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09)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09)화(109/171)
“슬슬 애가 타기 시작했나 봐요.”
세벨리아가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어느새 등장한 클로드가 디하트의 손에서 봉투를 빼앗아 들었다.
“나흘 후에 열리는군요. 꽤나 빠듯한 스케줄이네요. 하긴, 안달이 난 상태긴 하겠죠. 그들의 목적이 정권교체라면 당신보다 매력적인 패는 없으니까요.”
“클로드!”
“아뇨, 맞는 말이에요.”
클로드의 냉혹한 말에 디하트는 기겁했으나 세벨리아는 순순히 수긍했다. 그 모습에 디하트가 눈매를 찌푸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세벨리아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제 능력은 아주 매력적이었다.
특히 유혈사태를 일으키지 않고 황권 교체를 이룰 수 있는 유용한 도구로서 말이다.
“처음부터 그들의 계획에 내가 포함되어 있지는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나처럼 편리한 도구를 알게 된 이상 그냥 놓아 버릴 수는 없겠죠.”
일황비의 본래 계획이 무엇이었든 그녀는 자신의 유용성을 알게 된 이상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갖게 되지 못하면 어떻게든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지 못하게라도 하겠지.
‘어쩔 수 없네. 황비가 직접 보낸 초대장을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미 그들의 눈에 들어 버린 이상 피할 곳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피할 생각도 없었다. 도망치는 일은 이제 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세벨리아가 봉투에 붙인 작은 보석을 떼어 내려 애쓰는 클로드를 향해 무어라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읏.”
눈앞에 별안간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세벨리아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넬리아에게 붙여 놓은 염탐용 환영이었다.
‘힘이 회복되었구나.’
넬리아에게 붙인 깃털은 탐지마법이나 기척이 예민한 이들에게 걸리지 않기 위해 아주 최소한의 힘만을 불어넣은 환영이었다. 때문에 한 번 힘을 소모하면 회복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넬리아와 하인들의 대화를 엿들은 게 이틀 전이었으니까…….
“벨라?”
“잠시만요.”
시간을 계산하던 세벨리아는 다시 눈앞이 흐려지는 걸 느끼고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두 손을 모으고 정신을 집중하자 두 남자는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츠츳.
곧 세벨리아는 감긴 두 눈 사이로 새로운 색채가 들이차는 걸 느꼈다. 이윽고 화려하다 못해 눈이 아픈 실내가 보였다.
‘응접실인가? 분위기를 보아하니 웨든 후작 저택은 아닌 것 같은데.’
흐릿한 상은 점차 선명해졌다. 응접실 구석에 놓인 자기와 벽에 걸린 그림, 뒤에 도열해 있는 시종 순으로 또렷하게 보이더니 맞은편에 앉은 이의 얼굴에서 안개가 걷혔다.
‘……!’
세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에 고집스러운 녹색 눈, 윤곽이 뚜렷한 얼굴을 가진 사내는 분명 일황비의 적자인 딜리언 벨크람이었다.
‘일황자와 만나고 있었구나!’
두 사람이 약혼 관계이니 언젠가 마주치리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리도 빠른 시기는 예상치 못했다. 세벨리아가 조심스럽게 숨을 삼키기 무섭게 딜리언이 무뚝뚝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달콤한 목소리를 냈다.
[내 종달새, 오늘따라 그대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보기가 힘들군요. 무슨 걱정이 있는 겁니까?]약혼녀에게 구사하기에 아주 적절한 대사와 음성이었다. 하지만 같이 듣고 있는 세벨리아의 입장에서는 소름 끼치기 짝이 없었다.
“으.”
그녀가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괴로운 신음을 흘리자 심각한 얼굴로 그녀를 지켜보던 디하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클로드가 그를 억지로 앉히며 가만히 있으라 종용했다.
덕분에 세벨리아는 넬리아와 딜리언의 대화에 집중할 수 있었다.
[죄송해요, 황자 전하. 요사이 걱정거리가 많아 저도 모르게 어여쁘지 못한 모습을 보였어요.] [그런 말 말아요, 내 작은 새. 그대를 괴롭히는 건 나를 괴롭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내가 한번 맞춰 보죠… 환영술사라는 그 계집애가 당신을 괴롭히고 있군요.] [어머, 그걸 어떻게…….]딜리언은 얼굴을 기울이며 피식 웃었다. 제 딴에는 장난스러운 분위기를 의도한 듯했으나 생김새가 워낙 삭막해 어울리지는 않았다. 그가 다부진 어깨를 들썩이며 자신이 그것도 모르겠냐는 듯 너스레를 떨었다.
나흘이라면, 예술전시회가 열리는 날인데. 깨달음과 동시에 시야가 쪼개지듯 거칠어졌다.
츠츳.
“윽.”
연결이 끊겼다. 이전보다 빠르게 끊긴 연결에 세벨리아는 염탐용 환영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앞으로 한 번 정도.’
세벨리아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신음하자 디하트가 재빨리 다가와 그녀 앞에 무릎 꿇었다. 세벨리아는 이제 그를 만류할 의지도 생기지 않았다.
“벨라, 괜찮아요?”
“잠시만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더불어 기진맥진해진 몸을 추스를 시간도. 그녀가 숨을 몰아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자 디하트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그가 클로드를 돌아보며 어떻게 해 보라는 듯 눈짓했다.
