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1)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1)화(11/171)
지참금을 팔아 여비를 마련하기 전까지의 짧은 시간. 세벨리아와 데니사는 별채에서 오랜만에 안락하고 풍요로운 시간을 보냈다. 때때로 그렌이 보낸 하인들이 별채 주변을 맴돌기도 했으나 쫓아내는 데 큰 힘이 들지는 않았다.
“이번에도 또 한 사람 기절했군요.”
데니사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거품을 물고 기절한 하인 한 명을 창문으로 내다보았다.
“그러길래 작작 하면 좋으련만.”
데니사가 혀를 차며 옆을 흘긋 바라보았다. 하인이 방금 전까지 열심히 엿보던 그곳에는 벨리타의 유령이 기괴하게 피를 흘리고 있었다.
“도대체 뭘 바라고 저러는 걸까.”
세벨리아가 벨리타를 돌려보내며 무심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원하는 대로 별채로 거취를 옮겼고, 이제 난 아무것도 아닌데…….”
도대체 뭐가 불안해서 저렇게 날 감시하려는 걸까.
그렌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세벨리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언제는 이해할 수 있었나.”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고 있었다면 그렇게 완벽히 속아 넘어가지도 않았겠지. 세벨리아는 쓴웃음을 짓고서는 데니사를 돌아보았다.
“내가 부탁한 건 어떻게 되었어?”
“시간이 조금 걸릴 듯해요. 가까운 곳에서는 팔 수 없는 노릇이니.”
데니사가 죄송스러운 얼굴로 세벨리아를 마주 보았다. 세벨리아는 그러지 말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아. 아직은 시간이 남았……음.”
말을 잇다 말고 세벨리아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급히 응접실을 떠나려는 그녀의 행동에 데니사는 이상을 알아차렸다. 데니사가 급하게 그녀의 팔목을 잡아챘다.
“아가씨!”
“쿨럭……!”
손가락 사이로 선혈이 흘러내렸다. 데니사의 얼굴이 삽시간에 창백하게 굳었다.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세벨리아를 의자로 데려갔다.
“누워 계세요.”
“난 괜찮…….”
“어서요!”
떨리는 목소리 끝이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세벨리아는 붉게 달아오른 데니사의 눈매를 보고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여기서 자신이 괜찮다는 말을 해 봤자 아무 소용 없을 게 뻔했다.
데니사가 분주하게 이곳저곳을 오갔다. 순식간에 따뜻한 물과 수건, 상비약을 챙겨 온 그녀는 세벨리아의 발치에 앉아 입술을 베어 물었다.
“능력을 알려 드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냥 그때 보내 드렸어야 했는데…….”
괴로움에 비틀린 음성이 자연스레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제가 너무 어리석었어요.”
소중한 사람이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과 눈앞에서 그 현실을 목격하는 건 전혀 다른 층위의 일이었다.
‘차라리 내가 대신 아팠다면 좋았을 것을.’
힘이 빠져 부들거리는 무릎을 느끼며 데니사는 왈칵 솟아오르는 눈물을 겨우 참아 냈다. 그녀에게 세벨리아는 자신이 키운 딸이나 다름없었다. 정성을 다해 키운 딸아이가 제 앞에서 피를 토하는 광경은 정말이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아.’
데니사가 식은땀이 나는 이마를 짚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었어요. 제가 괜한 짓을 해서 아가씨를 더 괴롭게…….”
“아니야, 데니사.”
세벨리아가 급하게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건 그냥… 반작용 같은 거야. 병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야.”
“그렇다면 더더욱 알려 드리지 않았어야 했어요! 제가 아가씨의 시간을 빼앗은 거예요. 저는…….”
고통에 까맣게 잠식된 데니사의 눈을 바라보며 세벨리아가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데니사. 그러지 마.”
단호한 목소리와 단단한 눈빛이었다.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이었으나 표정만큼은 더 없이 결연했다.
“데니사가 아니었으면 난 아무 계획 없이 도망쳤겠지. 그리고 언제 아버지가 찾아올까 전전긍긍하다 죽었을 거야.”
그녀가 데니사의 손을 두 손으로 맞잡고서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는 미래를 갖게 된 것만으로도 난 감사해.”
“…….”
“난 시간을 뺏긴 게 아니야, 더 값진 시간을 가질 기회를 얻게 된 거지.”
데니사는 세벨리아의 간절한 눈을 바라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자신 안의 죄책감에 숨이 턱턱 막혔다.
“정말이야.”
세벨리아가 부드럽게 속삭이며 그녀를 위로했다.
“그때의 난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그래서 제대로 된 준비 하나 못했지. 서둘렀다간 도리어 망쳤을 거야.”
바보 같게도 자신은 충분한 여비도 없이 도망치려고 했었다.
‘얼마나 무모했던지.’
데니사는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기를 수차례. 마침내 데니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세벨리아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고마워.”
“그런 말 마세요.”
데니사는 슬픈 듯 미소 지었다. 그녀는 준비해 둔 따뜻한 물에 수건을 적셔 천천히 세벨리아의 얼굴을 닦아 냈다.
“정말 꼴이 말이 아니네요, 아가씨.”
분위기를 풀기 위해 건네는 농담에 세벨리아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릴 때 어찌나 진흙 놀이를 좋아하셨는지. 매일 잔뜩 묻히고 오셔서 제가 이렇게 닦아 드렸는데.”
데니사는 이 순간을 기억 속에 새기려는 듯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 그녀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응, 나도 알아.”
세벨리아는 눈을 감고 그녀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녀는 모를 진실을 마음속에 끝까지 감췄다. 진흙 놀이 따위 단 한 번도 좋아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데니사가 날 신경 써 주는 게 좋았어.’
