미소에 루드밀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딜리언 황자가 개입하면 코넬리아라는 여자는 바로 웨든 후작에게로 돌아가겠군요. 그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때 예고도 없이 문이 열리더니 짙은 군청색 머리칼의 사내가 들이닥쳤다.
“샤테이안!”
친밀한 부름에 루드밀은 눈썹을 꺾었고, 샤테이안은 환하게 웃었다.
“이게 누구야. 날 수도에 버려두고 떠난 소중한 내 친구 발라크 아닌가. 어디 보자, 거의 한 달만인가. 흠… 한 달 만에 내 소중함을 깨달았다라. 나쁘지 않군.”
“자네 투정은 두고두고 받아줄 테니 일단 내 말부터 들어 보게.”
발라크라 불린 사내는 꽤나 안달 난 눈치였다. 샤테이안이 턱짓하자 루드밀이 그에게 의자를 내어주었다. 자리에 앉은 발라크가 두 손을 모으고 심호흡을 하더니 대뜸 말을 꺼냈다.
“웨든 후작에게 잃어버린 딸이 있다는 이야기, 자네도 들어 봤겠지.”
“벌써 며칠은 묵은 소문을 갓 잡아 올린 생선마냥 말하려고 이리 뜸을 들인 건가.”
샤테이안이 김샌 얼굴로 상대의 말을 끊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 이야기 중이었어. 웨든 후작이 탄원서를 올렸더군. 그 딸의 이름이… 뭐였더라.”
“코넬리아라고 합니다.”
“작명 센스가 최악이로군. 첫째 딸이랑 다를 게 없잖나. 어쨌든 그 아가씨를 인버네스 공작이 억지로 데리고 있다며 제게 보내 달라 탄원서를 썼어. 아마도 형님이 처리하겠지.”
그 순간, 군청색 머리칼의 남자가 으르렁거리듯 목을 울렸다. 샤테이안이 놀라 그를 응시했다. 남자의 녹색 눈동자가 위험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형님이라 하면, 웨든 후작가의 장녀와 약혼을 맺은 딜리언 일황자를 말하는 건가.”
“그래.”
“아니. 그에게 맡겨서는 안 돼. 이번 일은 무조건 자네가 맡아, 샤테이안”
“흠?”
“약속을 잊은 건 아니겠지. 자네가 황위에 오를 수 있도록 힘을 빌려주는 대신 자네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사촌 동생을 찾아 지켜주겠다고 맹세했잖나.”
발라크가 깊은 눈으로 샤테이안을 응시했다.
“그게 무슨… 하!”
동그랗게 뜬 눈으로 발라크를 바라보던 샤테이안은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발라크 애쉬렌트, 러크우드를 지배하는 대가문 중 하나인 애쉬렌트의 일원인 그는 잃어버린 혈육을 찾으러 심복과 함께 아주 오래전 벨크람에 왔다가 자신과 친구가 되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찾을 게 아니라 그 아버지라는 자를 먼저 찾으면 되지 않아?]그때 발라크는 무슨 반응을 보였던가. 아, 그래. 쓰게 웃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었지.
[그럴 수 있다면 진작 그리했겠지. 안타깝게도 고모님은 우리에게 아이 아버지에 대해 한 번도 이야기하신 적이 없어. 그렇게 의식을 잃어버릴 줄 알았다면 무리해서라도 물어보는 건데… 어리석었지.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희망을 잃지 않는 것뿐이야.]그때만 해도 발라크는 가주의 남동생이 아니라 가주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의 형인 로스엘이 가주 자리를 꿰찬 게 바로 한 달 전. 그 즉시 발라크는 벨크람으로 왔고…….
“그래서였군. 왜 자네가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떠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는데.”
“…도착하자마자 평생 찾아다니던 사촌 동생의 사망 소식을 들은 기분을 설명할 여유 따위는 없었으니까.”
발라크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샤테이안은 자신의 추측이 맞아떨어지자 어처구니없다는 듯 긴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말하니 왜 진작 털어놓지 않았냐 타박할 수도 없었다.
“그래. 거기까지는 이해했어. 그런데 그 사촌 동생이 쌍둥이였다는 건 자네도 몰랐던 건가?”
“쌍둥이가 아니야, 샤테이안.”
발라크가 싸늘하게 웃으며 단언했다.
“아버지는 언제나 고모님이 ‘피가 섞인 계집애’를 낳은 탓에 벌을 받은 거라고 했으니까.”
러크우드는 몹시 폐쇄적인 국가였다. 하물며 그들을 통치하는 일곱 개의 대가문은 어떻겠는가. 발라크의 아버지였던 전대 가주는 벨크람의 피가 섞인 아이를 용납하지 않았고, 심복에게 그대로 가져다 숨통을 끊으라고 명했다.
하지만 갓난아이의 목을 조르는 일은 인간성을 버리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토록 충성스러운 이라 하더라도 한순간 갈등할 정도로 끔찍한 일.
