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11)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11)화(111/171)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촌오빠가 그녀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을 무렵, 세벨리아는 클로드와 함께 파란 새의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집중하고 있었다.
피릿!
“앗, 안 돼!”
교감을 위해 노력하던 순간, 파란 새는 갑자기 창문 밖의 세상에 관심이 생겼는지 포로로 날아가 버렸다. 세벨리아는 허탈한 얼굴로 창문을 열어 달라 항의하는 새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하지만…….”
“안 돼요. 어제도 제대로 자지 않고 새벽까지 연습한 걸 내가 모를 것 같아요? 이제 그만 쉬어요. 환영마의 이름은 자연스럽게 떠오를 겁니다. 때가 되면.”
그때가 지금 당장이면 좋으련만. 세벨리아는 코앞으로 다가온 예술전시회를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심란한 마음을 알아차린 클로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했다.
“너무 스트레스받지 말아요. 오히려 그것 때문에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걸지도 모르잖습니까. 걱정하지 말고 마음에 여유를 가져요.”
“하아, 그게 뜻대로 되면 좋겠는데 말이에요.”
세벨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자꾸만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염탐용 환영도 이제 한 번밖에 남지 않았는데 신호는 잡히지 않고, 고작 분신을 만들어 냈다고 그렇게 기절해 버린 것도…….”
“그만, 거기까지 해요. 당신은 잘하고 있어요. 애초에 그렇게 정교한 분신을 만들고 도망친 그 정신력은 칭찬받아 마땅한 재능이라고요.”
클로드가 이제는 삑삑대며 허공을 선회하기 시작한 파란 새를 붙잡아 안으며 말을 이었다.
“잘할 수 있을까 걱정되고, 내가 부족한 건 아닐까 위축되고. 안 좋은 생각들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하지만 한 가지만 기억해요.”
“무엇을요?”
“당신이 부족하다 한들 상관없이 그 공백을 채워 줄 사람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요.”
클로드가 파란 새를 건네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앉아 있는 세벨리아의 시선에는 닿지 않는 곳, 저 멀리 정원에 우두커니 서서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금빛 눈동자의 사내가 보였다.
“그것만 기억해도 충분할 겁니다.”
창문을 등지고 선 클로드가 싱긋 웃어 보였다.
* * *
“정원 손질은 원래 이렇게 끝이 없는 겁니까? 며칠 전부터 틈틈이 돌보시던 것 같은데 도무지 티가 안 나네요.”
가시가 난 꽃대를 다듬던 디하트가 고개를 돌려 일레이를 응시했다. 어둑한 금빛 눈동자가 그를 가만히 훑더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네가 정원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그런 한심한 방법으로 알려 줄 필요 없다.”
“으음, 저는 그게 아니라아.”
“알고 싶지도 않고.”
싹둑, 잘못 자란 가지를 잘라 내며 툭 내뱉은 말이 제법 묵직했다. 일레이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디하트의 눈 아래가 시커멓게 죽어 있는 걸 발견했다. 그는 제 둔한 신경에 한탄했다.
‘잠을 못 주무셔서 신경이 날카로워지셨구나!’
하긴 요 며칠 사이 그의 상관은 밤잠을 줄여 가며 일황비의 세력권을 캐기 위해 노력했다. 그걸로도 모자라 함정의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네이튼에게 붙인 첩자로부터 꼬박꼬박 들어오는 역겨운 소식들을 모두 훑어야 했으니 몸이 두 개였어도 모자랐을 것이다.
일레이는 뒤늦게 디하트에게 동정심과 비슷한 경외감을 느꼈다. 그 짜증 나는 시선을 느낀 디하트가 참다못해 고개를 돌렸다.
“보고를 하러 온 게 아니라면 적당히 하고 꺼져라.”
“아, 보고하러 온 거긴 합니다만.”
디하트의 눈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일레이가 가져오는 소식이라고는 대개 네이튼과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레이는 가슴 한구석이 짜르르해지는 걸 느끼며 그에게 서신을 전달했다.
“…….”
“이번에도 비슷한 내용입니까?”
“그래.”
한숨을 내쉰 디하트가 장갑을 벗어 던지고는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레이의 말대로 네이튼에게 붙인 첩자가 보낸 보고는 저번과 비슷하지만 조금 더 구체적인 내용이었다.
네이튼 웨든은 매일같이 술집을 전전하며 밤 나들이를 지속하고 있으며 손버릇이 나쁘고 여색을 탐한다는 내용. 거기까지는 별것 없었으나 가까이 지내던 여인 중 몇 명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게 수상했다.
‘하지만 전부 전시회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들이지.’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간 그는 털썩 의자에 몸을 묻었다. 네이튼의 추문은 그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으나 지금 당장 도움이 되는 정보는 아니었다.
‘역시 사일러스에게 붙인 첩자에게서 소식이 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나.’
디하트는 그대로 몸을 틀어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수업을 끝마치고 산책을 나온 세벨리아와 그녀의 어깨에 앉은 파란 새가 보였다. 분명 그럴 리가 없건만, 저 조막만 한 새의 단춧구멍 같은 눈과 시선이 마주친 것도 같았다.
“…쯧.”
하는 수 없지. 혀를 찬 그는 코트를 집어 들고 집무실을 나섰다. 뒤늦게 도착한 일레이가 눈을 반짝이며 따라붙었다.
“직접 나서시는 겁니까? 공작님 성격에 손 놓고 가만히 앉아 있는 건 역시 안 맞는다니까요.”
“너는 언젠가 그 입으로 망할 게 분명해.”