“…나보고 뭘 어쩌라고.”
“네가 스승이잖아!”
한껏 낮춘 목소리로 철딱서니 없는 삼촌을 야단친 디하트는 이후로도 안절부절못하는 눈으로 세벨리아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걱정이 되면 물이라도 떠다 주던지, 클로드는 턱을 괴며 바보 같은 조카를 응시했다.
잠시 뒤, 세벨리아가 진정된 듯하자 클로드가 여상스러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벨라 양은 너무 재능이 뛰어나다는 게 오히려 문제가 되는군요.”
“뭐?”
디하트가 무슨 헛소리냐는 듯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세벨리아는 그의 뒤편에서 지친 듯한 얼굴로 눈만 들어 클로드를 응시했다. 설명을 바라는 표정에 클로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평범한 환영술사라면 감각 공유 훈련을 몇 번 한다고 이렇게까지 동화되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
“벨라, 단순히 시각과 청각만 연결한 게 아니죠? 당신 정도의 재능이라면 스스로가 그곳에 있다고 느꼈을 거예요.”
“…맞아요.”
“역시. 그래서 연결을 끊을 때 몸에 과도한 부담이 생기는 겁니다. 뭐,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에요. 그 정도 재능은 되어야 한두 번 연습한 ‘뒤집어쓰기’도 무리 없이 해내지.”
클로드가 세벨리아의 뛰어난 재능에 탄복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한편, 디하트는 ‘뒤집어쓰기’라는 낯선 단어에 어딘가 찜찜한 구석을 느꼈다.
‘분명 들어 본 단어인데.’
하지만 딴생각도 잠시였다. 평정을 되찾은 세벨리아가 느닷없이 꺼낸 말이 그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예술전시회는 예상대로 함정인 모양이에요.”
클로드는 한탄했고, 디하트는 눈을 부릅떴다.
“제가 방금 본 건 넬리아와 딜리언 황자였는데…. 이야기를 듣자 하니 네이튼과 함께 무슨 수작을 부릴 생각인 것 같더군요.”
“그때 벼락으로 좀 더 구워 놨어야 하는 건데 말입니다.”
“그랬다면 아버지가 꼬투리를 잡아 늘어졌겠죠. 지나간 일은 차치하고 우리도 대비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일단 당신은 네이튼과 아버지가 뭘 하고 다니는지 알아봐 줘요.”
함정의 윤곽이라도 그리기 위해서는 황성에서 도통 나오지 않는 딜리언이나 일황비보다 웨든 쪽을 파야 했다. 세벨리아는 침착하게 앞으로 나흘 동안의 계획을 이야기했고, 두 남자는 심각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렇게 대충 각자 해야 할 일을 정하고 나자 어느덧 시간은 저녁때가 되어 있었다. 허기짐을 느낀 클로드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어느새 칼 어펜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 맛있는 냄새. 참기 힘들었다고.”
그의 뒤를 따라 걷던 디하트는 돌연 걸음을 멈췄다. 방금 전 그에게 찝찝함을 남겼던 ‘뒤집어쓰기’의 정체가 무엇인지 떠올랐기 때문이다.
뒤집어쓰기는 클로드가 제 환영 기술을 빗대어 하는 말이었다. 정교한 환영을 몸 위로 뒤집어씌우고 호흡과 동작에 맞추어 조작하는 고도의 기술.
동시에 붉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여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건 바로 넬리아를 만나러 갔다가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왔던 세벨리아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디하트가 고개를 홱 틀어 뒤따라오는 세벨리아를 바라보았다.
‘이제까지 잊고 있었다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했다. 세벨리아를 성급히 몰아세웠다는 자책감에 돌아서려는 때 그녀가 혼절했으니까. 하지만 디하트는 상황보다는 스스로를 탓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주 조심스럽고 상냥하게 물어보리라 다짐하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벨라.”
“네?”
세벨리아가 놀란 듯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푸른 눈동자 안에 가득 들어찬 제 모습에 디하트는 순간 흠칫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은 그가 보기에도 사나워 보였다.
디하트는 억지로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열려 있는 방으로 그녀를 부드럽게 이끌었다.
“디하트?”
“잠시 시간을 내줄 수 있나요?”
“무슨 일이에요?”
세벨리아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디하트는 머뭇거리더니 창문에 비친 제 얼굴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나서야 본론을 꺼냈다.
“사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때가 맞지 않아 여태껏 물어보는 걸 잊었네요. 혹시 저번에 마차에서 본 그 모습에 대해 물어도 되나요? 내 예상이 맞다면 클로드처럼 ‘뒤집어쓰기’를 한 것 같은데.”
“아.”
“캐묻는 건 아닙니다. 단지, 당신이 다른 모습을 취해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그런 순간에… 당신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하니까요.”
다시 한번 그런 순간이 온다면 그건 분명 세벨리아의 신변에 위험이 닥친 때일 것이다. 넬리아의 간계에서 겨우 몸을 빼내야 했을 때처럼 기지를 발휘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
그리고 그런 상황은 언제든 닥칠 수 있었다. 바로 며칠 후 열리는 예술전시회가 그 반증이었다.
‘만약 그곳에서 또 같은 일이 반복되고, 내가 저번과 달리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끔찍한 상상에 디하트는 이를 악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