“차마 죽이지 못해 버렸다는 건 알고 있었어. 그러나 도대체 언제, 어디에 버렸는지는 알 수 없었지. 언젠가 넌지시 그 애의 혈육에게 맡겼다는 뉘앙스는 흘렸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아득, 이를 간 발라크가 사납게 웃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곧 태어날 동생을 부탁한다며 웃던 고모의 핼쑥한 얼굴이 떠오를 것 같았다.
“뭐, 그것도 아버지가 형님의 손에 죽기 전까지의 일이지만.”
얼떨결에 애쉬렌트의 내부사정까지 듣게 된 샤테이안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자네 가문은 대대로 강력한 환영술사를 배출해 왔다 했지.”
심지어 발라크가 붙여 준 심복인 루드밀, 그리고 발라크 본인마저 환영술사였으니 설명해 봤자 입만 아팠다.
“이제야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는군.”
샤테이안이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웨든 후작의 잃어버린 딸에 대한 소식을 듣고 다급히 수도로 돌아온 발라크. 그리고 그의 가문이 대대로 보유한 능력과 사촌 동생은 결코 쌍둥이가 아니라는 그의 말.
그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뿐이었다.
“세벨리아 인버네스는 처음부터 죽지 않았던 거였어.”
이 얼마나 대단한 여인인가. 죽음을 가장하고 제국을 통째로 속여 넘기려 하다니. 샤테이안의 붉은 눈에 이채가 흘렀다.
* * *
황실에 탄원서를 내는 것과 별개로 사일러스는 일종의 흑색선전을 시작했다. 목표는 세벨리아의 탈환이었으며 그에 동반되는 효과는 인버네스 공작의 명예를 실추하고 가문의 이름을 땅에 떨어트리는 것이었다.
‘공작이 수도에서 헛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인버네스의 늙은이들이 가만 있지 않겠지.’
사일러스는 인버네스 가문의 원로회가 나서서 디하트를 잡아가길 기대했다. 전면에 나서는 걸 꺼리는 그다운 수였다.
그리하여 사일러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 퍼트리도록 지시한 것이다.
‘인버네스 공작이 죽은 아내와 똑 닮은 여인을 데려가 감금하고 있다.’
‘심지어 그 여인이 웨든 후작이 찾던 잃어버린 딸이라더라.’
그는 이번에도 사람들을 선동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으리라 막연히 기대했다. 문제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점이었다.
디하트 인버네스는 이미 스스로가 미쳤다는 걸 인정한 사내였다. 그런 그에게 추문 따위야 귀찮은 날파리 같은 존재일 뿐. 게다가…….
“이런 면에서 공교롭게도 제가 그분의 딸이라는 걸 강하게 느끼네요.”
이런 악소문이 나돌 것을 알고 일부러 디하트로 하여금 웨든 저택을 요란하게 급습하도록 지시한 게 바로 세벨리아였던 것이다.
그녀는 광장의 노천카페에 앉아 저 멀리서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넬리아를 응시했다.
“저런 표정은 처음 보네요.”
사일러스의 명을 받아 은근슬쩍 세벨리아와 디하트에 대한 소문을 흘리러 온 넬리아는 멀쩡하다 못해 건강해 보이는 세벨리아를 보고 대경실색한 표정이었다. 그녀가 입술을 깨문 채 부들거리다 급히 몸을 돌리는 걸 보며 세벨리아가 눈웃음을 쳤다.
‘넬리아에게 염탐용 환영을 붙이길 잘했어.’
그녀는 오늘 아침에 넬리아가 하인들과 이야기하는 걸 듣고 일찌감치 저택을 나서 광장으로 향했다.
피식 웃은 세벨리아는 제 곁에 앉은 디하트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어때요?”
“다들 당신을 보느라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충혈되어 있군요.”
“내가 아니라 당신이겠죠.”
오후의 햇살이 손등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청명한 하늘엔 하얀 구름이 느긋하게 흘러가고, 주위를 둘러싼 테이블 위에는 작은 웃음소리들이 떠다녔다.
그곳에서 세벨리아는 자신이 디하트에 의해 감금되어 있지 않으며 자발적으로 그의 곁에 머무르고 있다는 걸 만천하에 내보였다. 가끔 의미심장한 눈초리가 와닿을 때면 용기를 내어 웃어주기도 하는 등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코넬리아 웨든이 아닌 ‘벨라 어펜츠’의 이미지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 상대가 질겁하고 돌아서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럴 땐 조금 놀랐다. 물론 그 이유가 상대를 죽일 듯 노려보는 디하트라는 걸 세벨리아는 끝까지 알지 못했다.
그녀의 행동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 기대할 만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벨라 어펜츠 양에게.]화려한 금박이 덧입혀진 초대장은 발신인의 신분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거기다 더해 제발 주눅 들어 달라는 듯 작은 보석까지 박힌 봉투를 보며 디하트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황실에서 주최하는 예술전시회의 초대장이로군요.”
웨든 후작의 부진을 보다 못한 일황비가 드디어 직접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