그래서 네이튼이 매번 그녀를 진창에 빠트릴 때도 참을 수 있었다. 방으로 돌아가면 따뜻한 물수건을 들고 자신을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 * *
라쉬는 객관적으로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는 걸 디하트는 알고 있었다.
형제의 아이를 성인이 될 때까지 책임지고 키워 준 데다 작위를 탐하지도 않았으니, 칭찬받아 마땅한 성품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디하트는 사람이란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뭐, 조카에게 숨기고 싶은 행선지이긴 하군.’
어둠 속에서 라쉬를 뒤쫓는 디하트 눈빛에 경멸이 묻어 나왔다. 그의 존경받아 마땅한 숙부의 뒤를 쫓은 게 어언 한 시간. 디하트는 결국 시궁창 중에서도 가장 최악에 속하는 아편굴에 도착하고 말았다.
이상한 건 라쉬가 골목 여기저기 널브러진 아편쟁이들을 지나쳐 안쪽으로 더 깊숙하게 들어가고 있다는 거였지만.
‘도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걸까.’
보통 아편굴보다 더 깊은 골목에는 세상의 그림자에 숨어 이득을 챙기는 이들이 머물기 마련이었다.
바스락.
그때, 디하트의 발에 무언가가 차였다. 그는 쓰레기겠거니 하고 발을 치우려다 인상을 쓰고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자 라이언이 그에게 속삭였다.
“주인님, 신경 쓰이신다면 이 뒤는 제가….”
“아니.”
어둠 속에서 형형히 빛을 발하는 그의 금색 눈동자가 천천히 종이 위에 새겨진 글자를 읽어 내렸다. 라쉬가 뿌리고 다니는 향수의 향이 진하게 배인 종이에는 유달리 눈에 익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세벨리아의 유별난 성적 취향과 관련된 소문 다섯 가지. (중략) 성과가 난 뒤에는 그녀의 어릴 적 기행에 관한 내용을 뿌려서…….]“아하.”
디하트는 그대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하. 헛웃음이 터져 나오고, 금색 눈동자가 빠르게 불타올랐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살벌한 목소리였다. 일순간 그의 주변으로 번개가 내리친 것 같았다. 흐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던 약쟁이들이 바싹 몸을 물렸다. 순식간에 공포로 골목을 장악한 그는 품에서 검은 장갑을 꺼냈다.
탁! 질긴 가죽 장갑을 손목 끝까지 당겨 착용한 그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어떤 시궁쥐였나 했더니 내 집에서 함께 먹고 자던 쥐새끼였단 말이군. 아니, 날 키워 준 쥐인가?”
“주인님.”
숙부를 쥐새끼로 폄하하기 여념 없는 그를 라이언이 불렀다. 물론 그의 거친 말을 타박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라이언의 손이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 멀리, 라쉬가 골목 안쪽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디하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 * *
악취로 가득 찬 골목길을 헤치는 디하트의 눈동자 안쪽으로 차가운 불길이 치밀어 올랐다.
‘어떻게 감히.’
라쉬는 그가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단순히 자신을 키워 준 걸 넘어서 가문에 이바지하는 걸 사명처럼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앞장서서 세벨리아에게 모욕을 가해?
‘어쩐지 계속 다른 여자를 만나 볼 생각은 없냐며 허튼소리를 일삼더니.’
라쉬는 후계자가 없는 제 처지를 걱정한다면서 다른 여성을 만나 볼 것을 권유했다. 물론 개 같은 소리였다. 아니, 지나가던 개가 비웃고 그를 이빨로 물어뜯어도 싼 소리였다.
[디하트,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은 제대로 된 아내라 볼 수 없어. 다들 네 선택을 이해할 거다.]이게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애초에 그녀와 동침하지 않기로 정한 건 그였다. 근데 왜 그게 세벨리아의 허물이 되지? 그래서 그는 침착하게 라쉬의 개소리를 논파했다.
[저는 젊고, 제 아내 또한 젊습니다. 아이를 가지는 시기는 저희 둘이 합의해 정할 테니 숙부님은 염려 놓으시죠.] [내가 어떻게 마음을 놓아. 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겨우 네가 일곱 살 때다.]그러나 라쉬는 당당하게 그의 정신 나간 소리를 밀어붙였고. 결국 자신은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어야만 했다.
[……좋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죠.] [뭘 말이냐.] [제 후계자는 가문에서 가장 강한 아이로 삼겠습니다. 만일 제 친자식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약하다면 절대 후계자는 될 수 없을 겁니다.]동시에 허공에서 무언가가 번쩍이더니 라쉬의 발치를 내리찍고 사라졌다.
[너……!]발밑이 둥그렇게 불타오른 흔적을 보며 라쉬는 그때 어떤 표정을 지었던가.
디하트는 비좁은 골목을 달리듯 지나치며 불쾌함에 미간을 좁혔다. 아마 억울함과 배신감에 가득 찬 표정이었던 것 같다.
‘당신이 감히 배신을 논하면 안 되지.’
주먹 쥔 그의 손과 꽉 다물린 턱이 라쉬에 대한 그의 분노를 여실히 나타내고 있었다. 세벨리아를 쫓아내기 위해 이따위 추잡스러운 짓을 벌이는 사람이 또 다른 일은 못 하겠는가.
디하트는 빼돌려진 광물과 고문 도중 살해당한 배신자를 떠올리며 조용히 숨을 골랐다. 라쉬가 도시 외곽으로 빠지는 길로 들어가고 있었다. 디하트는 검을 빼 들고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불안함에 뛰는 심장을 내리눌렀다.
‘빨리 끝내고 바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그가 걱정하는 세벨리아는 이미 저택을 떠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