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10)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10)화(110/171)
디하트가 뜻밖의 고민에 시달리는 걸 본 세벨리아는 아차 싶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상황이 여의치 않아 설명한다는 걸 잊었다. 그녀는 어쩔까 하고 고개를 기울이다가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클로드와 눈이 마주쳤다.
‘말해도 될까요?’
‘마음대로 해요.’
제법 친밀해진 스승과 제자는 입 한번 벙긋하지 않고 완벽한 의사소통을 나누었다. 그때쯤 디하트는 자신이 세벨리아를 억지로 방에 끌고 들어왔다는 것을 자각하곤 새하얗게 질린 참이었다.
“이러려던 게 아닌데.”
창백한 얼굴로 읊조리는 그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세벨리아가 그를 안심시켰다. 그러고 보니 자신도 그에게 할 말이 제법 있었다.
“일단 진정해요. 걱정하는 바는 잘 알겠으니까.”
“벨라…….”
“사실 물어봐 줘서 고마워요. 나도 잊고 있었던 부분이거든요.”
디하트가 고개를 기울이자 세벨리아가 그를 방 안으로 이끌며 문 쪽으로 눈짓했다. 그러자 클로드가 소리 없이 문을 닫았다. 세벨리아는 안심하고 디하트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아마 당신이 그때 보았던 모습을 내가 다시 취할 일은 없을 거예요.”
“예?”
“그때는 운이 좋아서 뒤집어쓰기를 준비할 수 있는 도구와 시간이 있었거든요. 아마 두 번 다시 같은 일을 하지는 못할 거예요.”
염탐용 환영을 고정하기 위한 주술사의 부적. 그 여분을 넬리아의 흉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모두 사용한 지금, 세벨리아는 뒤집어쓰기를 할 수 없었다.
“뒤집어쓰기는 클로드 씨의 특기예요. 제가 아니라. 사실 그때도 실패한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기억나지 않아요? 클로드 씨와 달리 저는 뒤집어쓰기를 했음에도 체격과 목소리가 달라지지 않았잖아요.”
“그건, 그래요. 그렇군요. 클로드는 칼 어펜츠일 때 목소리도 다르죠.”
세벨리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디하트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실상이 그러한 걸 어찌한단 말인가.
“그럼 이제 걱정거리 하나는 해결된 거죠?”
“아…. 미안합니다.”
디하트가 탄성을 내지르며 입술을 매만졌다. 별일 아닌 것에 트집을 잡았다는 듯 머쓱함이 가득한 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세벨리아가 순간 빙긋 웃었다.
“그럼 이제 제 차례네요.”
“예?”
디하트의 금빛 눈이 멍하게 깜빡였다. 세벨리아는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의자에 앉혔다. 디하트가 익숙하게 그녀를 올려다보자 세벨리아는 품에서 달칵이는 무언가를 꺼냈다.
“밤새 이걸 피우면서 자고 있던데요.”
아직도 잔향이 남은 은갑을 보며 디하트는 낮은 신음을 흘렸다. 모양 좋은 손가락이 미간을 짚고, 두 눈동자 위로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디하트, 이건 각성향 중에서도 중독성이 강한 종류예요.”
“……알고 있습니다.”
느리게 흘러나온 대답에 세벨리아는 작은 한숨을 삼켰다.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으로 디하트를 바라보다가 은갑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당신은 한번 강한 약에 중독된 경험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니 함부로 이런 것에 손을 대면 안 되는 것 정도는 알아야죠.”
디하트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난처하다는 듯 얼굴을 감싼 손 사이로 떨리는 눈동자가 보였다. 세벨리아가 단호히 말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
“오지랖이라는 건 알지만 몇 마디 말을 더 보태야겠어요. 디하트, 이건 당신 건강을 위해서만이 아니에요. 아픈 당신을 밤새 돌보던 클로드 씨를 조금이라도 생각해 봐요.”
세벨리아는 디하트의 상태에 대해 아는 게 없냐며 간절한 얼굴로 자신을 붙들던 클로드를 떠올렸다.
수십 년이 지나 겨우 만난 조카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광경을 직접 봐야 하는 삼촌의 마음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그때 그는 아마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세벨리아가 슬픈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디하트는 폐부를 찌르는 듯한 그녀의 눈빛에 입술을 벙긋거리다 천천히 입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노력하죠.”
거친 음성으로 디하트는 약속했다. 얼굴을 반이나 덮은 손이 잘게 떨렸으나 세벨리아는 그의 말이 기뻐 보지 못했다.
“앞으로 각성향은 피우지 않겠습니다.”
“정말이죠?”
“그래요.”
한편, 디하트로부터 긍정적인 대답을 들은 세벨리아는 시름을 놓았다. 한결 편안해진 낯으로 그녀가 산뜻하게 말했다.
“그럼 이만 가요, 다들 기다리고 있겠어요.”
“그래요.”
디하트는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점점 벌어지는 거리에 세벨리아가 의아한 눈으로 뒤를 돌아봤으나 그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길게 늘어진 세벨리아의 그림자가 제 발끝에 닿는 걸 보며 그는 켜켜이 쌓인 욕심을 삼켰다.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가면 자신도 모르게 껴안아 버릴 것 같았다.
나를 걱정했냐고, 조그만 희망이라도 가져도 되겠냐고, 어리석은 질문들을 참지 못하고 퍼부을 것만 같았다.
그러니 지금 그에게는 이 정도의 거리가 최선이었다.