충직한 건지 멍청한 건지 알 수 없는 부관에게 악담을 퍼부으며 디하트는 저택을 나섰다.
* * *
어느덧 저녁이 되었다. 세벨리아는 정찬실에서 디하트를 기다리다 뒤늦게 그의 부재를 알아차렸다.
“말 한마디 없이…….”
“그럴 만한 일이었나 보죠. 연락 없이 나간 걸 보니 늦지 않게 돌아올 셈인가 봅니다. 식사부터 들어요.”
클로드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스테이크를 썰었다. 그의 옆에 앉은 워츠는 이미 조용히 혼자만의 식사를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세벨리아는 자신과 달리 무덤덤한 두 남자를 바라보며 눈을 내렸다.
‘쪽지 한 장이라도 남겼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다면 이렇게 신경 쓰이지는 않을 텐데. 세벨리아는 느리게 나이프를 움직이며 음식을 깨작거렸다. 그녀가 제대로 식사하지 못한 걸 발견한 클로드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벨라? 왜 그래요. 혹시 음식이 상했습니까?”
“아, 아니에요.”
세벨리아는 화급히 손을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클로드를 만류했다. 그리고 덩달아 심각한 얼굴로 품에서 약병을 꺼내려는 워츠도 말려야만 했다.
“파란 새의 이름을 언제 붙여 줄 수 있을까 걱정되어서, 잠시 정신이 다른 데 팔렸던 것뿐이에요.”
“참… 당신은 걱정이 너무 많다니까요. 오늘 하루쯤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그냥 여유롭게 즐겨요.”
“그래 볼게요.”
세벨리아는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애매모호한 상태 그대로 저녁 식사가 끝났다. 클로드는 방으로 올라갔고, 워츠는 언제나처럼 서재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세벨리아는 정처 없이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어디로 가 볼까.”
수도에 위치한 인버네스 저택은 힐렌드 홀만큼 장엄하고 역사가 깊지는 않았지만 대저택인 만큼 규모 면에서는 훌륭했다. 어제는 서재를 살펴봤으니 오늘은 화실을 구경할까.
세벨리아는 자꾸만 디하트에게 쏠리는 신경을 막기 위해 억지로 걸음을 옮겼다. 문제는 거기서 발생했다. 채광이 좋은 곳을 선호하는 디하트의 집무실이 화실 근처에 있었던 것이다.
세벨리아는 고민했다. 집무실을 뒤지면 디하트가 무엇 때문에 갑자기 자리를 비웠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가 그래도 될까?’
사실 며칠 전 새벽에 디하트의 침실을 무단침입한 뒤로, 그는 언제든 원한다면 마음껏 제 집무실과 침실에 들어올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날 이후 침실은커녕 집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간 적도 없었다.
이유라고 한다면 별거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어찌 되었든 디하트와 자신은 그렇게 친밀하게 굴 만큼 사이좋은 사이가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부부였을 때도 디하트의 집무실에 직접 찾아간 적은 없었어.’
세벨리아는 천천히 과거를 떠올렸다. 그때도 하지 않았던 일을 남이 된 지금 아무렇지 않게 행할 수는 없었다. 세벨리아의 상식에 견주어보아 그건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지…….’
무슨 일로 자리를 비운 건지 궁금하지만 기다릴 수밖에 없겠어. 세벨리아는 아쉬움과 미련을 조금 남긴 채 등을 돌렸다. 머뭇거리며 발을 떼려는 그 순간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이고.”
그림자 진 푸른 눈동자가 순식간에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어둑한 복도 저편에서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건 클로드였다.
“정말 한 세월이 걸리네.”
“크, 클로드 씨?”
“그냥 클로드라고 부르라는 말은 끝까지 안 듣는군요. 그래서, 들어가고 싶은 거예요. 아닌 거예요?”
직설적으로 물어오는 말에 세벨리아는 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클로드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온 그가 집무실 문에 손을 대고서 세벨리아를 내려다보았다.
“벨라.”
“네?”
“내가 스승으로서 당신에게 환영술 외에 가르쳐 준 게 없다는 걸 무심코 깨달았지 뭐예요. 이래서야 스승 자격 박탈이라니까. 당신이 환영마의 이름을 찾지 못하는 것도 내 탓일지 몰라요.”
세벨리아가 해괴한 것을 보는 눈으로 클로드를 응시했다. 그는 세벨리아의 눈빛을 가볍게 무시하고 손가락을 들어 강조했다.
“벨라, 기억해요. 뻔뻔함과 담대함은 환영술사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랍니다.”
대관절 그게 무슨 소리래. 세벨리아는 조금씩 그에게서 몸을 떼기 시작했다.
“클로드 씨, 죄송하지만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흠, 미안해요. 말이 길었죠? 전 그저 상황이 애매할 땐 저질러 보는 것도 꽤 괜찮은 답이라는 걸 하나뿐인 제자에게 가르쳐 주고 싶을 뿐이었어요.”
세벨리아가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그는 악동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철컥, 열쇠가 맞물리며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끼이익….
세벨리아의 등 뒤에서 문이 열렸다. 창문을 열어 두고 나갔는지 서늘한 바람이 목 뒤를 스치고 지나갔다. 클로드가 즐거움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런, 문이 열려 버렸네. 이걸 어째.”
“어…….”
“어이쿠, 저거 지금 서류 날아가는 거 아니에요?”
사색이 된 세벨리아는 집무실 안으로 날듯이 뛰어들었다. 클로드의 함정에 빠졌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