* * *
가장 먼저 식사를 끝낸 건 디하트였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세벨리아의 존재가 자꾸만 제 신경을 빼앗아 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벌써요?”
세벨리아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디하트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곁에 앉아 헛된 질문을 퍼부을 뻔했으나 가까스로 참아냈다.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아…….”
미묘한 탄식과 함께 세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디하트는 그녀 몰래 클로드에게 눈짓한 뒤 정찬실을 빠져나왔다.
잠시 뒤, 클로드가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디하트는 지체 없이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야?”
문을 열자 클로드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디하트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심각한 일은 아니야.”
“흠.”
“정말이야. 단지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음? 네가 내게 궁금한 게 있다고?”
“정확히 말하자면 벨라의 스승인 당신에게 궁금한 거지.”
디하트가 꺼낼 말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클로드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가 씩 웃어 보이자 디하트가 눈매를 찡그리며 말했다.
“벨라의 특기를 알아내기 위한 훈련은 그래서 어떻게 된 거지?”
세벨리아의 특기가 클로드의 것만큼 유용하다면 직접 함정에 몸을 던지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될지도 몰랐다. 디하트는 그 실낱같은 가능성을 아직 버리지 않고 있었다.
“아아, 그거…. 네 기대를 배반해서 미안하지만 아직도 별다른 성과는 없어.”
클로드가 턱을 쓸어내리며 말을 흐렸다. 본래 세벨리아는 염탐용 환영을 만들기 전, 그녀의 특기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자신과 함께 여러 환영술을 연습했었다.
“뭐, 단서가 없는 건 아닌데 말이야.”
클로드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으려던 순간이었다. 복도 저편에서 시끄러운 발소리가 울렸다.
일레이가 눈매를 찌푸린 채 다급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는 두꺼운 종이 뭉치를 소중히 껴안은 채 노크했다.
“공작님. 일레이입니다.”
클로드를 한 번 돌아본 디하트가 머리를 쓸어올렸다. 일레이가 다급히 온 이유야 뻔했다. 첩자가 보낸 보고를 추려온 거겠지. 그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어펜츠 씨, 이 이야기는 나중에 이어서 하도록 하죠.”
클로드는 어깨를 으쓱이고선 자리를 떠났다.
* * *
“일황비가 그녀를 초대했다고?”
의자에 반쯤 기대어 책을 읽던 샤테이안이 고개를 틀며 물었다. 하얀 속눈썹에 감긴 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자 루드밀은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무래도 직접 만나 회유를 해 보려는 것 같습니다만…….”
말끝을 흐린 건 제가 알아낸 정보에 대해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일황비는 고작 이런 일에 직접 나설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샤테이안 또한 루드밀과 의견이 같았다.
“확실히 수상한 냄새가 나는군. 내가 아는 일황비께서는 그분의 아드님을 제외한 가족을 벌레보다 못하게 여기시는데 말이야.”
그런데 고작 약혼녀의 잃어버린 가족을 위해 친히 초대장을 보내고 직접 만나 회유를 하신다. 그럴 리가 없지. 샤테이안이 피식 웃었다.
“…….”
“어떻게 생각하나, 루드밀. 사실 그대야말로 일황비의 손속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일 텐데.”
샤테이안이 햇볕 아래 고양이처럼 뒹굴며 눈을 가늘게 접었다.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입니다만…….”
루드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일황비가 보내온 암살자들을 밤이고 새벽이고 할 것 없이 막아내던 날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어느 날에는 자신을 이곳에 두고 간 발라크를 원망하며 하늘에 욕설을 퍼부은 적도 있었다.
루드밀은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숨이 턱 막혔다. 그가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애초에 그런 무지막지한 인해 전술은 이곳에 와서 처음 접했습니다. 사람을 소모품처럼 버리는 짓이라니. 확실히 일황비 전하에게 사람의 마음이 없다는 건 잘 알게 되었지요.”
“하하, 사람의 마음이 없다라. 꽤나 상냥한 평가로군.”
샤테이안이 작게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을 보아하니 곧 발라크가 도착할 시간이었다.
“어찌 되었든 발라크에게 좋은 소식을 가져다줄 수 있게 되어 다행이군. 그렇지 않아도 요 며칠 내내 사촌 동생을 만날 방법을 강구하라고 징징거리는 것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는데 말이야.”
샤테이안이 투덜거리며 옷매무새를 매만졌다. 사실 그녀를 만나고 싶은 마음은 자신도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인버네스 저택에 콕 박혀 모든 방문과 초대를 거절하는데 어쩌란 말인가.
그러나 발라크의 징징거림에 들들 볶이는 날도 이제 끝이었다. 샤테이안은 안도감 반, 두근거림 반의 심정으로 발라크를 기다렸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그에게 드디어 원하던 말을 들려주었다.
“발라크, 어서 오게. 아주 좋은 소식이 있어.”
“뭐? 벨라가 나와 만나겠다던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외투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눈을 빛내며 다가오는 발라크는 흡사 광인 같았다. 그를 진정시키며 샤테이안이 말을 이었다.
“이거 원 무서워서 말을 못 하겠군. 그리 흥분하지 않아도 만나게 될 거야. 내일 황가의 주최로 열리는 예술전시회에 그녀가 초대받았다더군.”
샤테이안이 수완 좋게 빼돌린 초대장 두 개를 들어 보이자 발라크가 눈살을 찌푸리며 그것을 빼앗았다. 이윽고 발라크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